5화 의뢰꾼 (2)
* * *
‘심판의 날’과 함께 헌터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대전역 인근은 늘 사람이 붐볐다.
10년 전의 얘기다.
하지만 지금은 을씨년스러운 찬 바람만이 부는 침묵과 고요의 장소가 되어 있었다.
상점이 많았던 번화가는 공실만 가득한 죽음의 거리가 됐다.
그리고 사람이 전혀 안 다니는 텅 빈 거리가 되어, 주변 시선에서 자유로운 비밀 지대가 되었다.
이예린은 강후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선 뒤, 먼저 운을 뗐다.
“저는 선규 씨에게 딱 한 가지만 볼 거예요. 스킬을 피할 수 있는가. 그것뿐이죠.”
“암살자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적어도 제 몸 하나 간수 할 수 있는지를 본다는 거겠죠.”
“맞아요. 피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공격 기회를 바로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 되니까.”
이런 테스트를 원했다.
아무리 입에 발린 소리를 해봤자, 이예린처럼 실력으로 평가하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믿지, 귀를 믿지 않는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움직임을 본다.
“준비됐습니다.”
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항상 빛을 발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고유 능력이 있다.
‘언제든 장시환의 뒤를 노릴 수 있는, 긴장감을 줄 빌런이 되도록 해 뒀던 안배.’
왜 더 많은 재능을 주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하지만 그때는 빙의할 줄 몰랐으니 그랬을 수밖에.
그래도 ‘암살자’로서의 정체성은 확실하게 잡아뒀기에 미래에 대해서는 불안하지 않았다.
다만 긴장해야 할 부분은 있다.
뛰어난 재능을 과신하는 일.
장시환을 비롯한 열세 개의 별은 정말 무서우리만치 자신들에게 혹독한 실력의 잣대를 적용한다.
아득히 높은 실력으로 그들만의 세상에서 사는 부역자 놈들도 그럴진대, 느슨해질 자유는 없다.
“시험 스킬은······.”
“바로.”
친절하게 시험용 스킬을 알려주려는 이예린의 말을 끊었다.
위장과 위선이 난무하는 전장에 그런 ‘매너’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슈르륵!
이예린이 바로 자신의 양손 위에 녹색 빛의 구체를 만들어냈다.
어떤 스킬인지는 보자마자 바로 파악을 끝냈다.
‘안개 추적자.’
안개 형태의 하수인을 만들어낸 뒤, 목표물에 들러붙도록 만든다.
안개가 스치기만 해도 목표물의 몸에 흔적이 남아서 먼 곳에서도 얼마든지 추적이 가능하다.
공격 스킬이 아니기에 피격당하더라도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킬을 피하지 못했다는 증거는 남으니, 그 자체로 테스트가 끝나는 셈이다.
화악!
이예린이 불쑥 손을 뻗으며, 안개 추적자를 강후에게 보냈다.
시전자의 뜻대로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기에 굉장히 까다로운 녀석이다.
‘적당히 피할 재주만 있어도 밥값은 하는 거니까.’
이예린의 머릿속에 강후가 피하는 그림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얼마나 늦게 안개 추적자에게 당하는가.
아니나 다를까.
‘역시.’
강후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제자리에 긴장한 듯이 멈춰 선 것이 보였다.
예측이 어려울 것이다.
이예린이 좀 더 추진력을 불어넣자 안개 추적자가 속도를 높이며 순식간에 강후를 덮쳤다.
바로 그때.
파아앗!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던 강후의 몸이 10m는 족히 뒤로 빠진 곳에서 나타났다.
‘레벨 10 암살자치고는 기본 도약 스킬이 너무 화려하잖아?’
산전수전 다 겪은 이예린이기에 자신의 클래스가 아니어도, 다른 스킬에 대한 견적은 낼 수 있었다.
지금 강후가 보인 도약 스킬의 성능은 레벨 250 이상의 암살자가 보일 수 있는 숙련도였다.
그것도 잘 풀렸을 경우를 가정한 것이고, 350에서 400까지로도 볼 수 있는 수준.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이예린이 곧바로 안개 추적자의 속도를 더 높였다.
안개 추적자는 레벨 250의 그녀가 주로 쓰는 스킬 중 하나인 만큼, 성능을 극대화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쿠와아아!
공간을 가르는 굉음까지 들려올 정도로 속도가 붙었다. 실로 벼락같은 덮침이었다.
스으윽.
하지만 강후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딱 두 걸음만 옆으로 이동해서 공격을 말끔하게 피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우뚝 솟아 있던 기둥을 타깃으로 삼아 횡이동으로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기둥 뒤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은신이 활성화된 것이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이예린이 마나의 흐름을 추적하며 강후의 위치를 특정하려 했을 때.
‘앞이라고?’
이예린이 본능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몸이 먼저 반응하며 뒤로 쭉 물러났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강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 후에 도약 스킬을 쓰면서, 바로 역공을 노렸던 것이다.
물론 진짜 살의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와.”
당황, 놀람, 의외, 안도.
다양한 감정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예린이 손짓으로 안개 추적자를 소멸시켰다.
이미 테스트는 충분히 된 것 같았기에 바로 강후에게 물었다.
“훈련받은 적 있어요?”
“없습니다.”
“레벨 스캔은 분명히 10이 맞는데. 이런 감각적인 움직임을 탑재할 수 있는 레벨은 아니잖아요.”
“검증된 겁니까?”
강후는 그녀의 말에 굳이 답을 해줄 필요가 없어 화제를 돌렸다.
중요한 건 방금 했던 일의 목적이니까.
