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멸절대에서 유일한 종남파의 제자인 무홍은 두 눈을 비비적거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조금 전 자신과 짧은 인사를 나눈 것이 종남검성임은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된 일이건만, 지금도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고현 사숙조님께서 직접 방문하시다니…….”
무홍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종남검성 고현은 자유분방했다.
평소에도 종남파에 머무는 일이 드물었고, 그 시간에 천하를 유랑하며 힘없는 이들을 돕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분이었다.
장문인께서 불러도 급한 일이 아니면 오지 않으시는 그런 분이거늘.
‘이렇게 사숙조님께서 누군가를 보기 위해 직접 걸음을 옮겨 방문하는 것은 내 생전 처음 보는 일이야.’
마른침이 꿀꺽 목울대를 넘어갔다.
곧장 그가 옆을 보며 말했다.
“천향 부대주는 저 두 분이 이렇게나 친밀한 관계임을 알고 계셨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 것이었다.
같은 사문에 사제이니,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자신은 종남검성과 배분에 차이가 있지만, 이 둘은 꽤나 친밀한 관계가 아닌가.
그러나.
“아니요. 저도 몰랐어요.”
돌아온 대답은 그의 상황과 같다는 것이었다.
‘사제는 언제 검성 대협과 이렇게 친밀한 관계가 된 거람.’
천향 또한 지금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종남검성 고현.
그 별호와 이름은 한때나마 섬서의 패권을 두고 종남파와 적대했던 화산파에서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행적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처한 양민들을 돕기 위해 홀로 하산해 천하를 유랑하는 도사.
어찌 인정하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고수와의 친분이라니.
‘까도, 까도 계속 놀라운 게 나와.’
천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중.
“아!”
문득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검성 대협께서 화산에 방문하셨기는 했는데.”
“화산에 방문이라면…….”
무홍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합동 작전 때……?”
그는 섬서의 사파를 쫓아내기 위해 화산에 협약하러 갔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겨우 하루일 텐데.”
무홍이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관계가…….”
“그러니까요. 저도 궁금하네요.”
둘은 작게 대화를 나누며 전각을 바라봤다.
궁금증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였다.
그리고 그것은 둘만이 아니었다.
종남검성이 방문했을 때부터 수련도 잊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던 대원들은, 멍하니 전각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검성과 대주의 대화라…….”
“궁금해.”
“안에서 무슨 이야기 중일까?”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에, 멸절대가 고요히 술렁였다.
* * *
“매번 뜬금없이 찾아오네요.”
천휘가 자연스럽게 종남검성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입을 달싹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전번에 못다 한 대련을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네요.”
중간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 문장을 마친 천휘가 종남검성을 살폈다.
순간 천휘의 두 눈이 반개했다.
돌연 스며져 나온 매화신공의 공력이 그의 두 눈에 조밀하게 짜이더니, 이내 환하게 피어났다.
마치 씨앗이 싹을 틔운 것처럼.
화아악―
순간 의식이 아득하게 넓어졌다.
동시에 모든 것이 선명히 보였다.
허공에 떠도는 기운의 흐름까지도.
안법의 발현이었다.
흑백으로 나뉜 선명한 눈동자가 종남검성을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다.
‘역시 잘못 느낀 게 아니었네.’
천휘의 눈빛이 무겁게 침잠했다.
검성이 흘리는 기파가 묘했기 때문이다.
이 기파는 종남파의 신공 중 가장 이질적이고 패도적인 호신강기공, 은하천강신공(銀河天强神功)이었다.
한데 왜인지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에 보았을 때는 견고하고 패도적인 성질의 기운이 전신을 안정감 있게 둘러싸고 있었으나, 지금은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마치 균열이라도 난 것처럼.
‘천무지경의 수위에 달하는 고수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그 의미를 파악하던 그때였다.
탁.
손에 든 찻잔을 탁자에 가볍게 내려놓은 종남검성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천휘의 두 눈을 마주했다.
“강렬한 눈빛이구나.”
