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탁 트인 청아한 음성이었다.
귀를 파고들자마자 자극하는 것이 공력을 실어, 말을 뱉어 낸 듯하였다.
천휘는 자신을 노려보는 태세를 향해서 검지를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한껏 입매를 비틀면서였다.
“그럼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앉아.”
태세는 마치 자신을 하수처럼 대하는 천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락―
분홍빛 장포가 파도처럼 물결쳤다.
중천을 살짝 넘어가던 햇살이 비추며,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이윽고 그녀가 땅바닥에 앉았다.
은은하게 피어오른 미풍에 의해 옅은 먼지를 일어나다, 이내 천천히 주변으로 내려앉았다.
천휘와 태세가 서로를 마주 봤다.
순백의 장포를 걸친 날카로운 인상의 미청년과 분홍빛의 장포를 걸치고 있는 색목인 미녀의 대치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인 듯 보였다.
“……소요검희.”
그러한 둘의 대치를 바라본 용주개가 여인의 별호를 우물거리듯 내뱉었다.
살짝 놀란 눈빛을 띠면서였다.
‘그녀가 논검을 하러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군.’
용주개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소요검희 태세는 천하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익힌 무공도, 태생도.
천하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알려진 것이라고는 세 가지.
사흑련주가 직접 데려온 자라는 것과 색목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 무위가 칠요선에 걸맞다는 것이었다.
해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소요검희인가.”
“엄청난 기세일세.”
“…….”
그리고 그녀의 등장에 동요하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종남검성과 천무공 그리고 천룡객마저도 그녀의 등장에 이목을 집중하며, 한편으론 한껏 경계심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당최 이해할 수 없군.”
미간을 찌푸린 귀천사자가 술 나발을 불며 걸어오는 백운에게 말했다.
“왜 저 빌어먹을 놈과 논검 대련을 한 것이지?”
백운이 순간 입술을 삐뚤게 비틀었다.
조소였다.
“이런 놈이 교주를 대신하게 될 거라니, 불사천교도 끝이겠어.”
“무슨 망발을 지껄……!”
순식간에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오른 귀천사자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나는 찰나, 백운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
그에 귀천사자가 움찔했다.
‘무슨 기세가……!’
당혹감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백운의 가늘게 뜬 눈빛에서 느껴지는 기세에 순간 압도당한 것이다.
마치 과거 그의 신이었던 불사천교주와 독대했을 때 같았다.
‘여태껏 이런 무위를 계속 숨겨 왔던 것인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백운의 진정한 기세를 언뜻 엿본 귀천사자가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백운은 바로 그에게 다가갔다.
“련주의 말 때문에 봐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귀천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 백운이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다음은 없어.”
귀천사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존심을 박박 긁어 대는 말이었지만,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단번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와의 좁힐 수 없는 격차를.
백운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찌푸리는 귀천사자를 보다, 논검 대련을 시작하려는 천휘와 태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술병을 다시 입에 물었다.
꿀꺽, 꿀꺽.
코를 자극하는 달콤한 주향과 함께 시원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기분이 좋아진 백운이 미소 지었다.
그의 시선이 소요검희에게로 향했다.
평소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가 매화신협과 논검을 하고 싶다며 전음을 보냈었다.
‘재미있겠어.’
흥미로 가득한 그의 눈동자가 소요검희와 천휘를 함께 담을 무렵.
“선수는 내가 할게.”
천휘에게 거의 통보하듯이 말한 태세가 오른손의 검지를 쭉 뻗었다.
투명하고 긴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더니, 곧 그 상태로 낙하했다.
종(縱)의 검격.
태산압정과도 같이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떨어지는 검지 손가락에서 은은한 공력의 파동이 일어났다.
마치 한 자루의 잘 벼려진 명검과도 같이 예리하고, 날 선 모습이었다.
닿는 순간, 살갗을 베어 낼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탁.
그녀의 검지가 땅에 닿았다.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그녀의 검지 손가락에서 풍기던 공력의 파동마저 신기루처럼 사라진 채였다.
“흐음, 독특한 검식인걸.”
천휘가 감상을 내뱉었다.
하늘과 땅을 잇는 하나의 검식.
일견 단순해 보이는 검식이지만 그 안에 담긴 변화와 공력은…….
‘검으로 펼쳐졌으면 볼 만 했겠어.’
좀 전의 검식을 회상하던 그는 손가락이 아니라, 그녀가 품고 있는 검을 꺼내 든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문득 태세의 입술이 벌어졌다.
“파검식(破劍式), 개(開).”
청아한 음성이 공기를 흔들면서, 천휘의 귀에 화살처럼 꽂혔다.
그 직후 그녀가 천휘를 응시했다.
영롱한 빛을 띠는 청안이 번뜩였다.
번갯불이 튀는 것처럼 강렬한 안광이었다.
거의 잡아먹을 것처럼 천휘를 눈동자에 담아낸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막을 수 있겠어?”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그녀는 놀라운 검식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은 물론이고 아무 감정조차 싣지 않은 채 말했다.
“쉽지.”
역시나 무미건조하게 답한 천휘가 검지를 치켜들었다.
가슴께까지 들린 검지 손가락이 어느새인가 좌에서 우로 길게 그어졌고 뒤늦은 잔상이 유성처럼 따랐다.
이어 검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유려한 손짓이 마치 하나의 묵화를 그려 내는 붓질과도 같아 보였다.
그렇게 허공을 유려하게 지나던 검지가 마침내 바닥에 닿고.
천휘의 입이 달싹여졌다.
“유능제강(柔能制剛).”
“…….”
태세의 양 눈썹 끝이 올라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이어 그녀가 바로 검지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쇄검식(殺劍式), 살(殺).”
