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55화 (355/391)

355화

마뇌가 남몰래 행사한 일이라면 천봉항가의 인물이 천마신교를 떠나 중원에 임무를 수행하러 간 것을 눈치 못 챈 것도 어련히 납득이 갔다.

하지만 납득이 간 것과 그 일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천휘의 안광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천마신교의 군사, 마뇌 고경(高經).

그와의 첫 만남은 다른 곳이 아닌 천마십관(天魔十關)에서 이뤄졌었다.

즉 천마신교에 입교할 당시란 뜻이었다. 그리고 그때 독고구연의 실력을 본 마뇌는 그 즉시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충성을 맹세하고, 그때부터 쭉 그를 따랐었다.

오대가문의 음습한 술수와 회유.

팔마종(八魔宗)의 습격.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마뇌는 단 한 번의 배신도 없이 충성을 바쳤으며, 놀라운 처세술로 교도들을 구워삶아 민심까지 얻어 냈다.

결국에 그런 그의 능력이 밑받침되어 당시 독고구연은 천마신공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주직에 올랐고, 마뇌는 두뇌와 처세술을 인정받아 천마신교의 군사가 되었다.

그만큼 오래되고 깊은 인연이었기에, 크게 표현하지 않았다 해도 그 또한 은연중에 마뇌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삼백 년이 흐른 지금 그 신뢰에 금이 갔다.

‘나 몰래 그런 짓을 벌였다고?’

천봉항가가 중원에 뿌리를 내리게 된 이유는 머리에서 지워졌다.

머리에는 오직 마뇌만 떠올랐다.

‘왜지?’

천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곰곰이 사흑련주가 한 말을 되짚고 생각해 봤지만,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봉항가를 지킬 생각이었으면 아예 처음부터 다른 곳을 치자고 했을 터였고, 자신 또한 그리했을 것이었다.

어차피 천봉항가 말고도 팔마종 중 절반가량이나 그의 교주직에 반대하고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마뇌는 굳이 천봉항가를 언급했으며, 그들은 그로 인해 멸문을 당했다.

그런데 그 시기를 피해 한 명을 중원에 보냈었다?

그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천휘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봐도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거리를 벌인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참 생각하기를 잠시.

‘……쯧.’

천휘는 결국 속으로 혀를 차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더 생각해 봤자 소용이 없겠어.’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에 대한 진실은 이제 영영 알 수 없었다.

이미 삼백 년이 흘러 버렸다.

진실을 아는 유일한 인물, 마뇌는 이미 명을 달리했을 터였다.

‘끝까지 내가 몰랐을 정도라면 마뇌가 철저하게 감췄을 테니, 이후에도 남은 게 없겠지.’

조금 찝찝하지만, 어찌 되었든 의문을 털어 낸 천휘가 하던 생각을 지울 무렵.

“……마교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사파의 무인인 양 행세한 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지.”

때마침 사흑련주가 말을 마쳤다.

“이번에는 내 차례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 그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곧바로 입을 달싹였다.

“너는 어떻게 향을 구분한 거지?”

날이 선 목소리였다.

“귀혼마경의 향을 이전에 맡아 보기라도 했나?”

이전에 대답한 말의 허점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천휘는 담담했다.

‘그걸 물어볼 줄 알았지.’

이 질문은 진작 예상하던 바였다.

그렇기에 천휘는 이미 생각해 둔 대답을 입에 담았다.

“마기의 향을 맡아 봐서 알거든.”

“마기……?”

사흑련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어 그가 쏘아붙였다.

“천마신교가 중원에 모습을 안 보인지 벌써 백 년이 흘렀다. 그런데 어떻게 마기의 향을 맡았다는 거냐?”

정론을 담은 그의 음성이 스산하게 내리깔리던 찰나.

“성질이 급한걸. 지금은 네가 물어볼 차례가 아니야.”

천휘가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리면서 현재 상황을 일깨워 주듯 말했다.

“내 차례지.”

“…….”

사흑련주가 입을 다물었다.

하나 그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면서 천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말대로였다.

이 대화는 협상이었다.

