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38화 (338/391)

338화

“고생했어, 적양.”

나직이 말한 주월향은 멀찍이서 일어나는 먼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열 대의 마차와 백 필의 말.

위적양을 비롯해 하오문도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닌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그것들을 모두 모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멸절대와 천정대는 부상자들을 마차에 태우고, 상태가 좋은 자들은 말을 탄 채 그대로 떠났다.

조금의 시간도 두지 않고, 바로.

“이 전쟁이 어느 쪽의 승리로 끝이 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 뒤에 매화신협이라는 별호가 천하에 진동하는 결과를 낳을 거야.”

주월향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짧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기녀로서 많은 이들을 만나 봤고 그중에는 고수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많은 이들 중에서도 매화신협, 그는 특별했다.

“곧 천하가 그를 주목하겠지. 지금도 그렇지만…… 더더욱.”

주월향이 턱을 치켜들었다.

아직 복구되지 못한 부서진 지붕 사이로 창대하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문주님께 매화신협을 천(天) 급의 인물로 취급해야 한다고 전해 줘.”

“……!”

위적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주 놀라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천 급!

하오문이 특별한 인물에게만 매기는 등급으로, 그 일거수일투족에 천하가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되는 특별한 인물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지부장님께서 보시기에는 매화신협이 구주삼패세의 주인들과 동격의 수준인 겁니까?”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주월향이 뒷말을 삼켰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위적양이 바로 몸을 돌렸다.

“문주님께 연통을 보내겠습니다.”

한편 그들의 바로 밑층.

활짝 열린 창문에 붙은 청화와 홍화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마차와 말들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기를 잠시, 둘이 입을 뗐다.

“가셨어요.”

“가셨구나.”

둘의 목소리가 겹쳤다.

애절하고, 슬픈 목소리였다.

봄날의 꿈만 같은 만남이었다.

짧지만, 강렬한…….

그렇기에 잊을 수 없는 만남.

물끄러미 밖을 보던 둘은 불현듯 고개를 돌려,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동시에 마주친 두 눈.

“아름다운 꿈이었어.”

“하지만 이제 깨어나야죠.”

“그래야겠지. 결국은…….”

“꿈이니까요.”

서로를 바라본 채 대화하던 둘은 미소를 짓더니, 창문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각각 금과 소를 꺼내 들었다.

곧 홍화의 붉은 입술이 소에 맞닿았고, 청량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직후 옆의 청화가 곧게 뻗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희고 긴 손가락이 현을 뜯었다.

낮고, 높은 두 음은 상당히 조화로웠다.

띠디딩―

음률이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화음이 창문 밖으로 흘러나가며, 부드러운 진동을 일으켰다.

그렇게 한참 연주하던 둘은 자연스럽게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둘은 누구보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꿈을 파는 자들이었기에.

곧 천휘가 했던 연주와도 같이 그녀들의 손과 입술에 공력이 실리면서, 곧 음공의 파동이 뻗어 나갔다.

하나 천휘의 연주와는 조금 달랐다.

세세한 내공의 운용 대신 그녀들은 연주에 감정을 담아냈다.

아직도 여운이 남은 감정을…….

그리고 그것은 떠나간 천휘에게 전하는 작별 인사와도 같은 연주였다.

“어디서 이런 연주가?”

“아아.”

화천루 근방을 지나가던 이들은 홀린 듯 발을 멈추고, 귀를 열었다.

몇몇 이들은 놀라운 탄주에 감탄했고, 몇몇 이들은 연주에 실린 감정에 동화되어 눈물을 글썽였다.

삽시간에 무혈이 고요해졌다.

거리에는 오직 연주되는 악기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무혈의 거리를 감싼 연주는 옅은 바람을 타고 천하에 알리듯 점점 그 음을 퍼트려 갔다.

“음?”

마차에 타고 있던 천휘는 귀를 간질이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귀를 두드리며 들려오는 것은 덜컹거리는 수레바퀴 소리와 거친 말발굽 소리뿐이었다.

“뭘 잘못 들었나.”

귀를 가볍게 후벼 판 천휘는 곧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컥! 윽! 켁! 악!”

그러자 곧장 마차가 덜컹거리며, 바로 정면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맞은편에 있는 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전신에 붕대를 감싼 남자였는데 그나마 보이는 얼굴은 멍투성이였다.

찬찬히 사내의 눈과 뺨을 물들인 피멍을 보던 천휘가 입을 달싹였다.

“너무 시끄럽네요.”

“윽, 대주. 나도 조용히 하고 싶네만 마차가 너무 덜컹거리지 않나.”

사내, 호광개가 어깻죽지를 잡으면서 호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마다 아파 죽을 것 같네.”

“흠, 그 정도로 아픈가요? 제가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데.”

“허어, 지금 대주 눈에는 이 모습이 멀쩡해 보인다는 게요?”

호광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내비치며 말했다.

