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멸절대의 전각을 빠져나온 용주개와 천휘는 제갈공과 백운이 향했다는 무림맹 내각을 향해 움직였다.
탓, 탓.
비천무영신법(飛天無影身法)을 펼치며 나아가던 용주개는 태연한 모습으로 따라오는 천휘를 힐끗 봤다.
비천무영신법은 개방의 수많은 보신경 중 속도로는 최고라 일컫는 신법이었다.
거기에 그는 비천무영신법을 극성까지 익힌 상태로 웬만한 고수라 해도 그를 쫓지 못하곤 했는데…….
땅을 박차는 천휘는 수월히 따라오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유로웠다.
‘무슨 신법이지?’
용주개의 눈이 반개했다.
그는 정보 문파, 개방의 방주였다.
즉 천하의 온갖 정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생처음 보는 신법이다. 아니, 신법인지, 보법인지도 헷갈리는군.’
용주개는 눈을 반짝이며 천휘의 발놀림을 봤다.
기기묘묘한 움직임이었다.
보법이라고 생각하면 보법 같았고, 신법이라 생각하면 신법같이 보였으니.
‘화산에 이런 보신경이 있었던가.’
개방의 습성 때문일까.
그는 천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 갔다.
그렇게 그가 천휘가 펼친 보신경을 머릿속에 담으며 나아가던 그때였다.
“많이 모였는데?”
천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허공을 주시하면서였다.
천휘의 고갯짓을 따라서 위를 바라보던 용주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먼 허공이 일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각의 바로 위였다.
“벌써 난리가 났군.”
용주개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각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었건만,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가지각색의 기운들이 여기까지 닿고 있었다.
살갗이 따가울 정도였다.
탓!
돌연 천휘가 땅을 거칠게 박찼다.
한순간에 그의 신형이 길게 늘어지더니 단숨에 십 장의 공간을 격했다.
“허어…… 여기서 더 속도를 올리다니.”
용주개가 어이없어하며, 혀를 찼다.
실로 압도적인 속도였다.
여태껏 그가 봐 온 어떠한 신법도 저 신법은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속도로는 최고라고 일컫는 곤륜파의 비룡축전(飛龍逐電)도, 살막(殺幕)의 추혼잔영(追魂殘影)도 저놈이 펼치는 보신경과 비교하면…….’
그의 눈빛이 심오하게 변할 무렵.
휘이익―
이제는 상당히 능숙해진 극성의 비천행보를 펼친 천휘가 눈을 빛냈다.
남다른 기도들의 향연.
그를 자극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맹의 고수들은 다 모였나?’
기파에 일렁거리는 허공을 보던 천휘가 빠르게 나아가고 있을 무렵.
“……탈혼제.”
“그자가 무림맹에 홀로 오다니.”
“아미타불. 사흑련의 사신인 겐가.”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각에 출입하는 문 근처에 모인 이들이 웅성거리는 말소리였다.
그런데 그 한 명, 한 명 면면이 대단했다.
맹에 머무는 구파일방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삼단의 단주들과 사대의 대주들 그리고 원로원의 장로 옥소신검과 삼대봉공 인협공(人俠公)까지.
모두가 모여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단히 벼르는 듯한 행세였다.
뒤늦게 천휘가 문을 지나쳐 들어오자, 지켜보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매화신협?”
“멸절대주도 왔군.”
그들은 천휘의 등장에 놀라거나, 남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게 여겼다.
천휘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과 눈을 마주칠 무렵.
“휘야!”
현도가 서둘러서, 다가왔다.
“너도 경계하러 온 것이냐?”
그의 눈빛은 이미 착 가라앉아 있었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와 반면 천휘는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지 봐 보려고요.”
그 순간이었다.
어느새 천휘의 뒤에 도착한 용주개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온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가 차가운 시선으로 문 쪽을 노려봤다.
닫힌 문 너머, 기운이 느껴졌다.
문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이거 대놓고 기운을 퍼트리는걸.’
천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백운이란 자는 자신의 기세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오히려 해방하고 있었다.
그 기도가 상당했다.
마치 잘 갈고닦은 명검처럼 첨예한 기운은 당장이라도 닫힌 문을 베어 버리고, 그 너머 모인 이들까지 베어 버릴 것 같았다.
“…….”
그 강렬한 기도를 마주한 몇몇 이들의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더불어 몇은 검파에 손을 올렸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그렇게 바짝 날이 선 분위기 속.
