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탈출 (3)
* * *
어둠이 짙게 깔린 비탈길 위를 달빛에 의존하며 내려가는 동안.
강후는 짧은 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상황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탈출 과정에서 간수 세 명을 죽였다. 원작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아직 이 세계에서 형편없는 내 비중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로 미래가 바뀔 일은 없겠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는 미래가 비틀리지 않길 바랐다.
그만큼 아는 것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오늘의 변화로 성좌와의 계약이 무려 3년이나 일찍 이루어졌다.
강해질 준비는 끝났다.
이 특성과 능력을 치열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활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탈출을 선택한 이유가 퇴색된다.
사삿. 사사삿.
비탈길을 따라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새벽이라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있었다.
‘성좌와 계약한 헌터다.’
그것은 바로 이쪽으로 추적해오는 헌터의 머리 위에 보이는 붉은 점이었다.
차원 강탈자와 계약하게 되면서 얻은 성좌 강탈 능력이 특성으로 활성화된 덕분이다.
성좌를 보유하고 있으면 자동으로 머리 위에 붉은 점이 표시되는 성좌 탐색 능력이 있기에 위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능숙한 교감자】
【중립 성향의 성좌. 마나 추적 능력을 보유한 성좌입니다.】
‘아, 이래서 날 추적할 수 있는 거군. 마나의 흐름이 느껴질 테니까.’
멀리서 불빛 하나 없이, 정확하게 이 위치를 특정하고 올 수 있는 이유를 알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저 헌터는 레벨이 최소 100은 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레벨 100이 될 때, 성좌와 계약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간택’이라고 불리는 절차다.
물론 훨씬 낮은 레벨에서도 계약은 이뤄질 수 있었다.
격이 떨어지는 성좌라면 세상 물정 모르는 계약자를 꼬셔서 의도적으로 조기에 묶어두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에 달린 셈이다.
어쨌든 레벨 100의 헌터면, 지금 상황에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정면승부는 피해야 한다.
그 대신.
‘끌어들여 친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강후가 마침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굵은 나무 뒤에 멈춰 섰다.
서로 위치가 어디쯤인지 짐작은 해도, 두 눈으로 볼 수는 없을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사악!
강후가 들고 있던 장검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그리고 선혈이 뚝뚝 흘러내리는 손으로 돌멩이 하나를 힘껏 움켜쥐었다.
피가 짙게 묻었다.
그렇게 시간이 약간 흐른 뒤.
파악!
앞의 굵은 나무와 눈높이가 맞는 지점에 힘껏 그 돌멩이를 밀어 넣었다.
깊게 홈이 파여있던 나무줄기라서 납작한 돌멩이를 밀어 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아 있는 마나를 모두 짜내듯 끌어내선, 돌멩이에 한 번 더 불어넣었다.
“······.”
이어 숨을 죽인 채로 마나 과민 상태를 억제했다.
원래 상태로 두면, 폭발적으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위장의 의미가 없다.
“우욱.”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어서인지 바로 구역질이 났다. 동시에 쇠 맛도 함께 났다.
과민증으로 기절하기 전 징조.
단기간에 마나를 과도하게 많이 쓰고 회복하는 탓에 몸에 과부하가 걸려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강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등 뒤에 보이는 나무를 타깃으로 삼아 횡 이동을 성공시키자 몸이 투명해졌다.
파슷! 파슷! 타앙!
이윽고 이동 스킬을 활용해 거리를 좁힌 헌터가 힘껏 추진력을 더하며 몸을 날렸다.
마나가 느껴지는 위치가 정확히 나무 뒤였기에, 고민할 것도 없이 그쪽으로 화력을 집중한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
그가 들고 있던 무기는 도끼였다.
퍼억!
묵직한 도끼날이 나무 옆을 강타하자 나무 전체가 흔들리며 도끼에 파인 곳이 사선으로 꺾였다.
하지만.
“없어?”
가장 중요한 존재가 없었다.
바로 강후였다.
헛물을 켠 헌터에게 돌아온 보답은 어디선가 불쑥 들어온 날 선 장검이었다.
푸욱!
“커걱······!”
턱 아래를 뚫고 들어온 장검이 그대로 얼굴 한가운데를 지나, 이마 위를 뚫고 나왔다.
강후의 노림수가 통한 것이다.
제아무리 레벨 높은 헌터라고 한들, 강철 턱을 가진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능력을 믿고, 강후의 위치를 확신한 나머지 주변 경계를 놓쳤던 헌터의 패착이었다.
【대상을 죽이고, ‘능숙한 교감자’와의 계약을 탈취하였습니다.】
【‘능숙한 교감자’는 ‘차원 강탈자’에게 예속된 관계가 되며, 소멸과 계약 해지 이외에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능숙한 교감자’의 모든 능력이 당신에게 계승됩니다.】
이 메시지가 떴다는 것은 헌터가 죽었다는 뜻이다. 혹은 살아날 가망이 아예 없거나.
“커, 크걱, 커거걱······.”
헌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쓰러져가며, 강후의 몸을 잡히는 대로 움켜쥐었다.
성좌의 계약을 강탈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헌터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기억했을 것이다.
사기나 다름없는 능력이니까.
한데 지금 자신의 얼굴에 장검을 꽂아 넣은 이 탈옥수에게 그런 황당한 능력이 있었다.
쿠웅!
헌터가 쓰러졌다.
숨이 끊어진 심장은 다시 뛰지 못했다.
【추가 능력 열람】
【마나 추적 능력】
【야시(夜視)】
“좋아.”
쓸만한 능력을 얻었다.