속닥이듯이 말한 그의 눈썹이 현월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직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보았느냐?”
“뭘요? 내상이요?”
천휘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나 그 내용은 천하에 알려진다면 거친 파랑을 일으킬 정도로 큰 사안이었다.
“허허, 눈빛만 강렬한 것이 아니었구나.”
종남검성이 허허롭게 말했다.
“한눈에 내상을 꿰뚫어 보다니.”
“보면 알죠. 심기체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있는데.”
말하던 천휘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종남검성은 천무지경의 고수였다.
심기체를 일통했을 뿐만이 아니라, 삼화취정까지 얻은 상태였다.
모든 것이 조화롭단 뜻이었다.
한데 그 조화의 균형이 무너지고 내상을 입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누구한테 당한 거죠?”
천휘가 물었다.
목소리에는 흥미가 묻어나 있었다.
궁금한 게 당연했다.
종남검성은 여태껏 현 강호에서 그가 봐 온 수많은 고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고수였다.
그런 그에게 내상을 입힌 자라니.
어찌 안 궁금하겠는가!
천휘가 눈을 빛내는 그때, 종남검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기가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휘의 감정 변화로 인해 이 공간의 대기 역시 반응하듯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뜻이었다.
감정에 기운이 동화되는…….
심즉기현(心卽氣顯)이었다.
‘거기서 또 성장한 것인가.’
종남검성은 감탄을 마지않았다.
이미 전에도 천휘의 무위는 연배에 어울리지 않는 압도적인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한데 거기서 더욱 성장한 것이다.
겨우 일 년이란 짧은 사이에.
‘고금을 통틀어도 이 재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있을 것인가.’
소림을 세운 달마도, 무당을 세운 장삼봉도, 마인들을 한데 모아서 마교를 발호한 천마도 이보다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여길 오는 것이 맞았군.’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천휘를 보던 종남검성의 수염이 움직였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가 누군지는 모르네.”
“모른다고요?”
종남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전 처음 보는 자였지. 용모파기로 본 적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자가 펼쳤던 신비롭고 유려한 무공도…….”
말하던 그가 먼 곳을 응시했다.
그때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른다고?’
천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종남검성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의 고수라면 천하에 알려졌을 텐데.’
떠오른 의문에 의해 생각에 잠기려던 그때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딱 하나 알아낸 것이 있네.”
종남검성이 나직이 말했다.
“그게 뭐죠?”
“그는 회의 인물이더군.”
“회……? 아! 비천회요? 팔대세가의 고수였나 보네요.”
그 말에 천휘가 당연하다는 듯 팔대세가를 중심으로 한 비천회를 언급했으나.
“그 회가 아닐세.”
종남검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회지.”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어 다른 누군가가 들으면 안 된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기막을 둘렀음에도 말이다.
“자네도 알고 있을 거네. 전번 천이개와 함께 맞섰다고 들었네만.”
“함께 맞서…… 아!”
생각을 더듬던 천휘는 말하던 중 당시를 바로 떠올렸다.
“혈룡문에서 혈교의 혈영미혹진(血永迷惑陣)을 펼치던 놈들이요?”
“그러네.”
“그놈들이 회였어요?”
천휘가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순간 개방주와 군사가 말했던 ‘회’라는 곳에 대한 얘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림맹에 세작을 침투시켰다는 곳.
“흠, 개방주가 말한 회랑 다른가.”
“역시 개방주가 알려 줬나 보군.”
혹시나 다른 곳이 있나 싶어 중얼거린 말에, 종남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짐작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맞네.”
그러고는 이어, 천휘가 알고 있던 곳이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개방주와 같이 움직이나 봐요?”
“허허, 그건 안 알려 줬나 보군.”
종남검성이 미소를 머금었다.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었다.
“그건 직접 물어보게나.”
“흠, 그래요? 뭐…….”
천휘는 귀찮다는 듯 말을 흘렸다.
둘이 무슨 사이인가, 그런 거엔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의 관심을 끄는 건 오직 하나였다.
