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사신대주 심조영(沈照映)은 호북성의 무가, 심가(沈家)의 여식이었다.
제법 전통 있는 무가였으나, 무당파와 무림맹이 있는 호북성 내에서 심가가 영향력을 발휘하긴 불가능했다.
권각술에 일가견이 있는 무가.
딱 그 정도의 명성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러한 세간의 평가에 불만을 품은 그녀는 심가를 빠져나와서, 당당하게 무림맹으로 향했다.
그녀의 나이 열여섯 때였다.
어느 정도 명성이 있었다고는 하나, 결국 일개 무가일 뿐인 심가의 여식인 그녀는 여타 다른 무인들과 같이 말단에서부터 임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무림맹 입맹은 무인으로서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본래부터 그녀의 자질은 뛰어났었다.
심가의 긴 역사 내에서도 자질만큼은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 덕분일까.
목숨이 오가는 싸움의 연속에서 심가라는 작은 우물에 갇혀 있던 그녀의 자질이 해방되며, 일순 폭발하듯 성장을 거듭했다.
무시무시한 재능의 발현이었다.
씨앗인 채로 묻혀 있던 그녀의 재능에 실전 경험이란 양분이 더해지며, 품고 있던 화려한 꽃이 개화한 것이다.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명성을 쌓아 갔다. 말단에서 시작한 그녀가 사신대에 입대하게 되고, 끝내 부대주 직까지 꿰차게 되었을 만큼.
하나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아니, 만족하지 못했다.
‘지금의 가전 무공으로는 한계가 있다.’
오랫동안 강호를 누빈 덕분일까.
그녀는 현재 심가의 가전 무공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해서, 그녀는 심가의 가전 무공을 깡그리 갈아엎고, 그동안의 실전 경험을 녹여 내어 재정리하였다.
자신의 무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심가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삼류 무공이나 다름없던 심가의 가전 무공, 심가기공(沈家氣功)을 비롯해 난잡한 권각술은 하나로 묶어서, 명멸투결(明滅鬪結)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립을 넘어 삼 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올라 지금까지 젊을 적의 미모를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벌써 이십 년도 넘은 과거의 일이었다.
그 이후 그녀는 전대의 사신대주를 꺾어 대주가 되었고, 더더욱 이름을 떨쳤다.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이렇게 맥없이 당한 게 얼마 만이지?’
의식을 찾자마자, 그녀가 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노화순청의 경지에 도달한 이후 그녀는 의식을 잃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생사의 기로를 걷는 무인에게 기절이라는 건 죽음과 직면하는 일이었으니.
‘예전에 전대 신룡대주와 비무했다 당한 이후 처음인 것 같은데.’
아득한 옛날이었다.
그녀가 갓 사신대주가 되었을 무렵 신이 나서 앞뒤 가리지 않을 때였으니, 십 년은 훌쩍 지난 과거이리라.
‘……고절한 일 검이었어.’
그녀는 기절하기 전 보았던 아름다운 한 줄기의 궤적을 머릿속에 그렸다.
상서롭고, 기이했다.
오랜 세월 강호에서 살아가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검로를 보고 상대해 온 그녀조차, 감탄이 먼저 나올 정도였다.
마치 노을을 불러일으키는 듯 그어진 붉은 검로를 회상하던 그녀는 이내 감겨 있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눈꺼풀이 들리며 푸른 하늘과 해가 눈을 뜬 자신을 반겼다.
이어서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스윽―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에 사신대주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로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천휘였다.
“정신 차렸나 보네요.”
“아야, 너무 아프던걸. 내가 졌다.”
천휘의 말에 사신대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무는 자신의 패배로 끝났다.
분명한 사실을 인정한 그녀의 말에 천휘는 감흥 없는 얼굴로 딴소리를 했다.
“그럼 둘 좀 부탁할게요.”
사신대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자마자 천휘가 부탁한다고 하는 둘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파마대주와 협위대주가 바닥에 기절한 채로 엎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놀란 눈으로 둘을 보던 그녀가 다시 천휘를 보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했다.
이미 천휘는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하핫! 이거 무림맹의 대주라는 놈들 꼴이 말이 아니게 됐어.”
사신대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림맹 사대의 대주들이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 널브러진 이들 모두 최소 천무지경에 도달한 자라는 뜻이었다.
한데 이제 겨우 약관을 넘은 화산파의 도사에게 모조리 당한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매화신협 천휘라…….”
중얼거리던 사신대주가 천휘를 회상하더니, 두 눈을 번뜩였다.
욕심 그득한 눈빛으로였다.
“언제였었더라, 예전에 듣기로는 장문인이 안 된다면 혼인이 가능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녀가 멀리 시선을 던졌다.
멸절대가 머무는 전각이 있는 방향이었다.
“우리 혜아 정도면 저놈이라도 홀딱 넘어오겠지?”
심가 제일의 미녀라고 불리는 심소혜(沈小慧)를 떠올린 그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강호에서 사람을 품고 싶을 때 가장 많이 취하는 전략인 정략결혼을 떠올린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연통을 보내야겠어.”
* * *
채 하루가 꼬박 지나기도 전에 파마대주와 협위대주 그리고 사신대주가 멸절대주, 천휘와 비무를 벌였다는 것은 무림맹 내에 크게 회자되었다.
신룡대를 제외한 사대의 대주와 최근 명성을 떨치는 멸절대주 매화신협의 비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빠르게 식었다.
비무를 했던 넷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비무 결과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파마대주가 준비한 연무장은 그들 외,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이제는 더 떠드는 이가 없는, 비무가 일어난 나흘 뒤.