야시 능력을 얻기가 무섭게, 마치 적외선 야시경을 착용한 것처럼 어두웠던 시야가 달라졌다.
마나 추적 능력은 이 헌터가 자신을 추적한 것처럼, 은신한 적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우웨에엑!”
방금의 일격으로 또 한 번 마나를 무리해서 쓴 탓인지, 이번에는 참을 수 없는 토악질이 나왔다.
그것도 붉은 피가 섞여서 나올 만큼 영 좋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만 더 무리하면 이 자리에서 그냥 뒈지겠군.”
강후가 주변을 살폈다.
마침 비탈길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간 위치에서 새 도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모래를 잔뜩 실은 덤프트럭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일단 이거라도 챙겨야······.”
강후가 어질어질한 머리를 움켜쥐고 죽은 헌터에게서 도끼 한 자루와 목걸이, 팔찌를 챙겼다.
어떤 구성인지 확인해 볼 틈도 없이 전력으로 달렸고, 트럭의 모래 위로 힘껏 몸을 날렸다.
철푸덕!
모래와 일체가 된 몸.
“후아.”
강후가 뜨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더럽게 맑네.”
반짝이는 별들의 아른거림에 푹 빠진 채,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안전한 곳이 필요하다.
* * *
30분 후.
청명 수용소에서 막 도착한 소식을 전달받은 한 남자가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강동현.
이클립스의 서열 3위이자, 정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1위, 2위를 제외한 사실상의 대장이었다.
충청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범죄 조직 이클립스는 인력 착취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마석 광산에서 많은 일꾼을 부렸는데, 그만큼 마석이 큰돈이 됐다.
헌터의 시대가 열리며 일부 광물이 마석으로 변했는데, 청명산도 그렇게 변한 마석 광산이었다.
“정문으로 나갈 생각을 하다니, 똑똑한 놈이군. 수용자에 어울리지 않는 당당함이 무기였겠지.”
강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떠올린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확실한 답을 찾아낸 강후에게 감탄했다.
【신강후】
【레벨 10. 암살자 클래스.】
【입소 시 모든 아이템을 몰수하였으며, 이후 육성 정보는 없음. 파악된 거주지 정보도 없음.】
보고서의 형태로 동봉된 강후의 정보도 확인했다.
대부분 수용자가 그렇듯, 간수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전투조차 할 수 없을 초보 스펙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고 한들, 간수 하나만 붙어도 순식간에 무력화되고 마는 것이다.
가장 직급이 낮은 3급 간수라고 해도, 최소 레벨 35는 넘어갈 기본적인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레벨 10 헌터가 45, 55 둘, 여기에 성좌를 둔 100까지 잡았다 이건가······? 미친 새끼네, 이거.”
강동현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보고서를 곧이곧대로 믿자니, 눈뜬 바보가 된 느낌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레벨 10의 헌터면 던전의 전투 경험도 제한적일 테고.
심지어 수용소에서 생활을 2년 이상 했으니, 전투적인 감각 자체가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어떤 노림수인지는 몰라도, 저 정도 헌터들이 손도 못 쓰고 당하려면 강력한 일격이 필요하다.
“하나는 뒤에서 목 옆을 젓가락으로 찔렀고. 둘은 뒷좌석에 태웠다가 대가리가 쪼개졌고. 마지막 이놈은 마나 추적 능력도 있는데 턱 아래를 찔려······?”
기가 차는 결과물이다.
이 정도면 죽여달라고 아예 대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강동현은 강후가 탈출한 사실에 분노하고 있지는 않았다.
수용자의 탈주는 흔한 일이니까.
강후가 없다 해서 일이 마비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일꾼이야 또 납치해오면 그만이다.
다만 수준이 제법 되는 헌터를 단숨에 제압한 레벨 10의 헌터라고 하니 관심이 가는 것이다.
“이상한 데서 관심이 가는군.”
쭉 빨아들인 담배 연기만큼이나 강동현의 눈빛도 깊어졌다.
인생 패배자라고 규정한 탈옥수에게 관심을 가질 일이 생길 줄이야.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 강후의 행보는 특별함이 있었다.
* * *
대전역 인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공중전화를 가까스로 찾아낸 강후가 기억을 더듬어 전화를 걸었다.
원작의 신강후와 동기화된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무의식에 깊이 박힌 번호였다.
-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음성.
제대로 연락이 닿은 듯해, 일단 마음이 놓였다.
“나야, 강후.”
- 가, 강후 오빠?
“어.”
- 오빠! 도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2년 넘게 연락이 안 돼? 아무리 헤어진 사이라도 그렇지······.
타박하는 듯하면서도, 안타까움과 애절함이 함께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이름은 한서연.
강후의 ‘전’ 여자친구였다.
성격 차이로 헤어진 사이.
그래서 헤어지기는 했어도 흔한 남사친, 여사친의 느낌으로 종종 연락을 하고 지냈었는데.
2년 전부터는 연락이 두절됐던 것이다.
강후에게 벌어진 일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그럴 일이 있었어.”
자초지종을 구구절절 말할 힘도 없기에 짧게 말을 끊었다.
시간은 흘렀어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기에, 그녀도 강후의 말에 대답의 방향을 바꿨다.
- 오빠, 뭐가 필요한 거야?
“하루만. 네 집에서 좀 쉬자.”
- 알았어. 내가 곧바로 데리러 갈게. 어디인데?
“대전역 5번 출구 옆 공중전화. 미안해.”
- 미안은 무슨. 예전에 오빠가 나한테 해줬던 걸 생각하면 이건 당연한 보답이야. 기다려! 금방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