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천휘는 원형의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의 면면을 찬찬히 훑어봤다.
대부분이 낯선 자들이었다.
하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서 그런지, 몇몇은 눈이 마주치자 반갑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내비쳤다.
과거 좋은 연이 있던 자들이었다.
‘파마대주, 협위대주, 아미파의 소연사태 그리고…….’
얼굴을 아는 자들과 시선을 맞춰 가며 자리에 모인 이들을 살피던 천휘는 이내 그 누구보다 활짝 웃으면서 반기는 중년 사내를 봤다.
웃고 있음에도 우락부락한 인상.
만약 입고 있는 도복이 아니었다면 산적이라고 착각할 법한 현도였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양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처럼 아주 휘황찬란하게 올라가 있는 것이다.
현도와 잠깐 시선을 마주한 천휘는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현도가 자신을 보며 자주 하던 말.
‘역시 천휘구나!’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그렇게 현도까지 시선을 맞춤으로써 탁자에 앉은 이들을 모두 살펴본 천휘의 눈이 실처럼 가늘게 뜨였다.
‘보니까, 이들이 현 무림맹의 중추들인가 보지?’
한 명, 한 명 기세가 특출났다.
의도적으로 공력을 화한 것이 아님에도 자연히 몸에 배어난 기질이 범상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때 무림맹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자네들을 이곳까지 부른 이유는 공적을 치하하고자 해서네.”
거두절미하고, 그는 곧장 목적을 밝혔다.
“둘은 급조된 별동대를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시간에 본 맹의 삼단사대에 비견이 될 만한 공적을 세웠더군.”
순간 몇몇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협위대주와 파마대주를 제외한 삼단사대의 단주와 대주들이었다.
오랜 세월 맹을 지탱해 온 자신들의 부대가 고작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신설 부대에 따라잡힌 것이 못마땅한 것이리라.
하나 무림맹주는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옥기린을 봤다.
휘어진 눈썹 아래 자리한 투명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가 그를 담아냈다.
“천정대주.”
무림맹주는 일부러 도호나 별호 대신에 직책으로서, 호칭을 달리했다.
마치 모두에게 천정대주라는 직책을 각인시키는 것처럼.
“원하는 보상이 있는가?”
맹주의 말에 옥기린이 다소곳이 읍을 취했다.
절제된 예를 표한 옥기린이 맹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보상은 빈도가 아니라, 천정대원들에게 내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옥기린의 대답에 무림맹주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흐음, 그게 무슨 말인가?”
“빈도는 한 것이 없습니다. 천정대가 임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천정대원들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하나 그들을 이끈 것은 자네네.”
“그렇기에 더더욱 빈도가 아닌 천정대의 모두에게 그 보상이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옥기린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부족한 제 능력으로 인해서 천정대의 절반가량이 명을 달리하고,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습니다. 한데 어찌 그들이 아닌 빈도가 보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흐음.”
주변에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번 사흑련과의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들의 반응을 보던 옥기린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갤 옆으로 돌렸다.
가만히 서 있는 천휘의 옆태를 본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만약 빈도가 아니라, 천휘 소협이 천정대를 이끌었다면 모두 무사했을 겁니다.”
탁자에 앉은 이들이 살짝 놀란 눈빛으로 옥기린을 바라봤다.
옥기린이라 하면 천하 삼대 기재로 십여 년 전부터 후대에 천하제일을 다툴 인재로 꾸준히 꼽히던 자였다.
그런데 자신을 낮추고, 옆의 천휘를 자신보다 우위에 두며 말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인이란 호승심이 강한 만큼 강해지는 부류의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의 발언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겸손인가?’
‘아니면 매화신협이 무위만 아니라 통솔력도 압도적이라는 뜻?’
‘매화신협이 그 정도였던가.’
탁자에 앉은 이들이 속으로 이 상황에 대해서 각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해서, 임무를 수행하며 고생한 천정대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지급하고 싶습니다.”
옥기린이 힘을 주어서, 말했다.
“천정대 모두에게라…….”
무림맹주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기를 잠시.
“모두 어떻게 생각하오?”
그는 시선을 돌려 탁자에 앉은 이들에게 물었다.
옥기린이 원하는 대로 해 주려면 안건이 상당히 복잡해지는 상황이었다.
사망자가 많다지만, 천정대는 그 수가 많은 부대였다. 그들 모두에게 보상을 내린다면 꽤 큰 지출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미타불. 좋다고 생각하오이다.”
“천정대주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좋은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긍정의 대답만이 들렸다.
아무리 지출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정의를 내세우는 정파였다.
