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종전……?”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이어서 짙은 침묵이 내리깔렸다.
무림맹주에게 소리쳤던 이들도,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며 당장이라도 입을 열 것처럼 준비 중이던 이들도 ‘종전’이란 말에 입술을 꾹 닫았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에 그들의 사고가 정지되며 굳어 버린 것이다.
고요한 침묵이 더욱 깊어질 때.
“어쩐지 무슨 일로 그 탈혼제가 사신으로 본 맹까지 왔나 했더니만, 종전을 요청하기 위해서 온 것이라면 충분히 납득 가는 일이야.”
침묵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주개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그는 이미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는지 다른 이들과 다르게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는 강호에서 가장 크고 역사 깊은 정보 문파, 개방의 방주였다.
천하의 온갖 정보들을 수집하고 추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그에게 이 정도의 예측은 상정 내의 일이었다.
“남궁세가가 만수문을 친 것에 위기의식을 느꼈나 보군.”
바로 이어진 용주개의 말에 회의장에 참석한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무림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일세.”
“그럼 우리를 부른 이유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라네.”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린 무림맹주가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입가에 머물던 부드러운 미소를 말끔히 지워 낸 그는 침잠한 눈빛으로 모인 이들을 한 명씩 담아냈다.
지켜보던 이들이 숨을 죽였다.
지엄하기 짝이 없는 무림맹주의 눈빛에 순간 압도당한 탓이었다.
그렇게 한 명씩 모두 시선을 마주한 무림맹주가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묻겠네. 다들 사흑련이 보내온 협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소연사태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달싹였다.
“거절해야 마땅하외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껏 격양되었다.
“어찌 사파와 타협을 맺겠소이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빈도 또한 같은 생각이오.”
“옳은 말이네!”
“같은 의견입니다.”
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동조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소연사태를 필두로 해서 청성의 장로인 도양흔과 천중검문의 장로 철수비검 그리고 사신대주까지…….
하나같이 사흑련과의 전쟁에서 크나큰 피해를 입은 곳에 속해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로서는 종전을 허락할 수 없었다.
사흑련의 손에 의해서 명을 달리한 수하들과 제자들 때문에라도.
그들이 눈에 불을 켜며 반대를 외치는 그때.
“종전에 찬성하는 자는 없는가?”
무림맹주가 여전히 침잠한 눈으로 주변을 보며 물었다.
“아미타불.”
“종전이 좋다고 생각하외다.”
소림의 원종대사와 삼대 봉공인 인협공을 비롯한 몇몇이 손을 들었다.
하나 그 숫자는 종전을 반대하는 자에 비하면 아주 극소수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단 소연사태를 필두로 한 이들처럼 격렬한 반대는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은 이 전쟁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흑련에서 먼저 종전을 요구해 왔을 정도면 상황이 기울어졌단 뜻과 같지 않은가.
그때 무림맹주가 옆을 바라봤다.
“군사. 그걸 보여 주게.”
맹주의 말에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제갈공이 바로 탁자에 다가가 두루마리를 놓았다.
데구루루―
사흑련주가 작성하고, 백운이 사신으로서 전달해 온 전서가 펼쳐졌다.
“……!”
“허어!”
잠시 침묵하고 그 전서를 읽던 이들이 이내 눈을 부릅뜨며 경악을 터트렸다.
전서에 적힌 내용이 그들로서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격악하는 이들을 보던 제갈공이 전서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적혀 있다시피 사흑련에서는 종전을 요구하며 두 가지 합의 사항을 제안하였습니다. 첫 번째로는 피해에 따른 보상으로, 맹에서 제안하는 대로 지불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종전 이후 사흑련 소속의 문파는 강북 무림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제갈공의 입으로 정리된 것을 들은 모두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거의 패배했다고 시인한 것과 다를 바 없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니.
“이 정도면…….”
순간 혹한 곤륜파의 곡평이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의 제안이라면 종전을 받아들여도 아쉬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는 좋았다.
이번 사흑련과의 전쟁에서 작은 피해만 입은 곤륜파의 입장에서 이보다 좋은 제안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주변을 힐끗 봤다.
몇몇이 그와 마찬가지로 귀가 솔깃했는지, 주위의 눈치를 보며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 그와 같은 자들이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술렁거리던 찰나.
