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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천마-343화 (343/391)

343화

벌컥, 벌컥.

무림맹에 도착하기 전, 따로 사 둔 술을 병째로 마시던 백운은 자신을 가로막은 거대한 성벽을 응시했다.

약 육 장가량의 높이.

가히 성벽이라 부를 만한 담이었다.

“원래 저렇게 높았었나? 어째, 전보다도 더 높아진 것 같은데…….”

백운이 혼잣말로 중얼거릴 무렵.

쿠구궁―

불현듯 성문이 개방되었다.

그리고 그 열린 문 사이로 나이를 파악하기 힘든 사내가 걸어 나왔다.

무림맹의 군사, 제갈공이었다.

백운의 바로 앞까지 걸어 나온 제갈공은 포권을 취하면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를 반기는 환영 인사였다.

한데 환영한다는 말을 건넨 것치고는 그의 얼굴에 존재하는 건 건조한 무표정뿐이었다.

백운은 무표정으로 포권을 취한 제갈공을 찬찬히 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나 쪼그맣던 제갈가의 꼬맹이가 많이 성장했는걸. 흠, 너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사십 년 전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단 말이지.”

“사십오 년 전, 입춘 때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듯 던진 백운의 말을 듣던 제갈공이 딱 잘라서 말했다.

“꽤 자세히 기억하는군.”

“잊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잊지 못한다라…… 재밌어.”

백운은 가는 눈으로 제갈공을 쳐다보다가, 병의 술을 벌컥 들이켰다.

“크으, 그런데 자신감이 대단해.”

술병에서 입을 뗀 백운이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맹의 고수들을 대동 안 하고 네놈 혼자서 나를 맞이하러 오다니.”

그의 안광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서늘한 살기가 떠오른 것이다.

분명 제갈공의 두뇌는 천하에서도 견줄 이가 얼마 안 될 만큼 빼어나지만, 지닌바 무위는 절정도 안 되는 일류 수준의 무인이었다.

그에 반해 백운은 절대고수였다.

백운이 손 하나 까닥하는 것만으로도 지금 당장 그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이는 현격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백운의 손아귀에 제갈공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갈공은 흔들림 없이 담담했다.

그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백운을 주시하며, 차분하게 말을 꺼낼 뿐이었다.

“당신이라면 저를 안 건드릴 것이라고 말이죠.”

“……그건 재미없는 대답인걸.”

일순간 눈을 가늘게 뜨며, 속닥이던 백운이 살기를 순식간에 거뒀다.

놀랍도록 빠른 갈무리였다.

그의 무위가 지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리는 모습이었다.

“한데 참으로 영악한 짓을 했어.”

백운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갈공이 생각한 바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비천회의 남궁세가가 움직이긴 했지만, 아직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대놓고 전면에 나온 상황은 아니었다.

조금씩 간을 볼 뿐이었다.

그 이유야 단순했다.

아직은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사흑련의 사신으로 맹에 방문한 자신이 군사를 죽인다?

비천회는 더 사릴 것 없이 정사대전으로 전쟁을 확대하여 무림맹과 손을 잡고 참전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네 목숨을 걸고 승부를 건 거냐?”

“따라 했을 뿐입니다.”

순간 백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따라 했다고? 뭐를?”

“지금 당신이 한 것 말입니다.”

제갈공이 싸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백운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북풍한설과도 같이 고요하고, 차가웠다.

“하하하핫!”

제갈공의 시선을 마주한 백운이 돌연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나 알아챘나. 아니, 들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겠어.”

말하는 그의 눈초리가 휘어졌다.

사신을 자처한 그가 홀로 온 것은 모두 계획의 일환이었다.

아무리 전쟁이라 할지라도 사신의 방문은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방문을 거부한다면 양민들이 적잖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겠지.’

지금 일반 백성들은 강호의 전쟁에 휩쓸려서 상당히 분위기가 안 좋았다.

강호의 무인들이 날이 선 상태로 있으니, 어찌 좋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어쩌면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는 사흑련 사신의 방문을 거부한다?

‘그럼 비천회도 감히 무림맹과 함께 우리를 공격할 수 없겠지.’

