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섭혼제령술이 이렇게나 힘없이 무너진 것은 오랜만이군.”
사흑련주가 차분하게 말했다.
혼령안과 더불어 펼친 섭혼제령술이 삽시간에 파훼됐음에도 불구하고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는 것 외에는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파훼될 것을 이미 예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천휘는 그런 그의 반응에 재미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별것 아니던데.”
도발에 가까운 어조였다.
하지만.
“그런가.”
사흑련주는 여전히 무심했다.
이어서 그는 기세를 갈무리했다.
혼령안이 단숨에 흩어짐과 동시에 섭혼제령술을 펼치며 드러났던 자줏빛의 광채가 어느새 어둠에 잠겼다.
사락―
동시에 귀혼마경의 공력에 의해 흩날리던 장포 또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진 결과.
즉 조금 전 이령산맥을 크게 뒤흔들던 공력은 그의 전력이 아님을 뜻했다.
‘마기도 없이 이 정도라…….’
천휘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내공을 퍼트리고 갈무리하며 스며져 나온 편린에서 그의 무위를 대략적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전생 때 천봉항가의 가주, 수라마존(修羅魔尊)보다 윗줄 같은데?’
불현듯 천휘의 눈이 반개했다.
그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귀혼마경은 마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절세의 마도절학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서는 아무런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기 특유의 기운도, 분위기도.
오직 귀혼마경의 향만 존재했다.
그런데도 수라마존보다 뛰어난 무위를 지녔다는 것이었으니.
‘누가 귀혼마경을 이렇게 바꾼 것인지는 몰라도 상당한 놈이야.’
순간적으로 입술이 씰룩거렸다.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무릇 무공을 창안하기 위해서는 대해처럼 넓고, 깊은 무론이 필요했다.
그런 방대한 무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무공 창안이건만, 이미 완성이 된 무공을 바꾼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무공을 새로이 창안할 때에는 자신의 무론과 심득만을 녹이면 될 일이지만, 이미 완성한 무학을 바꾸려면 무공을 창시한 대종사(大宗師)의 무론과 심득은 유지한 채 자신의 것을 녹여 내야 하기에.
그래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나 만약 성공하면 본래의 무공 절학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천휘가 매화이십사수검법을 새로이 정립해 창안한 칠절매화검이 그러하지 않은가.
‘마기 없이 새로이 변한 귀혼마경의 극성이라, 직접 보고 싶은데.’
천휘의 눈에 투기가 차오르던 중.
“하지만 덕분에 얻은 게 많군.”
툭 내뱉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을 뱉은 인물, 사흑련주는 말을 마치더니 발걸음을 움직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천휘를 지나쳐 간 그는 자연스럽게 협정에 사용했던 의자에 다가가 착석했다.
“앉지.”
자리에 앉은 그가 입을 달싹였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
“오호라.”
천휘가 눈을 빛내며 발을 떼고는, 단숨에 공간을 격했다.
이내 낮에 무림맹주가 앉은 의자에 착석한 천휘가 등을 기대는 순간.
“귀혼마경을 잘 아나 보군.”
사흑련주가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그에 천휘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귀혼마경을 잘 아는 것 같다고?’
웃기는 질문이었다.
‘내 손으로 천봉항가를 모조리 박살 내고 멸문시켰는데 모를 리가 있나.’
천휘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어느 정도는.”
“흥미로운 대답이군.”
순간 사흑련주의 눈이 번뜩였다.
“본 가의 귀혼마경은 중원에 이름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도절학이지. 본좌가 사흑련의 련주가 되었음에도,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런데 너는 보자마자 바로 알아채더군. 참 신기한 일이지 않나.”
사흑련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분명 아주 어릴 때 입산하였다고 들었다. 이후 줄곧 화산파에서만 기거한 도사가 강호에 출도한 지 겨우 이 년 남짓 만에 놀라운 명성을 쌓은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도 못 알아챈 귀혼마경을 알아보다니.”
사흑련주의 날카로운 지적에 천휘가 턱을 긁적였다.
‘쩝, 깜빡하고 있었네.’
그 말대로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한 향에 잠시 망각하고 말았는데, 천봉항가가 천마신교 내에서 오대가문 중 하나로 건재했을 때는 무려 삼백 년 전이었다.
까마득한 옛날이란 뜻이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알아본다는 것은 의아한 일임이 분명했다.
잠자코 말을 듣던 천휘가 작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 수도 있지.”
어쩌라는 거냐는 듯이 당당한 말투였다. 자신감에서 나온 말이었다.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사흑련주가 의심해도 어떻게 귀혼마경을 눈치챘는지 알아낼 수는 없을 터였다.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설마 삼백 년 전 인물이 환생했을 것이라고.
그 순간 사흑련주의 표정이 싸늘해지며, 차디찬 음성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네 말대로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과연 다른 이들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할지 모르겠군.”
‘이놈 봐라?’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문장에 함축된 의미가 컸다.
현재 자신과 화산파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태였다.
그로 인해 우러러보는 자도 늘어났지만, 시기하는 자도 그만큼 늘어난 상황이었다.
“왜? 나를 마교라 몰아가기라도 하려고?”
천휘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자충수일 텐데.”
눈을 반개하며 덧붙인 말에 사흑련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만약의 경우에 벌어질 일이지.”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본좌가 천봉항가의 가주임을 네놈이 밝히는 만약의 경우에.”
“혼자는 못 죽겠다는 거네.”
천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 말은 경고에 가까운 거래였다.
자신이 천봉항가의 사람임을 밝히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이자 그러니 서로 침묵하자는 제안.