끼이익―
그제야 닫힌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저벅, 저벅.
백운이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짙은 그늘 속에 숨겨져 있던 그의 모습이 이내 햇빛을 받으며 훤히 드러났다.
화려한 치장을 한 기괴한 모습.
만약 그를 모르는 자들이었다면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만한 행색이었으나, 지금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그 모습에 오히려 더욱 긴장했다.
“환대가 성대한걸.”
백운이 입꼬리를 말았다.
동시에 가로로 길게 찢어진 두 눈동자가 뱀과 같이 그들을 훑었다.
“……!”
그가 그들을 향해 말한 순간, 대부분이 눈을 부라리며 경직됐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최소 무극지경의 고수들로 기운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앞에 나타난 자의 고강한 무위를!
‘이런 공력이라니!’
‘이것이 전대 사파제일인, 탈혼제!’
그들이 잔뜩 경직되어 백운을 노려볼 때.
‘흐음, 저 정도면 불사천교주와 최소 동수거나, 혹은…….’
천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상대의 무위는 상당했다.
그에게 풍기는 공력도, 존재감도.
모든 것이 그가 남다른 경지에 오른 자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처음 보는 공력인데, 무슨 무공을 익혔을까?’
지켜보던 천휘의 눈이 반개했다.
투기와 호기심으로 눈빛이 중천에 뜬 해보다 뜨거워질 무렵.
“오호라, 안면이 있는 자들이 많은걸. 인협공에 원종대사, 옥소신검 거기에 적월신창(跡月神槍)도 왔나?”
백운이 그들을 향해 입을 달싹였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반면 백운의 시선과 함께 언급당한 이들의 표정이 차차 굳어져 갈 때.
“아미타불.”
나지막한 불호와 함께 누군가 백운 앞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승복을 입은 여승, 소연사태였다.
“왜 이 무림맹에 오셨소이까?”
묻는 그녀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무림맹의 구파일방 중 사흑련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아미파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흑련을 적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 무림맹에 사흑련의 중추이자 고수인 백운이 방문했으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이자는 지금 떠나는 길입니다. 진정하시고 길을 비켜 주시지요.”
따라 나왔던 제갈공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군사, 이자가 나타난 이유라도 알아야……!”
소연사태의 언성이 커지려던 찰나.
“이자는 사흑련의 사신으로 사흑련주의 전서를 들고 왔을 뿐입니다. 이자가 가져온 내용으로 곧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제갈공이 그가 무림맹에 방문한 이유를 밝혔다.
“사흑련주의 전서……?”
소연사태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백운을 포위하던 이들 대부분이 제갈공의 말에 주춤거렸다.
탈혼제가 사신으로 왔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 밝힌 내용이었다. 거기에 방금 맹주를 만난 상황이니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그가 사신으로 올 정도라면 사흑련주가 보낸 전서라고 해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전쟁 중인 만큼, 막상 그 내용을 전해 듣자 충격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군사가 직접 곧 회의가 있을 예정이라고 했으니, 그 내용은 심상치 않은 것일 터.
그렇게 모두가 입술만 깨물 무렵.
“음?”
갑자기 백운이 눈을 빛냈다.
종남검성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오호라, 네가 종남의 검성이군.”
백운이 종남검성 고현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오랜만? 우리가 본 적 있었나?”
“예전에 본 적이 있었소이다.”
“흠, 기억이 안 나는데.”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할게요. 당시 빈도의 경지는 미천해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니.”
“아!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군. 말년에 천무지경에 도달한 자라고 했지.”
백운이 말과 함께 종남검성을 훑어봤다.
마치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가 종남검성을 가만히 담아 갔다.
“신기한 일이야. 뒤늦게 천무지경에 들었으면서 이런 경지까지 오르다니.”
“깨달음에 나이는 상관이 없소.”
“그렇긴 하지.”
백운의 눈초리가 휘어졌다.
“그런데 어쩐지 기운이 조금 흔들리는걸.”
종남검성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내공을 움직여서 내상을 숨기고 있었건만, 바로 알아챈 것이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면 좋겠군.”
백운이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이미 파악한 것이다.
지금 종남검성이 내상을 입은 상태라는 것을.
이어 옆으로 몸을 돌리던 중 그의 시야에 붉고 하얀 도복이 보였다.
‘화산파인가?’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작금의 사흑련을 가장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문파의 무인을 발견한 그는 차갑게 정련된 눈으로 도복을 입은 이를 봤다.