수하에게 공을 치하하려는 옥기린의 모습에 어찌 반대할 수 있겠나.
무림맹주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천정대에 보상을 내리겠네.”
“감사합니다.”
옥기린이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
“하나 수가 많다 보니, 큰 보상을 바라는 것은 어려울 걸세.”
무림맹주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예상한 바였기에, 옥기린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주는 수긍하는 옥기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선을 돌려 그 옆을 바라봤다.
천휘가 하품을 하며 서 있었다.
옥기린과 무림맹주의 대화는 듣지도 않았다는 듯 무료한 표정이었다.
“멸절대주는 원하는 보상이 있나?”
“원하는 보상이라…….”
물음에 길게 내뱉던 하품을 끊은 천휘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같은 도사건만 절제된 예를 취하던 옥기린과 달리 자유분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천휘를 모르는 이들은 의외라는 눈빛을 띠었다.
강호에 알려진 매화신협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대협객이었다.
한데 지금 그의 모습은 강호의 소문과는 조금 괴리감이 있어 보였다.
그때였다.
돌연 턱 쓰다듬는 것을 멈춘 천휘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비치며 입을 달싹였다.
“이곳에 있는 분들과 비무를 하고 싶네요.”
“지금 무어라…….”
“비무라고?”
순간 탁자에 앉아 있던 이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천휘를 봤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하나 천휘를 아는 몇몇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런 천휘를 바라봤다.
“저놈이 또 재밌는 소릴 하는군.”
개방주 용주개가 씩 웃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놈이었다.
“소협과 비무라…….”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군.”
거기다 협위대주와 파마대주는 오히려 천휘와의 비무를 반기며 나서고 싶어 했다.
“하하하!”
돌연 무림맹주가 호쾌하게 웃었다.
“자네는 정말 비무를 좋아하는군.”
갑작스러운 맹주의 웃음에 탁자에 있던 이들이 의외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
이전에도 그랬고, 다시 등장한 이후로도 이렇게 신난 듯 웃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내 무림맹주가 웃음을 만면에 머금은 채, 천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전에는 내게도 비무를 요청하더니 말일세.”
“……!”
“그게 무슨!”
의아해하던 이들이 이번엔 경악했다. 무림맹주는 오직 칼 하나로 무림맹의 맹주가 된 절대고수였다.
그런 그에게 비무라니.
천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고수들과 직접 비무를 해 보겠어요?”
천휘의 시선이 사방을 훑었다.
은은한 투기가 아른거리는 눈이 탁자에 앉은 이들을 담아내기 바빴다.
그 눈빛에 몇몇이 긴장할 무렵.
“그것도 그렇군.”
무림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휘가 왜 그러는지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무인은 무에 살고, 무에 죽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고수와 손속을 나눈다는 것은 축복이나 진배없었다.
“하나 그 대답은 내가 아니라 저들에게 받아야 할 것일세.”
무림맹주가 시선을 돌렸다.
탁자에 앉은 이들은 무림맹주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썹을 찡그렸다.
어느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한참이나 어린 후배가 전쟁 중에 얻은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들과의 비무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이다.
“저는 좋습니다.”
“나야말로 원하네, 소협.”
그때, 협위대주와 파마대주가 답했다.
둘은 천휘와 같이 눈동자에 투기를 흘리면서, 천휘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수와의 비무였다.
어찌 그것을 놓치랴.
“하핫! 둘이 그런 반응을 보이니 참 흥미롭군! 그렇다면 나도 비무를 받아들이지!”
그 둘의 반응에 흥미를 느낀 사신대주 또한 받아들이겠다며 대답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조용했다.
그들은 일개 문도가 아니었다. 각 문파에서 명망과 위치가 높은 자들이었고, 그들에 비하면 천휘는 그 배분이 매우 낮았다.
‘잃을 게 많은 비무다.’
‘패배하면 본 파에 누가 된다.’
아무리 천휘가 지금 이름을 떨치는 유명한 고수라 하여도 패배하게 되면, 후폭풍이 작지 않을 게 뻔했다.
그리고 대부분 패배를 상정했다.
배분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나, 매화신협이 누구인가.
무려 녹림대제와 농질 그리고 불사천교주 등 한 명, 한 명이 경천동지할 고수들을 쓰러뜨린 인물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천휘를 상대로 필시 이길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망설이는 그들을 본 무림맹주가 입을 뗐다.
“아쉽게도 모두 자네의 비무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군.”
“겨우 비무인데, 참 겁이 많네요.”
천휘는 신랄하게 말했다.
그 말에 몇몇이 발끈했으나, 그들은 그 감정을 속으로 삭였다.