“뭐, 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말할 생각도 없었어. 네가 천봉항가인 것을 알릴 생각이었으면 내가 혼자서 여기를 왔겠어?”
말하던 천휘가 미소를 지웠다.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
사흑련주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뭐, 그건 대충 넘어가고.”
천휘는 그 이야기는 끝마치자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하나만 묻자고. 대체 어떻게 천봉항가가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도 모자라, 중원에 터를 잡은 거야?”
“…….”
“예전에 멸문당하지 않았어?”
사흑련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껏 보인 모습 중에서 가장 격하고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오래된 이야기를 잘 아는군.”
“그걸 아니까, 네가 귀혼마경을 익힌 것과 천봉항가인 것을 알아본 거 아니겠어?”
대수롭지 않은 말에 사흑련주가 천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도 그렇군.”
담담하게 말한 그가 바로 물었다.
“한데 그것이 그렇게 궁금한가?”
“궁금하지.”
천휘가 눈초리를 휘며 답했다.
“수백 년 전에 멸문한 천봉항가가 중원에 있잖아. 그것도 가주인 네가 사파의 연합인 사흑련의 련주로 있으면서. 안 궁금하고 배기겠어?”
“그거 이상하군.”
사흑련주가 순간 차갑게 웃었다.
그러고는 비웃듯 대꾸했다.
“궁금하면 알아서 잘 찾아보면 될 일이지 않나.”
천휘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그에 사흑련주의 조소가 더욱 깊어졌다.
“이번 것은 잘 찾지 못하겠나?”
“……너, 재밌는데?”
“그러한 말은 처음 들어 보는군.”
천휘가 기대고 있던 자세를 바꿔 의자에서 등을 떼어 낸 뒤,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직후 그를 노려보며, 입을 뗐다.
“지금 쉽게 알려 줄 생각이 없다는 거지?”
“너와 같지.”
사흑련주가 무심하게 말했다.
“흠, 그래?”
천휘의 눈이 반개했다.
“그럼 내가 아까 한 질문에 대답하면 알려 줄 생각은 있어?”
“협상이라면.”
사흑련주가 차가운 안광을 발하자.
“좋아. 그러면 먼저 말할게.”
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귀혼마경의 특징을 밝히는 것은 애매하겠고.’
혈맥과 혈도가 부푸는 게 귀혼마경의 두드러진 특징임을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꺼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귀혼마경은 중원에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마도절학인데 그렇게까지 자세히 언급한다면 어떻게 아는 것인지 의혹이 커질 게 뻔하지 않은가.
‘어떤 걸로 납득시켜야 하려나.’
잠시 생각하던 천휘는 좋은 구실을 떠올리고는 곧장 입을 달싹였다.
“귀혼마경을 알아본 건 간단해.”
말과 함께 그는 바로 검지 손가락을 들어서 콧잔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주 진한 향이 나거든.”
“향……?”
“그래, 향. 귀혼마경을 익힌 자들에게선 특유의 마도 절학이 발하는 향이 나거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잠시 천휘를 노려보기만 하던 그가 입을 뗐다.
“어떠한 향이지?”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 아!”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리던 천휘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냥 한 번 네 제자란 놈과 다른 놈들을 찬찬히 비교해 봐. 그러면 내 말이 뭐인지 바로 이해될걸.”
“…….”
사흑련주가 침묵했다.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천휘는 그런 그를 생각하게 놔둘 생각이 없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천봉항가는 어떻게 명맥을 유지하고, 중원에서 터를 잡은 거지?”
“그 전에 너는 본가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지?”
사흑련주가 되물었다.
순간 천휘의 사고가 가속했다.
어디까지 아는지에 따라서 그 대답의 깊이가 다를 터였다.
‘모두 밝히는 것은 위험해. 조금 애매하네.’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천봉항가의 일은 당시 천마신교 내에서도 거의 함구하기 바쁜 일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생략하는 것이 좋겠어. 그렇다면…….’
이내 생각을 마친 천휘가 말했다.
“절대천마의 교주직에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되려 멸문한 것 정도?”
짧은 순간 이어진 생각은 깊고, 많았지만 의식을 가속했던 것 때문에, 사흑련주가 말을 건네자마자 바로 대답한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본가에 대해 알고 있군. 대개 천봉항가가 멸문한 시기 정도만 알고 있을 터인데.”
사흑련주의 눈빛이 심오해졌다.
‘조금 많이 말했나?’
잠시 입맛을 다시던 천휘는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말해야 했다.
그래야 자세한 대답을 들을 테니.
“네 말대로 본가는 삼백 년 전 당대 마교 교주인 절대천마의 손에 무너졌지. 하인들도, 혈족들도 모두 그의 손에 죽어 갔지만, 운 좋게 중원에 임무를 수행하던 이가 있었다.”
“뭐?”
천휘의 눈이 동그래졌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천봉항가를 멸문시키러 나선 것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인 것을 철저하게 확인한 다음이었다.
‘그런데 임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천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분명 모두 모였다고…….’
일순간 천휘의 사고가 멈췄다.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뇌리를 섬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이다.
천봉항가를 멸문시킨 당시는 천마신교의 교주직에 막 올랐을 때였다.
한창 어수선할 때란 의미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이 귀찮았던 그는 천마신교의 모든 임무를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신뢰해 왔던 수하에게 맡겼었다.
그리고 그는 교주직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생각이었던 절대천마, 독고구연에게 천봉항가가 어떠냐고 제안했으며, 천봉항가의 모든 인원이 모이게 되는 날을 귀띔해 준 인물이기도 했다.
‘……마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