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반응이 좋은데?’
천휘가 사흑련주를 응시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산하기 위해서 움직이던 사흑련주의 발걸음은 어느새인가, 완전히 멈춰 있었다.
자신이 보낸 전음.
그것이 끝나자마자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흑련주의 행동은 협정이 끝나면서 살짝 느슨해져 있던 분위기를 단번에 냉각시켰다.
이 자리에 나타난 이후 사흑련주는 줄곧 무심한 모습으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짧게 명령만 내리는 등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춰 서며 묘한 분위기를 풍겼으니.
당연히 무림맹 측에서는 긴장이 감돌았다.
“이야기가 남았소이까, 련주?”
무림맹주가 나직이 물었다.
돌연 사흑련주가 걸음을 멈춰 선 반응에 그는 차분하게 대응했지만, 바로 옆에 있었던 무림맹 호위들은 삽시간에 공력을 끌어올리며 언제든 기수식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처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계에 사흑련의 호위들도 경계심을 보이며 전투태세를 갖출 줄 알았건만.
“…….”
그들은 사흑련주만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놀란 듯한 눈치로.
“왜 그러나, 련주.”
“련주님?”
“…….”
“무슨 일이십니까?”
말과 함께 사흑련주의 얼굴을 살피던 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본능이 이끈 강제적인 침묵이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사흑련주의 눈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숨 막힌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할 만큼…….
마치 무저갱과 같은 눈빛이었다.
불현듯.
스윽―
사흑련주가 고개를 천천히 꺾었다.
아주 느릿한 고갯짓이었다.
천천히 움직인 고개는 무림맹 측에 멈춰 섰고, 그는 가만히 그들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 한 호흡도 안 되었을 거다.
하나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그 침묵의 시간이 마치 영겁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스윽―
사흑련주가 걸음을 내디뎠다.
이령산맥을 하산하기 위한 방향이 아닌, 무림맹 쪽이었다.
화아악!
무림맹의 호위들은 사흑련주가 가까워지자, 각자 공력을 끌어 올렸다.
천무공의 절세무학, 천양결(天壤結).
개방의 신공절학, 백결연화신공(百結蓮花神功).
천룡객의 태백일심법(太白一心法).
종남검성의 패도적인 호신강기공, 은하천강신공(銀河天强神功)까지.
지닌바 무가 하늘에 닿았다는 천무지경의 고수 넷이 풍기는 공력은 점점 다가오는 사흑련주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 점차 기세를 더해 갔다.
일순간 대기가 흔들렸다.
광활한 이령산맥의 하늘에 그들이 풍기는 공력이 가득 차올랐다.
우우우―
이어 귀곡성과 같은 소리가 메아리치며, 이령산맥 곳곳에 울려 퍼졌다.
마치 이령산맥이 그들의 공력에 버티지 못하겠다며 비명을 내지르기라도 하는 듯이.
사흑련주의 접근을 막기 위해 그들의 기세가 파도처럼 넘실거렸지만.
저벅, 저벅.
막상 그 당사자인 사흑련주의 걸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세는커녕, 아무런 공력도 흘리지 않은 무심한 태도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졌다.
곧 그가 무림맹의 영역에 들어서려는 찰나.
“기운을 거두게.”
무림맹주가 입을 열었다.
“맹주. 상대는 사흑련주요.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이미 협정을 맺은 사이거늘 왜 그리 경계하는 건가. 거기다 무슨 일을 벌일 거라면 이런 식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네.”
천룡객이 영 못 미덥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무림맹주가 싹둑 잘랐다.
“그리고 저쪽을 보게. 우리만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가 사흑련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사흑련 측은 아주 고요했다.
그들은 사흑련주가 저릿저릿한 상대의 영역에 들어서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걱정도 안 된다는 듯한 얼굴로.
완벽히 신뢰하는 모습이었다.
“…….”
이를 확인한 무림맹 호위들이 이내 기세를 화했다.
순식간에 갈무리된 기세에 흔들리던 땅이 잠잠해지고, 구슬피 울던 메아리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에 맞추기라도 한 듯.
탁.
사흑련주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무림맹 쪽과 약 삼 장의 거리에서였다.
“할 이야기가 남았소이까?”