서로가 한 번씩 주고받는.

천휘는 입을 다문 사흑련주를 응시한 채,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귀혼마경에서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던데, 누가 그렇게 한 거지?”

물음에 사흑련주의 눈이 실처럼 아주 가늘어지더니, 곧 입술이 벌어졌다.

“본좌다.”

“오, 정말?”

천휘의 눈이 반들거렸다.

투기와 호승심이 차오른 것이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공력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직접 귀혼마경을 재정립할 정도의 실력까지 겸비했다는 말이지?’

입술이 가로로 길게 찢어질 때.

“이제 내가 물을 차례군.”

사흑련주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마기를 어떻게 접한 거지?”

질문에 천휘는 말없이 우수를 움직였다. 어느새 손은 허리춤에 매달린 두 자루의 검 중 검은색의 검집을 낚아챈 뒤, 탁자 위에 놓았다.

뒤늦은 ‘탁’ 소리가 울렸다.

“……검?”

사흑련주가 뜬금없이 탁자 위에 올려진 검을 가만히 응시할 무렵.

스릉―

천휘가 검파를 쥐고 살짝 뽑았다.

그리고 그 순간.

후우욱!

강렬한 마기의 폭풍이 일었다.

응축되어 있던 마검의 마기는 단숨에 공간을 휘청거리게 하더니, 밤의 어둠을 삼켜 갔다.

“……!”

사흑련주가 놀란 듯 마검을 바라봤다.

“이걸로 대답은 충분하지?”

말과 함께 천휘가 바로 납검했다.

탁.

마검이 검집에 모습을 감추자 몰아치던 마기의 폭풍이 씻은 듯 사라지며,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함이 탁자에 드리워졌다.

조금 전 광경은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마검…….”

심유한 음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육합전성이었다.

어느새 공력을 끌어올린 사흑련주가 두 눈동자를 번뜩여 댔다.

그 눈동자에는 지독한 탐욕과 더불어 차가운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화산의 검수가 그것을 가지고 다녀도 되나?”

“쯧쯧, 오히려 내 손에 있으니 안전한 것 아니겠어?”

“…….”

사흑련주는 침묵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엄청난 검이었다.

검이 모습을 드러낸 짧은 순간, 자신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아주 진한 마기가 흘러나오지 않았는가.

만약 마공을 익힌 마인(魔人)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아니. 검수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것이었다.

그 정도로 매혹적인 검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절세고수인 천휘의 품에 있는 것이 다른 어디에 두는 것보다 안전하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었다.

“검집으로 마기를 억눌렀군.”

사흑련주가 검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새까만 검집에 넣어진 검에서는 좀 전에 느꼈던 마기는 한 톨도 감지되지 않았다.

“신기하지?”

천휘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 사흑련주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심리의 허점을 정확하게 찌르는 행동이었다.

천하의 어느 누가 매화신협이 마검을 차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자신조차 검이 뽑히기 전까지 마검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 검을 쳐다보던 사흑련주가 돌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끝을 내겠다는 행동이었다.

“음? 더 안 묻고 가려고?”

천휘가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탁자 위에 올려 뒀던 마검을 옆구리에 매단 채였다.

“더 물을 것이 남았나?”

“아니. 내 쪽에서는 더 없기는 한데.”

천휘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은연중에 피어난 매화신공의 공력이 그의 전신을 천천히 감싸 왔다.

순수한 기운의 결정체.

투명하기 짝이 없는 공력이 움틈과 동시에 은은한 적광을 발휘했다.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적광의 향연이 펼쳐지는 가운데 천휘의 입이 움직였다.

“이대로 그냥 가는 게 신기해서.”

천휘의 음성에 영성이 깃들었다.

“살인멸구할 작정 아니었어?”

“……알고 있었군.”

“당연하지.”

천휘가 입매를 바짝 치켜올렸다.

“어느 정도 높이 올라간 놈들은 자신이 추락할 수 있는 조금의 위험 가능성도 놔두고 싶어 하지 않잖아.”

천휘의 눈이 서늘한 빛을 발했다.