“그렇다면 더더욱 협정을 받아들이면 안 될 것 같소만. 사흑련이 이렇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이미 승기가 기울었단 뜻 아니오?”
철수비검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아까 전이었으면 동조하는 이들이 넘쳤을 말이었으나, 이번엔 달랐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네.”
집법당의 천수옹이 반박했다.
“비천회가 참전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이렇게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겠나? 그러니 잘들 생각해 보게. 비천회의 참전이 꼭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만은 없네.”
“무슨 말이외까?”
“비천회가 참전하면 사흑련을 무너트린다 해도 전쟁은 끝난다는 보장이 없지 않겠나.”
“……비천회가 사흑련을 무너트리고 나면 본 맹을 노릴 거라는 거요?”
“만에 하나라곤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네.”
“…….”
잠시간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비천회가 정파라지만 결국 그들 또한 무림맹과 적대하는 세력인 건 사실이었다.
그 설명 덕분일까.
“빈도 또한 천수옹의 의견에 동의하오.”
“아미타불. 이 정도라면 협정을 받아들이기 충분하다고 생각하외다.”
“확실히 훗날을 생각한다면 종전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천수옹에 동조하는 말들이 나왔다.
처음부터 종전에 찬성한 이들은 물론, 이 틈을 타서 사흑련의 협정 내용에 넘어간 자들이 은근슬쩍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 중 처음부터 종전을 찬성했던 원종대사는 부르르 떠는 철수비검과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히는 소연사태를 보며 입을 뗐다.
“제아무리 전쟁의 승기가 기울었다고 한들, 그들은 사흑련일세. 이대로 전쟁을 계속해서 끝을 보려면 본 맹에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하겠는가.”
눈을 반쯤 감으며 말하는 원종대사의 음성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 말에 강한 어조로 종전을 반대하던 소연사태와 몇몇 이들마저도 움찔했다.
정론이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더 많은 이들이 희생될 바에는 이렇게 종전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무조건 종전에 반대하던 분위기가 변해 갔다.
말에 실린 무게감이 달랐다.
소림이란 이름이 지닌 힘도 힘이지만 이번 전쟁에서 소림 또한 많은 희생이 있었다. 한데 그런 그가 더 큰 희생을 줄이고자 이 전쟁을 끝내자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점차 협정에 찬성하는 것으로 흘러갈 때 도양흔이 말했다.
“대사의 말씀도 맞소만…… 빈도는 종전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소. 이대로 종전을 받아들이면 훗날 떠나간 제자들을 볼 면목이 없소이다.”
타당한 의견이었다.
그 이후 대회의장의 모두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서로의 의견을 피력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군.”
무림맹주가 입을 떼자, 잠시간 침묵이 일어났다.
그 침묵 가운데, 맹주가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다수결로 결정하는 게 어떤가?”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는 답이 없음을 그들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종전에 찬성하는 자는 손을 들어 주게.”
사방에서 손이 위로 들렸다.
무림맹주는 위로 들린 손의 숫자를 간단히 세어 보더니, 입을 달싹였다.
“딱 절반이로군.”
무림맹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을 든 자들은 모인 인원의 딱 절반이었다.
대회의장에 있던 자들도 설마 이렇게 나뉠지는 몰랐기에 미간을 좁혔다.
“그럼 어떻게…….”
예기치 못한 사상 초유의 사태에 모두가 당황할 무렵.
“아직 한 명, 의견을 안 정한 자가 있지 않나?”
용주개가 태연하게 입을 달싹였다.
“안 정한 자?”
“누군가?”
모두가 의아해하면서 용주개를 바라보자, 그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상석, 무림맹주를 향해서였다.
“아!”
모두가 그제야 깨달은 듯 작은 탄성을 내뱉을 때, 용주개가 입을 뗐다.
“맹주가 정하게. 이 종전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부할지.”
모두의 시선이 무림맹주에게 집중되었다.
무림맹주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턱수염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 협정을 받아들이겠네.”
대회의장에 희비가 교차했다.
종전을 찬성했던 자들은 안도한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고, 반대했던 이들은 인상을 구긴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용주개는 그 둘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사실 종전에 찬성하면서도 빠르게 동태를 살핀 뒤 일부러 손을 들지 않았다.
무림맹주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의견을 듣기는 했는데.
‘……의아한 결정이군.’
