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이튿날 신명이 떠올랐다.
아직 이른 새벽 시각이었건만 진작 잠에서 깨어난 천휘는 맑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휘이이―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온 옅은 바람에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자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완연한 봄이 된 것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갑기만 했었던 새벽녘의 공기는 어느새 봄바람 특유의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밖을 보던 천휘가 중얼거렸다.
“사흑련주라…….”
그의 입가가 크게 휘어졌다.
흥미가 깃든 기분 좋은 미소였다.
“어제 본 백운이란 놈도 꽤 실력이 있었는데. 사흑련주는 그놈을 꺾어서 제 수하로 뒀단 말이지?”
천휘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어제 본 탈혼제 백운의 기세는 무림맹주에 비교해도 될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기파.
잘 정련된 공력의 흐름.
모든 것이 그의 경지가 지고한 위치에 올랐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흑련주는 그런 그를 꺾은 당대 사파제일인이라고 했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일지 궁금한걸.”
흥미가 솟았지만, 잠시 억눌렀다.
어차피 이제 곧 보게 될 자였다.
바로 어젯밤에 설검을 통해서 하달받은 임무였건만, 곧장 오늘 출발한다는 내용을 이어 전달받게 되었다
다른 무인들은 물론 양민들을 생각해서라도 더 미룰 것 없이 빠르게 처리하자는 내용으로 회의가 마무리됐기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그냥 협정으로 안 끝나고, 싸움이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속닥이듯 말한 천휘의 눈이 반개했다.
사실 그는 이번 협정이 무탈하게 이루어지는 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무림맹이 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화산파만 멀쩡하면 되지.
그렇기에 그는 차라리 협정이 어그러지고, 그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
천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흑련이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아예 협정 장소와 시간을 결정하는 권한도 무림맹에게 넘겼지 않은가.
이것은 매우 큰 양보였다.
무림맹 측에서 결정을 내린 만큼 사흑련보다 무엇이든 먼저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니.
극단적으로 보자면, 협정을 미끼 삼아서 함정을 팔 수도 있었고 혹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기습할 수도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천휘는 사흑련이 이 불합리한 제안을 한 의도를 알고 있었다.
‘상대가 무림맹이니까.’
정파란 신의와 협이 전부인 곳.
그렇게나 비열한 짓을 벌였다가는 무림맹은 강호에서, 아니. 천하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신뢰가 땅으로 떨어질 일이었다.
그렇기에 애당초, 종전을 합의하는 자리에서 그런 계략을 꾸미자는 논의 자체가 나올 일이 없었다.
말을 꺼냈다간 당장 무림맹 내에서도 비난이 빗발칠 테니.
“쩝, 아쉽지만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나.”
입맛을 다시던 그는 새하얀 장포를 어깨에 걸치고 검 두 자루를 찼다.
그렇게 만전의 준비를 마친 천휘가 전각을 빠져나오자, 바로 근처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던 천향과 단리관천이 다가왔다.
그리고 마주 선 순간.
“어? 사제, 무슨 일 생겼어?”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둘의 물음이 겹쳤다.
그만큼 당혹스러운 것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평소와는 다르게 멸절대가 임무를 수행할 때 착용하는 장포를 걸치고 있지 않은가.
당장 임무에 나서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데 둘은 임무 하달은커녕, 임무가 있다는 말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임무가 있거든요.”
당최 무슨 일인지 몰라서 당혹스러워하는 둘을 향해 말한 천휘가 몸을 돌리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아 참. 제가 없는 동안에 훈련이나 빼먹지 마세요. 돌아오자마자 확인할 테니.”
거의 통보에 가까운 어투로 둘에게 말을 전한 천휘의 몸이 이내 흐릿해졌다.
“어? 잠깐! 사제! 임무라니, 그게 무슨 말…….”
“설마 대주 혼자서 가는 것…….”
둘이 당황하며 천휘를 향해서 남은 물음을 던졌지만, 이미 천휘는 그 자취조차 안 남기고 사라진 뒤였다.
