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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4화 (4/304)

4화 의뢰꾼 (1)

* * *

주변을 둘러싼 모든 풍경이 물에 탄 잉크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할 즈음.

한서연의 오피스텔에 도착한 강후는 처음으로 모든 부담을 내려놓고 푹 쉴 수 있었다.

바보같이 그녀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에게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이별하기 전까지 애틋했던 사이라고 한들, 결국은 남이 되어버린 과거의 인연일 뿐인데.

한서연은 항상 마음속에 자신을 품고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자신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를 믿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배신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남은 미련 때문에 그럴 수 없을 테니까.

한서연도 헌터였다.

레벨은 150으로 강후와 비교하면 아득히 높은 세계에 있는 실력자였다.

강후는 만난 순간부터 한서연의 성좌에 대한 정보가 보였기에.

헌터로서는 그녀를 자신보다 한참 앞서 나가 있는 실력자로 판단하고 있었다.

“······.”

한서연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강후를 살폈다.

처음 오피스텔에 데려왔을 때보다야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얼굴이 창백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디 납치라도 당했던 거야?”

그녀가 속상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강후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라 혼잣말이었지만······.

“이클립스에게 납치당했었어.”

강후가 바로 답했다.

깊은 잠에서 깬 지는 좀 됐다.

단지 눈을 감고 쉬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몸 상태가 빠르게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오빠, 안 잤던 거야?”

“아냐. 덕분에 잘 잤어.”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꽤 흐른 탓인지, 한서연의 외모도 달라져 있었다.

전보다 더 근육질의 구릿빛 몸이 된 것은 물론,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흑발도 쇼트커트가 됐다.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막 헌터 세계에 입문한 초보였는데.

지금은 산전수전 다 겪고서 찌들대로 찌든, 오랜 짬밥의 헌터를 보는 듯하다.

“이클립스라면······. 마석 광산으로 끌려갔던 거야? 그놈들, 헌터들 납치하기로 유명하잖아.”

“마석을 캐려면 마나가 필수니, 나 같이 레벨 낮은 헌터가 좋은 먹잇감이었을 수밖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빠······. 미안해. 내가 평소에 자주 연락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한서연의 눈에서 당장에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그녀의 감정이 깊어지기 전, 강후가 차갑고도 냉랭한 말을 돌려줬다.

“내 운명을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나 역시 네 운명에 뭐라 하지 않듯이 말이야.”

“하지만.”

“마음 쓰는 건 그쯤 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는 신세가 될 거야. 주고받은 셈 치자.”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차갑게 구는 그 성격은 안 바뀌었네. 오빠, 다 티나.”

“이젠 나랑 엮여서 좋을 게 없을 거야. 이클립스에서 추적할 수도 있고.”

“오빠, 나도 헌터야. 레벨 150. 어지간한 애들이 함부로 못 건드리는 수준까지 올라왔어.”

“그래. 그 힘은 널 위해서 쓰면 되는 거야. 나까지 신경 쓸 것 없어.”

“······.”

한서연이 대답 대신, 침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닫힌 마음은 잘 열지 않는 강후다.

그런 성격을 잘 알기에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대신 준비해 둔 것들을 강후에게 쓱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갈아입고 나갈 새 옷. 그리고 세탁이 깨끗이 된 스마트폰이야. 어지간해선 추적이 안 될 거야.”

“소속 길드가 적당히 회색 경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양이네.”

“응. 그리고 100만 원. 여기서 더 넣으면 오빠가 거절할 것 같아서 필요한 만큼만 뽑아왔어.”

“그래.”

“그리고 간단한 자료도 준비했어. 당장 서울 갈 계획이 아니면, 이 자료를 보는 게 좋을 거야.”

한서연이 내민 자료는 정식 길드가 아닌 용병단에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강후에게는 꼭 필요했던 자료이기도 했다.

길드에 들어가는 것은 여러모로 강후에게 위험한 일이라서다.

‘열세 개의 별’과는 접점이 생길 일을 줄여야 하는데, 국내 길드에는 장시환의 입김이 꽤 닿는다.

장시환과 직접적인 연줄이 없더라도, 열세 개의 별의 영향권에 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즉, 안전하지 않다.

지금이야 성좌 ‘차원 강탈자’에 대해서 열세 개의 별들, 그러니까 부역자들의 인지가 없지만.

어느 순간 인지되고 나면, 집요한 추격과 제거 시도가 이뤄질 것이다.

그래서 길드나 범죄 조직, 지방 군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용병단에서 의뢰만 받는 ‘의뢰꾼’을 하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의뢰꾼은 의뢰가 마무리되고 난 후에는 완벽하게 남남이 되므로, 따로 엮일 일도 없다.

강후의 시선이 한곳에 오래 멈춰있자, 한서연이 말을 덧붙였다.

“가장 가까운 용병단은 내가 연결해줄 수 있어. 아는 언니가 단장으로 있기도 하고.”

“가명은 상관없고?”

“당연하지. 레벨 스캔하고, 기초 검증을 하는 정도만 제외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야.”

“그럼, 여기로 연결을 해줬으면 해. 마지막 부탁이 될 것 같다.”

“뭘 자꾸 마지막, 마지막 그래? 오빠가 전에 내게 주었던 사랑과 마음을 돌려주는 거라 생각해.”

“서연아.”

“응?”

“과거에 갇혀 있지 마.”

용병단의 ‘아는 언니’에게 막 연락을 넣으려던 순간 한서연의 손이 멈췄다.

강후가 건넨 말에서 느낀 깊은 울림 때문이었다.

과거에 갇혀 있지 말라는 말은 분명 그녀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니까.