비천회가 아무리 정파지만 그전까지는 무림맹과 적대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그런 양민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힘을 합친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웃는 백운을 보던 제갈공이 뒤로 몸을 돌리며, 입을 달싹였다.

“따라오십시오. 무림맹주님께 안내하겠습니다.”

* * *

“저, 저 모습은 설마 백운?!”

“거참,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나. 탈혼제 백운이라면 칠요선의 수좌이며, 전대 사파제일인 아닌가. 그런 그가 왜 맹에 홀로 왔겠는가?”

“내가 그걸 어찌 아나! 하지만 저 모습을 보게. 천하에 저렇게나 화려하게 치장한 기괴한 남자가 그자 말고 어디 있겠는가!”

“그, 그러면 그를 쓰러트려야 하지 않나?”

“왜 군사님께서는 저자와 함께…….”

무림맹의 곳곳에 소란이 일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공은 맹주전으로 가는 내내 드러난 길로 이동하였으니까.

그렇기에 동반한 자의 독특한 행색이 모두에게 알려지면서, 다들 알아채고 만 것이다.

지금 군사와 함께 이동하는 자가 탈혼제 백운이라는 것을.

“탈혼제가 맹에 방문했단 것이냐?”

용주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허, 헉! 그, 그렇습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른 개방도가 다급히 말했다.

용주개가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목적은?”

“아직 자세한 것은…….”

개방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또한 거리를 걷는 백운의 얼굴을 보고는 바로 달려와, 자세한 정보를 취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용주개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직접 알아봐야겠다.”

말하는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놈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쉬이 넘길 일이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탈혼제였다.

작금의 강호에선 백운이 칠요선의 수좌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그의 최전성기를 직접 보고 겪은 용주개는 과거를 잘 알고 있었다.

전대 사파제일인, 탈혼제.

사흑련주에게 패배해서 그의 수하로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믿지 못했을 만큼, 엄청난 과업과 무위를 가진 자였다.

“맹주전 방향이라 했냐?”

“그렇습니다.”

“다른 개방도들에게 탈혼제의 흔적을 놓치지 말라고 전해라. 이 무림맹 내에서는 물론, 그 이후도.”

“알겠습니다!”

“그럼 나도 그놈을 보러…….”

용주개가 발을 움직이려 할 때.

“탈혼제가 누군데, 그러죠?”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를 홀짝이며 나른하게 있던 천휘가 궁금증을 보이며 물어 온 것이다.

그를 본 용주개의 눈이 빛났다.

‘이 녀석을 데려가면…….’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천휘 또한 만만치 않은 고수였다.

그런 그를 데려가는 것이 득일지, 실일지 고민하던 그가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전대 사파제일인이다.”

“전대 사파제일인……?”

천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거 꽤 흥미로운 말이네요.”

말과 함께 천휘는 찻잔을 바로 내려놓았다.

아직 반절이나 남은 찻물이 파도처럼 흔들렸지만 천휘는 그것을 놔둔 채로 그대로 일어났다.

이제 더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저도 같이 가죠.”

천휘가 용주개를 향해, 통보하듯이 말했다.

어느새 검을 허리춤에 찬 채였다.

그 직후 천휘는 훤히 개방된 창밖을 흥미의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그 탈혼제란 사람 보고 싶으니.”

* * *

끼이익―

오래된 듯한 나무 문이 옆에 선 두 무인의 손에 의해 열렸다.

두 무인은 문을 열어젖히는 와중에도 제갈공과 나란히 걸어온 백운을 노려보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를 본 순간 느꼈기 때문이다.

백운에게서 뿜어지는 사기와 살기를.

“눈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걸.”

백운이 날카롭게 쏘아지는 둘의 기운을 보며, 술병을 천천히 흔들었다.

술이 찰랑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화아악!

순간 그들의 기운이 사라졌다.

“……!”

놀란 그들이 식겁할 무렵.

“사신이면 사신답게 행동하게나.”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은한 공력의 기파가 실린 목소리는 그새 두 무인을 압박하던 무형의 기운을 단숨에 해소하며, 흩날려 버렸다.