* * *
무림맹의 내각 앞, 넉 대의 마차가 ‘천하상단’이라는 깃발을 바람에 나부끼며 정갈하게 세워져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마차를 가지고 들어온 천하상단의 호북 지부장, 송원경이 눈앞에 있는 사내를 향해서 말을 건넸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가 고개를 숙이자.
“아, 아닙니다.”
송원경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원래라면 허허 웃으며 넘어갔을 말이었으나, 고개를 숙이는 사내가 보통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면 제 낯만 뜨거워집니다. 본 상단과 무림맹은 같은 배를 탄 사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당연합니다. 그러니 얼른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군사님.”
송원경이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아무리 그가 천하상단의 호북 지부장이라지만, 무림맹의 군사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과 같았다.
제갈공은 어찌할 줄 모르는 송원경의 반응에, 천천히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이 값은 꼭 치르겠습니다.”
둘이 그렇게 대화하는 사이.
탁.
불현듯 나타난 천휘가 사뿐히 착지하며, 내각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길 잠시 천휘는 의아해했다.
“왜 이리 사람이 적지?”
다름 아닌 무림맹주의 행차였다.
그것도 사흑련과의 종전 협정을 맺기 위한 일이었는데…….
행차를 마중하기 위해 이 내각에 모인 인물을 스무 명 남짓이었다.
‘거의 다 아는 얼굴들이네.’
대부분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무림맹에 복귀했을 당시 봤었던 무림맹의 중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본 삼단사대의 단주와 대주들은 안 보이는데…… 응?’
한참을 모인 이들의 면면을 훑어보던 천휘의 눈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두 명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이 정도의 고수들이 아직 무림맹에 남아 있었어?’
천휘는 지금 자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인물들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부드러운 인상의 노파.
딱딱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사내.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유독 저 두 사람에게서 매서운 존재감과 강렬한 기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본연의 기운이었다.
‘그렇다면 저 둘이 이번에 같이 임무를 수행하게 될 자들이려나.’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임무를 같이하게 될 인물 중 둘은 잘 알고 있지만, 둘은 몰랐다.
삼대봉공 천무공(天武公).
무군(武君) 용천객(龍天客).
아는 것이라고는 직책과 별호 그리고 고작 해 봐야 현 무림맹에 머무는 자 중 한 손에 꼽히는 고수들이라고 설검에게 전해 들은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저 노파가 천무공인가?’
설검의 말을 되새기며 천무공으로 추측되는 노파를 훑어볼 때였다.
스윽―
그 시선을 느꼈는지 노파가 불현듯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맞춰 왔다.
백발의 눈썹 아래 흑과 백이 선명히 나뉜 눈동자가 천휘를 비췄다.
아주 깊고, 투명한 시선이었다.
‘이것 봐라.’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선 속 느껴지는 은밀한 공력의 기파가 자신의 감각을 간질거렸다.
‘아주 매서운 눈인걸.’
천휘의 안광이 착 가라앉았다.
조용하게 끌어올린 매화신공의 공력이 광활하게 넓어지며 천휘의 새까만 안광에 은은한 빛이 어렸다.
그러다 이윽고.
번쩍!
두 시선이 부딪치는 허공에 벼락이 내려친 듯한 환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지그시 바라보던 천무공이 그에 놀란 듯 주름진 눈이 살짝 커질 때.
“휘야!”
우렁찬 목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고개를 돌리니 현도가 신법까지 펼치면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단숨에 공간을 격한 현도는 천휘의 앞에 서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래, 호위를 맡았다고 들었다. 조심하거라.”
“뭐, 위험할 것 있나요?”
천휘는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현도는 당최 걱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물론 천휘의 무위가 뛰어남을 의심치는 않았지만, 혹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사흑련에서도 최정예로 구성해서 협정 장소에 오지 않겠는가.
현도가 눈을 빛내며 입을 오물거렸다.
전음이었다.
『혹 무슨 일이 생긴다면 만사 제쳐 두고 도망가거라.』
『어? 그래도 괜찮겠어요?』
천휘가 조금 놀란 눈으로 현도를 바라봤다.