격한 움직임에 분홍빛 장포의 소매가 채찍처럼 허공을 때렸다.
뒤늦게 ‘짝’하는 소리가 일었다.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흉하네.”
그녀의 검식을 곧장 읽어 낸 감상이었다.
첫 검식이 막히자마자, 이를 계산해서 휘둘러진 두 번째 검식은 검으로 막아 내느라 일순간 빈틈이 드러난 어깨를 노리며 파고들었다.
“이러면 피하는 게 좋겠네.”
“어떻게 피하려고?”
태세가 천휘를 주시하며, 물었다.
의문이 가득 담긴 어투였다.
“이렇게.”
담담히 말한 천휘의 검지가 움직이더니,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좌측의 아래였다.
“만약 이 연격을 펼치면 좌측 하단은 빈틈이 드러나지.”
“…….”
태세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곧이어 그녀가 검지를 움직였다.
이제는 말도 없었다.
고아한 분홍빛의 장포가 크게 펄럭이고, 그녀의 손이 분분히 나뉘었다.
수십의 잔영들.
그 속에서 피어난 날카로운 예기가 단숨에 천휘의 앞에 내리꽂혔다.
바닥에 수십의 자국이 생겼다.
그녀가 펼쳐 낸 검식의 흔적.
그 결과가 바닥에 새겨진 것이다.
“이번에는 환검(幻劍)?”
입꼬리를 비튼 천휘 또한 손을 움직였다.
파앙!
흰색의 장포 소매가 허공을 격타하고, 짧은 파공음이 울렸다.
태세가 곧바로 검지를 움직였다.
말없이 검지를 휘두르는 둘에 의해서 바닥에 흔적들이 점차 늘어 갔다.
논검 대련을 보던 이들이 침묵했다.
둘의 논검 대련은 말이 없었다.
보통 논검 대련이라고 하면 서로의 무공을 설명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나누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둘은 서로 검지만 휘둘렀다.
고요한 가운데 그들의 소매가 허공을 격타하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려 댔다.
“서로 무공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다 파악하고 있다는 것인가…….”
종남검성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정도로 서로의 무공을 파악하고, 휘두를 정도라면 그 무학의 깊이가 보통이 아님을 뜻했다.
‘천휘가 뛰어나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소요검희가 이 정도였단 말인가?’
그의 시선이 둘을 담았다.
종남검성만이 아니라, 무림맹과 사흑련 양측 모두 둘의 논검 대련을 집중해 응시하고 있었다.
그만큼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수십, 수백 합을 넘은 논검 대련이 점차 극렬하게 전개되던 어느 순간.
화아악!
태세의 전신에서 기파가 요동쳤다.
계속된 논검 대련의 열기에 흥분이 일며, 투기가 발산된 탓이었다.
스윽―
차오르는 투기의 흥분에 뺨이 살짝 상기된 태세가 품에 고이 안고 있던 검의 검파를 자연스럽게 파지했다.
그녀의 유일한 친우, 파백(破白)을.
직후 새까만 검집에 가두어져 있었던 파백이 세상에 드러나려는 순간.
『그만.』
강렬한 전음이 머리를 두드렸다.
순간 천휘와의 논검 대련에 빠져서 무아지경이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전음이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백운이 차갑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잊은 건 아니겠지?』
바로 이어지는 백운의 전음에 그녀는 살짝 뽑았던 파백을 납검했다.
“안 뽑아?”
귀를 두드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야에 천휘가 보였다.
투명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가 자신을 완전히 관통해 내고 있었다.
“……여기서는 아니야.”
태세가 나직이 말했다.
“쩝, 아쉬운데.”
천휘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바로 덤빌 줄 알았는데.’
천휘는 논검 대련을 하면서 변해 가는 그녀의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승심이 극에 달해 있었고, 그래서 바로 덤빌 줄 알았는데.
‘전음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건가?’
천휘가 태세에게 쏘아진 묘한 기운의 주인, 백운을 응시하던 그때.
스윽―
돌연 태세가 바짝 붙어 왔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천휘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입술을 떼려던 찰나.
“이걸로 협정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종전을 뜻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이걸로 끝내겠습니다.”
“수고했소이다.”
사뇌복룡과 제갈공은 빼곡하게 글씨들이 적힌 종이를 응시했다.
오랜 시간 걸쳐 완성된 협정서.
그곳에 적힌 내용은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一. 사흑련은 강북 무림에 진출하지 않는다.
二. 사흑련은 무림맹이 이번 전쟁으로 인해 받은 피해를 금전적으로 보상한다.
三. 사흑련과 무림맹은 각 소속 문파끼리의 분쟁을 자제한다.
큼지막하게 적힌 세 조건을 시작으로 그 세부 내용 대부분이 사흑련에게 불리한 것이었음에도, 사뇌복룡과 사흑련주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그럼 련주님.”
“맹주님.”
사뇌복룡과 제갈공의 부름에 사흑련주와 무림맹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품에서 각자 련과 맹의 인장(印章)을 꺼낸 뒤, 종이에 찍었다.
맹(盟)과 련(聯).
두 글자가 선명하게 찍힌 종이를 각자 챙긴 둘이 입을 달싹였다.
“끝이군.”
“수고했소이다. 련주.”
그렇게 인사와 함께 서로가 눈을 맞추기를 잠시.
휙―
사흑련주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산에서 내려갈 듯 걸음을 옮기던 중.
『내가 직접 찾아가려 했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전음이 그의 귀를 두드렸다.
사흑련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전음을 보낸 인물, 천휘를 노려보았다.
『마침 잘됐어. 안 그래도 널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거든.』
천휘의 전음에 사흑련주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때.
그의 눈을 차갑게 가라앉히는 전음이 이어 들려왔다.
『네가 천봉항가의 당대 가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