무림맹주가 물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면서였다.
“있지.”
물음에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한 사흑련주가 돌연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한 명이 있었다.
“……!”
그가 주시하는 인물을 확인한 이들은 무림맹과 사흑련을 막론하고 모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파밧!
천무공과 종남검성이 땅을 박찼다.
극성의 보신경을 펼친 둘은 사흑련주의 앞에 선 뒤, 눈을 부라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
둘은 날이 선 반응을 보였다.
그가 시선을 멈춰 바라본 인물이 다름 아닌 천휘였기 때문이었다.
둘이 천휘를 보호하려는 듯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을 때.
“나한테 할 말이 있나 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허공에서 희미한 잔영이 나타난다 싶더니, 천휘가 모습을 보였다.
“뒤로 물러나거라.”
“위험하다.”
천무공과 종남검성이 돌연 나타난 천휘를 다급히 밀어내려고 했지만.
“위험한 건 제가 아니라, 두 분이죠.”
천휘는 태연한 태도로 오히려 둘을 타박하듯 말했다.
사흑련주는 천무공과 종남검성을 상대로 당당하게 말하는 천휘를 가만히 보다가,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네놈이 매화신협이로군.”
“맞아.”
천휘가 한쪽 입매를 삐뚤게 비틀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네놈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농질을 쓰러트리고 불사천교주를 쓰러트렸다지?”
천휘의 귀에 그의 음성이 닿는 순간, 동시에 머리를 파고든 소리가 있었다.
『제자 놈의 말이 사실이었군.』
오호라?
천휘의 눈이 반개했다.
사흑련주가 말을 흘림과 동시에 자신에게 전음을 펼쳐 낸 것이다
‘이것 봐라. 말하면서 전음을?’
천휘가 눈을 빛내며 그의 입술을 읽었다.
본래 전음입밀이란 기를 흘려 은밀하게 상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무학이었다.
그렇기에 입을 달싹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거늘, 지금 그는 말을 하면서도 그 음성을 전해 왔다.
즉 말이 아니라, 뜻 자체를 기파에 실어 상대에게 전할 수 있는…….
전음의 상위 수법, 심어(心語)를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음을 뜻했다.
“그렇지.”
천휘는 대답과 함께 곧장 그와 똑같이 내공을 흘리며, 뜻을 전했다.
『대답은?』
사흑련주의 눈동자가 수축되었다.
천휘의 심어에 반응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놀라운 무위군.”
『축시.』
그 말과 함께 답을 한 사흑련주가 천휘를 보던 시선을 떼면서, 몸을 돌렸다.
곧 그가 다시 사흑련 쪽으로 합류했고, 둘의 대화에 한껏 긴장하고 있던 천무공과 종남검성이 숨을 골랐다.
“흠.”
반면 천휘는 전보다 살짝 심각해진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축시라…….’
모두가 잠들었을 늦은 시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부러 그 늦은 시각을 언급하며, 만남을 정했다.
‘둘이서만 보자는 거겠지.’
이해가 가는 선택이었다.
사흑련주가 마기를 지워 냈다지만, 결국 그 본질은 천봉항가가 지닌 절세의 마도절학, 귀혼마경이었으니.
만약 그 정체가 드러난다면 사흑련의 련주인 그로서는 좋지 않으리라.
생각하던 천휘가 어느새 하산하고 있는 사흑련주 쪽을 바라볼 즈음.
“이놈의 자슥이! 하마터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용주개가 혀를 차며 다가왔다.
사흑련주가 천휘의 앞에 설 때부터 조용히 내공을 끌어 올렸던 그는 가쁘게 차오른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무림맹주가 다가왔다.
“허허, 다들 고생했네.”
빙긋 웃으며 말한 그는 주변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세.”
그 말이 끝나고 얼마 후.
일련의 마차들이 거친 먼지를 일으키면서, 이령산맥을 벗어났다.
* * *
밤이 깊었다.
모두가 수마에 빠졌는지, 이따금 들려오는 코를 고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가득한 객잔.
침상에서 고이 누워 있었던 천휘가 불현듯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쩝, 꽤 멀리 왔단 말이지.’
협정이 잘 성사되어 종전하게 되었음을 서둘러 알리기 위해서일까.