사흑련주가 과거 천마신교의 가문 중 하나인 천봉항가의 가주란 것이 알려진다면, 련주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여태 쌓아 왔던 모든 것이 무너질 터였다.

간신히 살아남은 천봉항가 역시 위험에 처하겠지.

그런 위험 부담을 남기기 싫은 것이 당연하리라.

“그것을 알면서 혼자 온 건가?”

“그렇지.”

“자신감이 넘치는군. 아니.”

사흑련주가 눈을 반개했다.

“오히려 이 상황이 벌어지기만 기다린 것 같군.”

그의 음성이 너울졌다.

육합전성이었다.

곧이어 부지불식간 일어난 귀혼마경의 공력이 다시금 그의 전신을 일렁이며 자줏빛의 광채를 발했다.

이내 그의 발에서 옅게 흐르던 미풍이 돌풍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짜릿한걸.’

불시에 빠르게 솟아난 공력의 파동에 천휘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살갗을 찌르는 그의 공력은 바짝 날이 서 있던 투쟁심을 더욱 격양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강렬했다.

“살갗이 저릿저릿한데?”

천휘가 말과 함께 눈을 빛냈다.

돌연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겹쳤다.

우우웅―

둘 사이의 공간이 어그러졌다.

매화신공이 일으킨 붉은 광채.

귀혼마경이 일으킨 자줏빛의 광채.

두 광채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동시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 위해 밀어내기를 반복할 때.

쩌저적!

둘의 공력 싸움에 버티지 못한 탁자가 이내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몰아치는 사흑련주의 강렬한 기세에 천휘가 화월의 검파를 쥐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당장이라도 뽑아서 사흑련주와 무공을 겨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선공? 후공? 아무거나 상관없나.’

싱글벙글 웃던 천휘가 화월을 검집에서 뽑아내려던 찰나.

“하지만.”

돌연 고저 없는 음성을 흘린 사흑련주가 공력을 화했다. 바람에 호롱불이 꺼진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단숨에 사라진 공력에 그의 주변으로 자줏빛에 물들었던 밤하늘이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오고, 가느다란 바람이 뺨을 스쳤다.

“이제 그럴 필요 없겠군.”

말을 마친 사흑련주는 더 이상의 미련이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응?”

그 모습에 천휘가 눈을 찌푸렸다.

한창 투기로 달아오르던 와중에 갑자기 상황을 정리하고 몸을 돌리니, 짜증도 났다.

“꼬리를 말고 도망가려고?”

천휘가 그를 향해서 도발하듯 말했다. 이렇게 된 거 그가 먼저 나서서라도 겨뤄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네놈이 함구하기로 한 이상 살인멸구까지 할 필요는 없지.”

사흑련주는 담담한 태도였다.

“만약 내가 함구를 깨트린다면?”

“말했을 텐데.”

순간 사흑련주의 음성이 한껏 사나워졌다.

“너와 화산도 추락한다고.”

“……안 넘어오네.”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은 사흑련주에 표정에 천휘 역시 호승심이 식어 갈 때.

“남 좋은 일을 할 생각은 없다.”

사흑련주가 말을 건네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응? 남 좋은 일?”

“아직 모르나 보군.”

천휘의 의문에 사흑련주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흘기듯 천휘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묘한 안광이 천휘를 사로잡았다.

이어 그의 붉은 입술이 떼어졌다.

“무림맹주, 그놈이 본좌와 네가 만나는 것을 모르고 있을까?”

“뭐?”

뜬금없는 무림맹주 언급에 천휘가 공기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

사흑련주의 대답은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시 물을 수 없었다.

그 말과 함께 자주색의 장포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가 싶더니, 사흑련주가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천휘는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인기척을 감지하고는 그 방향으로 발을 떼려다 멈췄다.

‘가 봤자 뭐 하겠어.’

어차피 생사결은 결렬됐다.

따라가 봤자, 무얼 하겠는가.

아예 싸울 의지가 없는 상대를 붙잡고 싸우는 취미는 없었다.

게다가 그것보다는 사흑련주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더욱 중요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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