결국 비무를 거부한 건 자신들이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야 잃을 것이 있기 때문이지 않겠나.”
무림맹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그들의 속내를 훤히 읽은 것만 같은 말에 몇몇 이들이 뜨끔할 때.
“다른 원하는 것은 없나?”
무림맹주가 다시 물었다.
“쩝, 비무가 안 되면 전에 갔던 비천서고에 다시 들어가고 싶네요.”
“비천서고라…… 좋네.”
무림맹주가 시원하게 말했다.
그러다 옆의 옥기린을 응시하며 입을 뗐다.
“천정대주도 들어가겠는가?”
옥기린의 눈이 커졌다.
“하나 이미 보상은…….”
“걱정하지 말게. 이 정도는 내 권한으로 가능하니.”
무림맹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예까지 불러 놓고, 빈손으로 가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겠나?”
말과 함께 그의 시선이 탁자에 앉아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그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옥기린이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빈도에게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려 할 때.
“그럼 멸절대에도 보상을 주겠네요.”
천휘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천정대보다 인원도 적은데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그걸 놓치지 않는군.”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야죠.”
“아주 좋은 마음가짐일세.”
웃던 무림맹주가 안광을 빛냈다.
직후 그가 옆으로 고갤 돌리며 말했다.
“군사.”
물끄러미 서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군사 제갈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준비해 두겠습니다.”
* * *
천휘와 옥기린이 계단을 내려왔다.
“멸절대와 천정대가 맹의 삼단사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군요.”
함께 걷던 설검이 말을 꺼냈다.
독대해서 공적을 치하해도 될 일이었으나, 무림맹주는 굳이 무림맹의 중추들을 모았고 그들의 앞에서 논공행상하였다.
보기에는 공적을 치하할 때 모두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것 같았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다.
모두의 의견을 들을 작정이었다면 전번에 천휘의 공적을 치하할 때도 그들을 불러야 하지 않았겠는가.
‘아마도 천휘 소협과 옥기린 그리고 둘이 이끄는 멸절대와 천정대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것이겠지.’
섭선으로 입을 가린 설검의 눈동자가 일순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마치 여우와도 같은 눈이었다.
‘왜 그러는지 의도는 모르겠지만.’
설검이 섭선을 탁 하고, 소리 나게 접었다.
‘내게는 좋은 기회다.’
눈썹이 휘황찬란하게 휘어졌다.
별동대의 이름이 드높아질수록, 그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 그의 영향도 커질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옥기린이 읍을 취했다.
내각을 빠져나온 순간이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소협.”
“잘 가요.”
인사에 천휘가 담담하게 답했다.
“후에 찾아가겠습니다.”
“귀찮은데…… 뭐,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제 말을 안 들을 것 같은데.”
“하하하.”
천휘의 말에 옥기린이 들켰다는 듯 웃더니, 설검을 보며 읍을 취했다.
“부군사도 다음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옥기린이 곧장 떠나고.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소협.”
설검이 천휘를 향해 말했다.
싱긋 웃음을 지은 채였다.
“나중에 전할 일이 생기면 찾아가겠습니다. 혹, 필요한 것이 생기면 언제든 찾아 주십시오.”
“그러죠.”
설검마저 떠나고, 덩그러니 남게 된 천휘는 주변을 바라봤다.
많은 이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마주한 천휘는 내공을 끌어올리며, 단숨에 땅을 박찼다.
휘이익―
가공할 속도에 천휘가 바라보는 풍경이 일그러지며, 길게 늘어져 갔다.
석양이 끝없이 길어진 것처럼 보였다.
극성의 비천행보가 보인 결과였다.
얼마 안 가서 천휘의 눈에 익숙한 멸절대의 전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응?”
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전각의 내부에서 강렬한 기운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기감을 간질였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천휘의 발이 멈췄다.
전각의 대문 앞에서였다.
“대주님!”
“사숙님!”
대문 앞에 있던 멸절대원들과 화산의 제자들이 신기루처럼 등장한 천휘에 놀라며 눈을 크게 뜰 때.
“사제!”
천향이 재빠르게 달려왔다.
상당히 다급한 표정으로였다.
“사제를 찾아온 손님이 있어.”
“알고 있어요.”
천휘는 나직이 대답하면서, 지체 없이 바로 전각의 안으로 움직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천휘는 그대로 천향을 지나쳐서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 손님이 있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대한 방 안의 의자에 앉아서, 차를 홀짝이는 새하얀 백발 백미의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상당히 낡은 천을 여러 번 덧댄 해진 도복을 입고 있는 행색이었는데, 천휘에게는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그 말에 노인, 종남검성 고현이 고개를 돌리며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