무림맹의 이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질주한 덕분에 출발할 때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빠른 속도에 만족했겠지만, 지금 천휘의 입장에선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였다.
‘다시 이령산맥으로 돌아가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
상체를 일으킨 천휘는 목을 가볍게 풀면서, 침상에서 일어나 벽에 걸어 둔 검 두 자루를 허리춤에 메었다.
닫혀 있던 창문을 살짝 열자.
구름에 가려진 현월의 푸르른 빛이 밤에 잠긴 천하를 희미하게 밝혔다.
이내 천휘가 창틀에 발을 올린 순간, 그의 신형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비천행보였다.
후우우―
바람이 귀와 살갗을 스쳤다.
비천행보를 극성으로 펼친 천휘는 희미한 잔영조차 남기지 않으며 빛살처럼 쾌속하게 질주했다.
반 시진 뒤.
천휘는 이령산맥에 도달했다.
협정 때만 해도 들끓는 기운과 기척들로 인해 어수선했던 이령산맥에는 짙은 고요함이 내리깔려 있었다.
“조용하네.”
천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이령산맥 곳곳을 훑었다.
어느새 펼쳐진 기감이 단숨에 산맥을 사로잡았으나, 그전에 느껴졌었던 인기척은 사라지고 없었다.
협정이 끝났으니 모두 떠난 것이리라.
그렇게 한참을 훑던 중.
“오호라.”
천휘의 입술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짙게 깔린 어둠처럼 펼쳐진 기감에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둠이 확 트이게 보일 정도였다.
곧바로 천휘가 다시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공간을 격한 천휘는 낯이 익은 장소에 도착했다.
협정을 진행했던 장소, 인상곡이었다.
천룡객이 만든 의자와 탁자는 그대로였으나,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낮과 밤.
소란스러움과 적막함.
그 상반된 모습이 분명 익숙한 장소임에도 어딘가 낯설게 만들었다.
“왔군.”
무심한 음성이 적막을 깨트렸다.
천휘가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인상곡이라 불리게 된 협곡의 앞에 한 인영이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절벽에 새겨진 검흔을 보고 있었다.
천휘가 그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빨리 왔는걸.”
말과 함께 천휘가 발을 뗐다.
자연스럽게 펼쳐진 비천행보는 단숨에 그와의 거리를 좁혔고, 곧 천휘는 그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뭐,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는 생략하자고.”
천휘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입매를 와락 비틀면서였다.
“네가 천봉항가의 가주야?”
사흑련주는 천휘를 지그시 응시하며, 굳게 닫힌 입술을 천천히 뗐다.
“그렇다.”
대답과 함께 그의 기세가 변했다.
자색의 장포가 넘실거리고, 불투명한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이 번뜩였다.
“본좌가 천봉항가의 당대 가주이니라.”
‘예상대로네.’
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였던 흑야차와는 그 기세부터가 남달랐기에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한편 자신의 정체를 밝힌 사흑련주는 기세를 흩뿌리며, 다시금 입술을 뗐다.
“한데 놀랍군.”
그의 음성이 묵직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드리워진 어둠처럼 무거웠다.
이어서 어둠 속에 빛나던 그의 안광이 자줏빛의 색채를 흩뿌렸다.
“본 가의 귀혼마경을 알아볼 놈은 천하에 오직 마교밖에 없거늘…….”
순간 온 세상의 빛이 그가 흩뿌리는 자줏빛의 색채에 삼켜졌다.
마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절세무학.
마도십강(魔道十强)에 꼽히는 귀혼마경이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이다.
혼령안(魂靈眼).
죽은 사람의 넋마저 부린다는 절세의 안법이 천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심유한 목소리가 스산하게 흘러나왔다.
“너는 어떻게 알아본 것이냐?”
천휘는 음성과 함께 발밑에서부터 스산하게 올라오는 귀혼마경의 공력을 느끼고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후웅!
가죽신에부터 일어난 미풍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던 공력을 단숨에 화했다.
정체를 들켰다고, 이제 대놓고 막 펼치네.
은연중에 펼쳐진 섭혼제령술을 단숨에 파훼한 천휘는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는 사흑련주를 응시한 채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