그에 백운의 눈이 안을 향했다.

깔끔한 대전이었다.

붉고 밝은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그 주위를 천이 감싼 담백한 모습이었다.

하나 지금 백운은 그렇게 단정히 꾸며진 내부를 감상하기보단, 한곳에 시선을 집중할 뿐이었다.

계단 위 존재하는 상석.

그곳에 앉은 이에게였다.

“오랫동안 안 본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심의검협 양반.”

무림맹주는 오랜만에 귀로 직접 듣는 별호에 미소를 짓더니, 입을 뗐다.

“오랜만이올시다. 탈혼제.”

무림맹주의 말과 웃음에 백운 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그 낯짝이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

“나 또한 마찬가지네.”

둘의 대화가 잠시 멈춘 순간.

쿵.

활짝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무림맹주가 백운을 향해 말했다.

“하여, 무슨 일로 왔나?”

그의 음성이 물결치며 팔방에서 백운을 향해서 쏘아졌다.

육합전성이었다.

백운은 귀에 웅웅거리는 무림맹주의 음성에 술병을 입에 물었다.

“꿀꺽, 꿀꺽.”

그렇게 술을 마신 그가 그제야 다시 입을 뗐다.

“련주가 네놈에게 전하란 것이 있거든.”

그 말과 함께 그는 품속을 뒤지더니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린 두루마리가 무림맹주에게 닿기도 전에 추락하려 했다.

그대로 힘없이 바닥에 닿으려는 그때.

둥실―

두루마리가 갑자기 중간에 멈추며 떠올랐다.

허공섭물이었다.

“어이쿠, 내가 약하게 던졌군.”

입가를 삐뚤게 올린 백운은 허공섭물을 펼쳐서 떨어지려던 두루마리를 위로 상승시켜, 무림맹주의 코앞까지 정중하게 가져다주었다.

“쓸데없는 힘자랑을 하는구먼.”

“간단한 흥이지.”

“…….”

맹주는 두루마리와 웃는 백운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손을 뻗었다.

휘리릭―

두루마리를 손에 넣은 뒤 묶여 있는 실을 풀어 그 내용을 본 무림맹주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이내 그가 백운을 보며, 물었다.

“안에 적힌 내용을 알고 있나?”

“대충은.”

“허허, 많이 변했군.”

말과 함께 무림맹주가 작게 웃었다.

“천하의 탈혼제가 이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 직접 오다니.”

백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역린을 건드린 형세였다.

하지만 곧이어 백운은 굳었던 얼굴을 펴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차갑고도, 싸늘한 미소를.

“과거는 과거지 않겠어? 이제 나는 탈혼제가 아닌 백운인 것처럼.”

“…….”

무림맹주는 따로 대꾸하지 않고 두루마리를 놓았다.

그 순간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두루마리가 둥실 떠오르더니, 이번엔 백운의 옆에 있는 제갈공에게 전달되었다.

제갈공은 그것을 받아 들고 두루마리에 있는 내용을 보더니, 차가운 안광을 발하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이내 아주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가 사라질 무렵.

“그럼 난 가 보지.”

백운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더 볼 것 없다는 태도로 나가려는 백운을 본 무림맹주가 입을 열었다.

“내 대답은 안 듣는가?”

“대답은 그날, 그 장소에서 련주에게 직접 해. 난 이걸 전해 주러 왔을 뿐이니까.”

백운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무림맹이 내놓을 답에는 관심조차도 없다는 태도였다.

무림맹주는 문밖으로 나가려는 백운을 보다가 군사에게 언질했다.

“무림맹 밖까지 그를 잘 안내해 주게. 군사.”

지금 맹주전 밖은 난리일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흑련의 사신으로 백운이 직접 방문한 상황이지 않은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백운을 혼자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갈공은 무림맹주의 뜻을 바로 헤아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윽고 둘이 맹주전을 빠져나갔다.

쿠웅.

그들이 나간 뒤 다시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무림맹주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차가운 안광을 발휘했다.

“사흑련의 협정 요청이라…….”

두루마리에 적혀 있던 글귀를 떠올린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만족감이 가득한 미소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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