한서연이 고개를 돌린 채, 붉어진 눈시울을 닦아내며 전화를 걸었다.

동시에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강후에게 말했다.

“잘 지내, 오빠. 늘 건강하고.”

“너도 건강하길 바랄게.”

그것으로 애틋했던 지난 감정도 모두 지금 이 순간에 묻었다.

* * *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연락이 닿았고, 강후가 만날 용병단 단장과 접선할 장소도 정해졌다. 대전역 인근이었다.

짧은 포옹을 마지막으로 한서연과 이별한 강후는 다시 대전역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앞서 탈출 과정에서 얻은 아이템을 잠시 살폈다.

도끼는 따로 쓸 일이 없을 듯했다. 이런 무기를 활용하는 재주는 없었으니까.

나중에 적당히 가격을 받고 팔면 될 것이다. 도끼를 쓰는 헌터들이 아예 없진 않으니 말이다.

【순풍의 목걸이】

【등급 : 7등급】

【민첩 +15】

【상승의 기력 팔찌】

【등급 : 6등급】

【체력 +25】

【1분당, 체력 1 추가 회복】

마지막에 처치한 헌터에게서 빼앗은 목걸이와 팔찌는 각각 착용을 마쳤다.

기본 스탯이 턱없이 낮은 강후의 입장에서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아이템들이었다.

도합 40의 스탯이 올라갔다.

레벨로 보면, 40레벨 상승에 해당하는 스탯을 손쉽게 아이템으로 메꾼 셈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탈출 과정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됐군.’

확실히 그랬다.

청명 수용소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아이템을 전부 빼앗겼기 때문이다.

빈털터리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만큼, 쓸만한 아이템이 채워지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었다.

그때, 택시 기사가 차내의 고요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강후의 눈치를 봤다.

“손님, 라디오 좀 틀려고 합니다만. 괜찮으실까요?”

“그러시죠.”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사가 늘 듣던 주파수에 채널을 맞췄다. 때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장시환 헌터는 강원도 정선에 본거지를 둔 용병단 ‘하얀 장미단’ 전원을 척살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얀 장미단은 강남역 11번 출구의 테러 사건을 획책한 범죄 조직으로 오래전부터 장시환 헌터의 추적을 받아왔습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얀 장미단은 테러 조직이 아니다.

당연히 강남역 11번 출구의 테러 사건도 그들의 소행이 아니다. 장시환의 자작극이다.

하지만 내막을 모르는 일반인의 시점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마침 택시 기사가 강후가 생각했던 것과 딱 같은 말을 꺼냈다.

“역시 장시환 님! 대한민국에 이런 영웅적인 헌터가 있다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이미지메이킹의 힘이다.

더 나아가 앞으로 강후가 마주할 미래의 맛보기이기도 했다.

부역자의 엔딩을 바꾸기 위해 본격적으로 장시환과 대척점에 서기 시작하면, 그는 전력을 다해 자신을 악당으로 몰 것이다.

원작에서 수도 없이 이뤄진 일.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열세 개의 별은 언제든 여론을 자신들의 뜻대로 만들 힘이 있다.

“저희 아들도 얼마 전에 헌터로 각성했는데, 어떻게든 장시환 님의 길드에 들어가려고 하더군요.”

강후는 기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혼 없는 긍정을 하고 싶지도, 굳이 감정이 담긴 부정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다.

‘가깝게 보면 레벨 20이 가장 중요해. 스킬을 얻는 순간에 바로 숙련도 최대가 될 테니.’

헌터에게 있어 기본 스킬 획득은 레벨 1, 10, 20, 30, 40, 50, 100의 순서로 이뤄진다.

더 확장하면 200, 400, 800도 포함되지만 상당히 먼 이야기이기에 보통 100까지를 본다.

성좌 효과를 톡톡히 보려면 어쨌든 스킬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레벨 20이 되는 방법도 있고, 보스 몬스터로부터 스킬을 강탈하는 방법도 있다.

다만 연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던전 출입은 언감생심인 만큼,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비용을 현금으로 결제하고 내리자마자,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 있던 ‘단장’이 강후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서연이에게 얘기 들었어요. 고등학교 동창이셨다면서요? 저는 이예린이에요.”

“정선규입니다.”

강후가 가명을 댔다.

악수로 맞잡은 그녀의 손을 따라서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

‘버퍼 겸 마법사다 이건가.’

강후는 그녀에 대해 잘 알았다.

훗날 열세 개의 별에 대적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설정해 둔 존재니까.

아마 지금 시점에도 레벨이 최소 250은 넘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일 수도.

당연히 성좌도 스캔된다.

【혼돈의 관찰자】

【중립 성향의 성좌. 시야 왜곡과 차단에 특화된 능력을 가진 성좌입니다.】

‘서열 100위권 내에 있는, 든든한 후원자를 두고 있기도 하지.’

나름 공들여 설정한 인물을 이른 시점에 만난 덕분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중 신강후와는 추구하는 바와 그 결이 비슷하기에 앞으로 도움이 될 일이 훨씬 더 많을 듯했다.

“어떤 일이 하고 싶죠? 채집 의뢰?”

레벨이 10이라는 것은 이미 한서연을 통해 전달된 터라, 그것에 맞는 견적을 미리 낸 듯했다.

물론 강후가 원한 일은 아니다.

“던전 공략도 좋고. 아니면 까다로운 수배자 추적도 상관없습니다만. 보상만 확실하면.”

“수배자야 한두 놈이 아니지만, 마음 하나만으로 놈들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요.”

“놈들을 잡는 데 레벨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얼마나 놈들의 습성을 잘 파악했느냐가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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