당시 군사가 대리로 나서긴 했으나, 무림맹주가 사흑련과의 전쟁을 결정한 것은 화산파가 녹림에게 습격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쟁을 선포할 당시에는 끝장을 볼 기세였었는데.
‘이렇게 쉽게 종전할 생각이었으면 그렇게 강하게 밀어붙일 필요가 없었을 텐데, 대체 무슨 의중이지?’
그의 시선이 무림맹주를 훑을 때.
“그럼 이제 협정을 맺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겠네.”
무림맹주가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이번에 협정을 맺을 장소는 본 맹에서 알아서 정하라고 했네.”
세부 내용 역시 파격적이었다.
보통 협정 장소를 정하는 것은 서로의 협의를 통해서 이뤄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사흑련이 그런 협정 장소를 양보한 것이니, 그들이 종전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무림맹주가 짐짓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서 물었다.
“좋은 장소가 있는가?”
“무림맹과 가까운 장소가 좋지 않겠소이까?”
“가까운 장소라 하면…….”
호북 곳곳의 지명이 나왔다.
이내 무림맹주는 호북의 남쪽에 위치한 인상곡(刃傷谷)으로 협정 장소를 정하고 난 뒤, 다시 입을 뗐다.
“그럼 장소도 정해졌으니, 가장 중요한 것을 정할 차례인가.”
무림맹주가 눈을 반짝였다.
“협정을 맺는 장소에 들어가는 것은 나와 군사, 그리고 호위 다섯 명으로 제한하자고 제안해 왔네. 그리고 그 제안대로 할 생각이지.”
아주 중요한 협정이었다.
그렇기에 사흑련주는 인원을 제한해서 협정을 맺고자 했고, 맹주 역시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추천할 만한 인물이 있는가?”
“맹주께서 직접 호위 인원을 선별하는 것이 아니었소?”
“이 중요한 사항을 어찌 홀로 정하겠나.”
무림맹주는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여기 모인 이들의 의견을 반영해 신뢰할 만한 자를 대동하고 싶네.”
모두가 말없이 눈을 굴렸다.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종전이란 엄청난 사건을 두고 협정하는 것이건만, 무림맹주, 군사와 함께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다섯 명밖에 안 되는 것이었으니.
그러기를 잠시 원종대사가 말했다.
“아미타불. 소승의 의견으로는 천무공(天武公)께서 대동한다면 믿음직스러울 것 같소만, 어떻소이까?”
“인협공 대협이라면…….”
“좋은 생각이올시다.”
“대협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했다.
천무공이라 하면 무림맹의 삼대 봉공이자, 오랜 옛날부터 대협으로 칭송받던 자이지 않은가.
“크흠, 그럼 소인은 철혈단주를 추천하오.”
원종대사가 언급한 것을 시작으로 물꼬가 트였는지 눈치를 보던 이들이 하나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철수비검, 고영진인, 옥소신검, 만도군(晩到君) 등…….
무림맹에 있는 고수 중 무위가 뛰어난 이들의 이름이 차례로 나왔다.
그때 무림맹주가 입을 열었다.
“나도 한 명 추천해도 되겠나?”
그 말에 모두가 눈을 빛냈다.
“추천하는 인물이 있소이까?”
“누구입니까?”
모두가 궁금증과 기대감에 귀를 기울이는 그때, 무림맹주의 입이 열렸다.
“멸절대주일세.”
* * *
그날 저녁.
천휘는 갑자기 내려온 지시에 머리를 긁적이며, 앞의 설검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저보고 협정을 맺는 무림맹주와 군사를 호위하라고요?”
“그렇습니다.”
설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맹주님께서 직접 소협을 언급하시며, 대동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흠, 그래요?”
천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하죠.”
“그럼 후에 자세한 지시가 떨어지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설검이 일어났다.
직후 그가 방을 나가고, 이내 방 안에는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를 직접 언급했다라…….”
천휘는 설검의 말을 곱씹었다.
생각할수록 조금 이상했다.
보통 호위를 맡겨야 한다면 최소 자신과 가까운 인사거나, 신뢰할 만한 자를 대동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어떤가?
무림맹주와 가깝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둘 사이에 어떠한 신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천휘의 한쪽 입매가 천천히 비틀리며, 말아 올라갔다.
“이거 무슨 꿍꿍이가 있나 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