“네. 이 정도면 레벨 50 정도로 판단하고 의뢰를 해도 될 것 같아요.”
“참, 잘됐네요.”
긍정이 듬뿍 담겨 있는 말의 내용과 다르게, 강후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예린은 강후를 보며, 그가 평생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입가의 근육이 상당히 경직되어 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분명 사연이 있는 헌터 같은데, 그가 자신에게 속을 드러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대화의 결이 그렇잖은가?
그는 철저하게 이야기의 핵심을 제외한 그 어떤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 * *
이예린이 끌고 온 검은색 밴 안에서 다음의 이야기가 이뤄졌다.
용병 일에 얽힌 두 사람의 대화라고 해봤자, 의뢰 제안과 수락의 단순한 구조다.
밴 안에는 겹겹으로 창문에 붙여둔 투명한 판이 있었는데, 방탄 용도가 분명해 보였다.
강후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의뢰서를 꺼내며 말했다.
“요즘 귀찮은 총잡이가 하나 더 붙었거든요. 이클립스 놈들의 사랑을 듬뿍 받다 보니. 호호.”
이클립스에서 그녀를 경계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권 사업에서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터.
총잡이가 붙었다는 건, 마나 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거너’ 클래스의 헌터가 미행함을 의미한다.
굳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더라도 언제든 그녀를 노릴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에 가깝다.
“이겁니까?”
강후가 손을 뻗어 이예린에게서 의뢰서를 넘겨받았다.
그녀의 말에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결국 그녀의 일이다.
안다고 해서 신경 써 줄 일도 아니다.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네. 수배자 추적 의뢰예요. 의뢰인은 저고요. 선규 씨에게는 쓸만한 의뢰일 거예요.”
용병단의 사람들은 내용을 최대한 축약하되, 핵심을 담는 작업에 익숙하다.
이예린에게서 넘겨받은 의뢰서도 필요한 정보와 용건만 짧게 적혀 있었다.
【김목현. 레벨 50. 마법계.】
【경기도 오산. 버려진 폐허 던전. 3등급 아이템 ‘바르타로스의 신발’에 대한 회수 요청.】
“살려서 와야 합니까?”
강후의 말을 들은 이예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큭. 아, 미안해요. 이런 질문을 바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만.”
보통 왜 수배자가 되었는지.
그러니까 추적을 당하게 된 이유를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강후는 생포가 필수인지 아니면 아이템 회수만 할 수 있으면 죽여도 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사실 나쁘게 말할 구석은 없고, 좋게 말하면 프로페셔널하게 의뢰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했다.
이예린이 말을 이었다.
“죽여도 돼요. 김목현의 소행으로 확인된 일반인 살인이 너무 많아서요. 오히려 좋아할걸요?”
“헌터 치안청에서는?”
“잡으면 현장 처형이에요.”
헌터 치안청.
국가기관으로 다수의 헌터 치안관이 있지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서울이 전부.
어쨌든 치안청의 판단이 공식적인 근거를 갖기에, 처형 판단이면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물론 법의 체계가 와르르 무너진 작금의 세계에서, 법의 입김이 닿는 곳은 대단히 제한적이다.
김목현 정도의 잔챙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의뢰품만 회수하고.”
“네. 나머지는 선규 씨가 다 갖든, 처분하든 뭘 하든 제 의뢰 사항 밖이에요.”
“바로 착수하죠.”
“버려진 폐허 던전이 워낙 넓어야 말이죠. 구석에 박혀있을 테니, 쉽진 않을 거예요.”
“직접 찾아 나서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치칙. 치칙. 화르르륵!
강후가 바로 의뢰서를 태워버렸다. 내용은 머릿속에 담았으니 더 확인할 것도 없다.
그녀가 말을 보탰다.
“보상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공할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 받기를 원하죠?”
이예린에게 의뢰를 받기 전부터 강후의 생각은 하나였다.
“던전 공략 라이센스만 얻을 수 있으면 됩니다. 특히 미들 보스, 라스트 보스가 많은 쪽으로.”
중간 보스 몬스터라고도 불리는 미들 보스, 그리고 보스 몬스터.
이 둘에게서 스킬을 강탈할 수 있다.
다른 헌터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보스의 고유 스킬을 얻는 것이다.
강후는 레벨은 물론, 보유 스킬의 개수를 최대한 빠르게 늘리고 싶었다.
성좌 덕분에 어떤 스킬을 얻어도 숙련도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 무조건 이득이다.
“좋아요. 보상은 사후 협의? 아니면 사전 협의?”
이예린의 말에 강후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서는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단장의 센스를 믿어보죠.”
그 말을 끝으로 강후는 경기도 오산시로 향하는 무궁화호를 타기 위해 역으로 이동했다.
* * *
기차 안.
임박해서 표를 구매했음에도 한 자리가 비어 있어 꽤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앉아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좌석 전체가 온통 피로 물든 자리였던 것이다.
붉은색이 제법 강한 것을 보면, 어제나 그저께쯤에 칼부림이 났었던 모양이다.
완벽한 미신에 가깝지만.
대부분 헌터들은 핏기가 가시지 않은 좌석이나 벤치 위에 앉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현실은 그런 자리를 피하려다가 다른 곳에서 서로 엉켜, 감정싸움이 돼서 피를 보지만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미신이나 징크스 따위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강후에게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버려진 폐허. 정식 던전으로의 첫 데뷔로 나쁘지 않은 곳이군. 공략법도 확실히 알고 있고.’
시작은 마음에 들었다.
버려진 폐허 던전 전체가 원작에서 신강후의 도피처로 쓰였었던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