‘얘가 화산신검?’
산적이라고 해도 무방한 낯짝의 중년 도사에게선 단단함이 느껴졌다.
지닌바 공력도 잘 정련된 자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무위나 공력이 종남검성보다 뛰어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현도가 갑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뱀과 같은 눈동자에 미간을 좁힐 때.
‘겨우 이 정도라면 매화신협이라는 놈도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
생각을 이어 가던 백운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화산신검의 바로 옆에서 자신의 기감을 자극하는 존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휙!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곧 화산신검의 옆에 있는 청년 도사와 눈을 마주한 그는 순간 뇌리에 벼락이 내려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주 오랜만에 느낀 기분이었다.
백운이 바로 발을 움직였다.
“……!”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불현듯 자신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백운의 모습에 잔뜩 긴장하며, 기수식을 준비하려고 했다.
하나 그보다 먼저.
탁.
백운이 청년 도사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너는 누구지?”
여유로운 말투였던 조금 전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살짝 흥분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모두가 놀라며, 볼 때.
“내 이름을 알고 싶으면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게 순서지 않아?”
천휘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휘야!”
“멸절대주!”
현도를 비롯한 모두가 기겁했다.
상대는 탈혼제 백운.
아무리 이곳에 무림맹의 고수들이 잔뜩 모여 있다고 해도, 그는 그 이상으로 위험한 자였다.
휙! 휙!
식겁한 모두가 경악하며 혹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검파를 쥐었다.
백운이 움직이면 얼른 나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그것도 그렇겠어.”
백운이 담백하게 답한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둘의 배분 차이는 아득했으며 백운은 자신이 인정한 자가 아니라면, 건방진 꼴을 그냥 넘길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순순히 천휘의 말을 인정한 것이다.
“백운이다.”
“천휘.”
“……매화신협이군.”
백운의 안광이 순간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마치 큰 즐거움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대소를 내뱉던 그가 어느 순간 웃음을 뚝 그쳤다.
찰나 지간 둘의 시선이 얽혔다.
차갑고도 투명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기를 잠시, 백운이 입을 달싹였다.
“강하군.”
“너도.”
둘의 대화에 모두 당황했다.
백운은 한참 배분이 낮은 천휘가 대등하게 대화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잠시 천휘를 보던 백운은 이내 더 볼 것이 없다는 듯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제갈공을 향해서 말했다.
“가지.”
제갈공은 갑자기 먼저 가자고 하는 백운을 바라보다, 천휘를 응시했다.
‘……탈혼제가 이렇게나 큰 반응을 보이는 인물이었던가?’
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가 알기로 백운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한참이나 어린 무인을 경계한 것이다.
‘어쩌면 훗날 맹주님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천휘를 보던 그가 몸을 돌렸다.
아직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훗날의 일.
“오십시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제갈공이 발을 내디뎠다.
둘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제갈공과 백운에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보다가 길을 터 주며 물러났다.
직후 조용히 둘의 뒤를 따라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이도 있었고, 긴장이 풀렸는지 멍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천휘는 방금 전 자신을 노려보던 백운의 기세를 떠올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탈혼제 백운이라…….”
투기가 들끓었다.
불사천교주와 생사결을 펼치던 그때의 느낌보다 더욱 강렬하게.
“쩝, 아쉬워. 이곳이 아닌 전쟁터에서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천휘는 빠르게 멀어져 가는 제갈공과 백운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비천행보를 펼쳤다.
* * *
백운이 무림맹을 떠나자마자, 대회의전에 사람들이 속속 모였다.
“맹주,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오?”
대충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용주개가 무림맹주를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까지 의문을 참은 것도 많이 참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심정인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에 대한 대답을 듣고자 무림맹주의 닫힌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무림맹주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운 웃음이었으나,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드는 미소였다.
이내 그의 입술이 떼어졌다.
“사흑련에서 협정 요청을 해 왔네.”
“협정?!”
“정확히 말해 주시오!”
말을 돌리는 듯한 맹주의 답변에 몇몇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무림맹주는 그러한 그들의 반응에도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그 말 그대로네.”
“어떤 협정이기에 탈혼제가 직접 사신으로 온 것이냔 말이오!”
“무슨 협정이냐 묻는 것 아닙니까!”
과열되는 분위기 속 무림맹주는 그들을 한 명씩 응시하며, 입을 뗐다.
“종전에 관한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