고지식하기 짝이 없던 현도가 설마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알면 난리 칠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다른 이들이야 어떻게든 할 테니,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가 무사한 거다.』
‘오호라?’
천휘의 입매가 바짝 올라갔다.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꿀 말이었다.
‘많이 바뀌었어.’
첫 만남 당시 우직하고 앞뒤가 꽉꽉 막혔던 현도를 회상한 천휘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면 그렇게 할게요.』
그 대답을 들은 현도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천휘의 어깨에 조심히 손을 올렸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어깨에 올린 손을 뗀 현도가 물러나자.
휙―
천휘는 발걸음을 옮겼다.
마차가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이내 마차에 가까워질 즈음 익숙한 인물이 아래에서 불쑥 나타났다.
바로 개방의 방주, 용주개였다.
“이제야 기어 나왔느냐? 어린놈이 빨리 오지 않고.”
투덜대는 말과 다르게 용주개는 천휘를 보자마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이 간다면서요?”
물음에 용주개가 가슴을 폈다.
“그럼 나 말고 누가 가겠느냐?”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마치 당연하다는 어투였다.
가슴을 펴며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 용주개를 보던 천휘는 피식 웃었다.
그러기를 잠시.
“그런데 전 어디 타면 되죠?”
천휘가 마차를 보며 말을 꺼냈다.
사흑련과의 이번 협정은 비밀리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군사는 일부러 천하상단에 요청해서 상단의 마차를 준비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행적을 감추고자 했다.
하나 급하게 요청했기 때문일까.
떠나는 사람이 총 일곱 명인 반면에, 마차는 넉 대로 애매했다.
“그게 좀 애매하단 말이지. 아마 맹주와 군사는 같이 탈 테니 넘어가고, 남은 다섯 명이 세 대의 마차에 나눠 타야 할 텐데…….”
용주개가 지저분하게 자라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속닥일 무렵.
“둘이 같이 타는 건 어떤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자네도 왔군.”
용주개가 옆을 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종남검성이 정갈한 걸음으로 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온 종남검성이 천휘와 용주개를 번갈아 보면서, 입을 달싹였다.
“이왕 가는 여정 서로 안면이 있는 자들이 함께 가는 것이 편하지 않겠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렇다면 두 분이 같이 타시죠?”
천휘가 질색이라는 듯 말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용주개와 같이 타는 것은 고역이기 때문이었다.
“서로 면식이 있잖아요.”
천휘가 얼른 용주개를 떠넘기기 위해서 말을 꺼내자, 종남검성은 잠시간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것도 괜찮은 것 같군.”
“아니, 내가 싫다.”
그러나 정작 용주개가 콧방귀를 뀌며, 거부했다.
“네놈과 같이 탈 바에야 차라리 이놈과 타고 말지.”
말과 함께 그가 천휘에게 가까이 붙자, 종남검성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하세.”
“전 별로…….”
정리되려는 상황에 천휘가 거절하려던 찰나.
“안에서 할 이야기가 있다.”
용주개가 작게 속닥였다.
그에 천휘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뭔데요?”
“후에 말해 주마.”
“음…….”
천휘가 용주개를 응시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저 멀리 있는 군사를 세세하게 훑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럼 같이 가죠.”
천휘의 대답을 들은 종남검성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일 무렵.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요.”
준비가 완료된 것인지 제갈공의 목소리가 곧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 직후 제갈공은 무림맹주가 있는 마차에 올라탔고, 곧 임무를 하달받은 다섯이 나뉘어 마차에 탔다.
잠시 후, 그들을 태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뒤따른 덜컹거리는 마차의 소리가 무림맹의 거리에 이어져 갔다.
이윽고 무림맹의 성문에 도달하자, 굳게 닫혀 있었던 문이 열리고.
다그닥, 다그닥!
무림맹주와 군사 그리고 그들을 호위한 이들을 태운 마차가 맹을 나섰다.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