“그래서 어르신에게 내상을 입혔던 그자는 어떻게 됐죠?”
“그도 내상을 입고 물러났네.”
“동수였단 거네요.”
“그렇지.”
종남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인정했다.
‘회란 말이지.’
조금 흥미가 동할 무렵.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숙님을 뵈러 왔네.”
밖에서 쑥덕거림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검성과 천휘는 대화를 잠시 멈추고,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대화는 여기서 끝내야겠군.”
종남검성이 남은 찻물을 들이켰다.
뒤이어 그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아. 이 말을 한다는 게 깜빡했구먼그래.”
종남검성이 멈칫하며, 중얼대듯 말했다. 이어서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희미한 내공을 담으면서였다.
『조심하게.』
나직한 전음이 귀를 관통해 왔다.
『회에서 자네를 노리고 있네.』
그 전음을 끝으로 그가 방에서 나가자, 소란스러운 말들이 들려왔다.
“사숙님!”
“어찌 저희에게 오시지 않고…….”
“다른 이들의 처소까지 와 소란스럽구나. 정숙하거라.”
종남검성은 자신들을 찾아온 종남파의 도사들에게 엄한 목소리를 내며 그들을 이끌었다.
“이곳에 더 누를 끼치지 말고 나가서 이야기하자꾸나.”
곧 종남검성과 종남파의 도사들은 멸절대의 전각을 떠나갔다.
그와 함께 멸절대의 전각에는 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 속에서 천휘는 생각에 잠겼다.
‘날 노린다고?’
꽤 흥미로운 말이었다.
곧 그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거 재밌겠는걸.”
* * *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조금의 지체도 없이 비천서고에 들어갔다가 나온 천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쉬움을 삼켰다.
“많기는 많네.”
두 번째로 비천서고에 들어간 것이었건만, 아직도 비천서고에 있는 서책을 모두 파악하긴 힘들었다.
“최소 만 권 정도 되려나? 쩝. 이거 다 보려면 한두 번으로는 안 되겠는데.”
천휘가 중얼거릴 무렵.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않겠나?”
문지기, 육무광이 말을 걸어왔다.
세 번이나 만나서일까.
처음 만났을 적 건조하기 짝이 없던 태도와 어투에 이제는 조금 친밀감이 깃들며 다소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네라면 가능할 테니 말일세.”
“그건 그렇죠.”
천휘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의 말대로 공적을 다시 쌓아 또 오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과 같은 전시 중에 공적을 쌓는 건 쉬우니까.’
천휘는 계속 서책을 읽느라 뻐근해진 목을 가볍게 풀며, 몸을 돌렸다.
“그럼 다음에 보죠.”
“조심히 가게나.”
나직한 육무광의 인사를 뒤로 한 천휘는 빠르게 전각 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에 들어간 덕분일까.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던 천휘는 고개를 내리려다가,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어쭈, 이것 봐라?’
맞은편 전각의 지붕에서 아주 강렬한 투기가 느껴졌다.
곧 폭발할 것만 같은 기도였다.
일렁거리는 투기가 천휘에게로 밀려오며 햇빛에 녹아들어 아롱거렸다.
천휘가 지붕을 응시했다.
지붕 위에서는 세 인영이 있었다.
모두 면식이 있는 자들이었다.
파마대주와 협위대주 그리고 자신을 향해 투기를 흘리고 있는 여인, 사신대주가 시선이 마주치자 중천에 떠오른 해보다 더욱 밝게 웃었다.
그러고는.
휙―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표홀히 위에서 떨어져 내린 그녀는 이내 천휘의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놀라운 보신경이었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햇빛에 반짝이며 하늘거리는 그때.
“반가워, 멸절대주.”
그녀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밝은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
“기다려도 안 오길래, 찾아왔어.”
말을 하는 그녀의 전신에서 투기가 발산되며, 주변의 공간을 짓눌렀다.
이어 그녀가 안광을 폭사했다.
“한시라도 빨리 너와 비무를 하고 싶어서, 아주 몸이 근질거렸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