“쟤는 왜 여기 있냐?”
천휘를 찾아온 개방주 용주개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창밖으로는 연무장이 보였는데, 연무장의 중앙에는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의자에 앉은 사신대주가 멸절대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무 이후로 매일 오던데요.”
천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안 쫓아내냐?”
용주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가 봐 온 천휘라면 저렇게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왜 쫓아요? 저렇게 알아서 훈련을 감시해 주는데.”
외부인도 외부인 나름이라는 것을.
용주개의 생각과 반대로 천휘는 이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지금 행하고 있는 멸절대의 훈련은 단순했다.
마보와 기본적인 체력 훈련.
그것을 계속 보는 것은 고역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지켜보지 않으면 아무리 멸절대라고 해도 느슨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신대주가 자신의 일을 대신해 주는 꼴이지 않나.
‘알아서 사신대주의 눈치를 보고 열심히 수련하니, 편하단 말이지.’
만족스럽게 사신대주를 지켜보던 천휘는 고개를 돌려, 용주개를 봤다.
‘그 반면 여기는…….’
혀를 차던 천휘가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어르신께서는 왜 갑자기 여기까지 왔어요?”
“큼큼.”
용주개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천휘의 물음 속에 담긴 의도를 느꼈기 때문이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
“이야기요?”
“검성이 왔다 갔다고 들었다.”
용주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하나, 천휘로선 무게를 잡는 그 태도와 기름진 머리카락, 누런 이를 드러낸 모습이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전해 들은 것이 있느냐?”
“그걸 왜 저한테 묻죠?”
천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궁금하면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시지.”
정론이었다.
그러나 용주개는 그 대꾸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잘 생각해 봐라. 내가 검성을 찾아간다면 다른 놈들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의심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따지면 저도 찾아와선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네놈은 이미 전부터 만나 오지 않았느냐. 이미 너와 나 사이에 인연이 있는 것을 다 아니 괜찮다.”
“그건 아쉽네요.”
천휘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이눔이!”
순간적으로 발끈한 용주개가 두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에휴 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검성 놈이 뭐라 말했느냐?”
“별거 없어요. 그 회니, 뭐니 하는 놈들에게 내상을 입었다는 것 정도?”
용주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내상?”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검성의 실력은 ‘회’에 대적하는 그들 중에서도 수위에 꼽힐 정도였다.
한데 내상이라니.
“한데 둘이 같이 움직이나 봐요?”
천휘의 물음에 용주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음? 그건 안 알려 준 게냐?”
“직접 물어보라던데요.”
“그놈이 귀찮게…….”
용주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그걸 보던 천휘는 둘 사이의 관계를 더 묻기보다는 남은 찻물을 모두 들이켠 뒤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런데 최근에 무림맹의 분위기가 조용한 것이 묘하네요.”
그 말에 용주개가 고갤 끄덕였다.
천휘의 말처럼 최근 맹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무림맹에 복귀하고 나서도 한시가 바삐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러 떠났어야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흑련과의 전시 상황이지 않은가.
한데 이상하게 고요했다.
임무지로 떠나기는커녕, 아예 새로운 임무를 전달받은 것도 없었다.
멸절대는 물론이고, 맹의 전부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삼단사대 대부분은 무림맹으로 복귀해 요양하고 있었고, 습격을 당했다는 연통도 없었다.
“비천회가 끼어든 것 때문에 사흑련이 후퇴해서 그렇다.”
용주개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본래라면 좋아할 일이었다.
전쟁 중 적이 후퇴한 것이었으니.
하나 그는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었다.
일견 평화로운 듯했지만, 심상치 않은 일이 닥쳐올 전조처럼 느껴진 것이다.
“결국은 부딪쳐야 할 텐데.”
천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전쟁은 이미 벌어진 상황이었다.
사흑련의 입장에서도 아무리 불리하다고 한들, 계속 후퇴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려나?”
천휘가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서 새까만 먹구름이 아주 천천히 무림맹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 *
저벅, 저벅.
무림맹의 성문을 지키던 수문 무사는 불현듯 들려온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먹구름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저게 무슨 꼴이지?’
수문무사의 눈이 찌푸려졌다.
사내는 다소 꺼림칙한 모습이었다.
왼쪽 귀에 달랑거리는 화려한 귀걸이와 눈에 칠해진 진한 붉은 분칠.
사내다운 얼굴에 그렇게 꾸미고 있으니, 꽤 거부감이 드는 모습이었다.
‘누구…….’
사내를 자세히 살펴보려던 수문 무사는 순간 숨을 삼켰다.
걸어오던 사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귀신……?”
순간 놀란 수문 무사가 벌벌 떨면서 중얼거릴 무렵.
“귀신이라니, 너무한 소리를 하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헙!”
화들짝 놀란 수문 무사가 황급히 검을 꺼내려고 하는 찰나.
턱.
검파에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사내는 수문무사의 옆에 바짝 붙어서는 검파를 쥐고 있었다.
“왜 그리 성질이 급해?”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얼굴에 친한 분장이 와락 일그러지며, 기괴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 당신은 누구…….”
“나?”
수문 무사의 물음에 사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백운.”
“백운이라면 설마…….”
수문무사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백운이란 이름과 이런 행색을 할 만한 자는 이 강호에서 오직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탈혼제……!”
백운은 자신의 별호를 언급하는 수문 무사의 귓가에 작게 속닥였다.
“얼른 들어가서 맹주에게 전해. 사흑련의 사신으로 백운이 직접 이 무림맹까지 행차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