“대주도 보지 않았는가. 어깨에는 구멍이 뚫렸고, 멀쩡해 보이는 전신도 타박상투성이요, 이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

그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최대한 불쌍한 모습으로였다.

하지만.

“그 정도면 멀쩡한 것 같은데.”

천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팔이나 발이 잘린 것도 아니고 말이죠. 고작 어깨에 구멍 좀 난 것 가지고, 엄살은.”

“어, 엄살이라니…….”

호광개가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에라도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고 싶었지만, 다른 마차에서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처절한 신음을 듣고 있자니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죠. 소리 내는 것을 못 참는다면 억지로 막는 수밖에.”

“억지로 막는다니 무슨…….”

대답 대신 천휘가 검지를 들었다.

그 행동에 호광개가 식겁했다.

억지로 막겠다는 말도 불길했지만,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순간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입을 다물겠…….”

호광개가 다급히 말하려던 그때.

푹!

지풍이 쏘아지며, 아혈을 짚었다.

“……!”

놀란 호광개가 입을 뻐끔거렸으나 더 들리는 말은 없었다.

“이제 좀 조용하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검지를 그대로 내리는 순간.

“음?”

천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을 못 하게 되니 호광개가 손짓, 발짓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음, 마혈도 짚어야 하나.”

중얼거린 천휘가 검지를 다시 들려는 찰나.

휙― 휙―

호광개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 재빨리 다소곳이 양손을 모으더니 무릎 위에 올리고 가만히 자세를 바로 했다.

물론 얼굴은 일그러진 채였다.

호광개가 잠잠해진 것을 본 천휘는 피식 웃으며, 연통을 꺼내 들었다.

무림맹에서 온 것이었다.

― 종남검성, 무림맹 입성.

― 사흑련, 불망단(不忘團) 후퇴.

― 종남오검 모두 사망. 흉수는 십야문주의 암검(暗劍)으로 추정.

― 귀원신궁주 출도. 목적은 불명.

연통에는 굵직한 정보들이 짧게 적혀 있었다.

‘검성이 왔네.’

빠르게 훑어본 천휘는 가장 맨 위에 적혀 있는 정보에 시선을 주었다.

‘그동안 두문불출하더니.’

천휘가 가만히 생각하며 턱을 매만졌다.

종남검성은 화산과 종남의 합동 작전 이후로 그 종적이 묘연했었다.

‘잠시 뭔 일이 있었나 보지.’

하나 그마저도 대충 넘긴 천휘는 다시금 연통을 살펴보며 담긴 정보들을 머리에 담았다.

평화로운 고요함 속.

어느새 관도에 들어선 마차와 준마들은 더없이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그들의 목적지, 무림맹을 향해서.

* * *

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췄다.

뒤늦은 진동이 마차 내부에 퍼지며 천휘의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높이 치솟은 새하얀 성벽.

마침내 무림맹에 복귀한 것이다.

채앵!

수문 무사들이 창을 교차했다.

그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천정대와 멸절대의 표식을 본 순간, 그들은 바로 성문을 열어젖혔다.

쿠구구궁―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안.

불현듯 열린 문에 성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고요했다.

그들은 그저 가만히 선 채로 무림맹에 복귀한 마차와 말을 향해서 두 손을 곱게 모아 포권을 취할 뿐이었다.

조용한 환대.

그것이 전쟁 중 그들이 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인사였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면서, 마차와 말들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멸절대와 천정대는 자신들을 향해서 포권을 취하는 이들에게 눈으로 인사를 하며 어깨와 가슴을 폈다.

계속해서 나아간 끝에, 곧 그들은 한 곳에 도달했다.

무림맹의 내각(內閣) 입구였다.

“도착했네.”

마차가 멈춘 것을 확인한 천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읍! 읍!”

아혈을 짚인 호광개가 버둥거렸다.

“아, 잠깐 잊고 있었네요.”

천휘가 그 의미를 눈치채고 그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큭!”

호광개가 바로 신음을 뱉었다.

아혈을 풀어 달라고 다급하게 움직이면서 통증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잠시.

“조심…… 히 갔다 오쇼. 대주.”

천휘는 아픈 와중에도 인사하는 호광개를 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직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소도장.”

앞에 옥기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천휘는 그런 옥기린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서, 맹주전을 올려다봤다.

그때.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소협.”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서 한 청년이 다가왔다.

설검이었다.

평소와 같이 화려한 섭선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으나, 그 너머로 그의 환한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아! 옥기린 소협도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뒤늦게 옥기린을 본 그가 아주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평소보다 다소 과장된 태도였다.

“무량수불. 반갑소이다, 부군사.”

그러나 옥기린은 그러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포권을 취하며 정중히 답했다.

설검이 그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시지요.”

그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렸다.

살짝 고양된 목소리를 흘리면서.

“맹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휘와 옥기린은 설검과 나란히 무림맹의 내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스윽―

내각의 입구를 지키던 수문 무사들은 다가오는 셋을 보더니 짧게 묵례한 뒤, 어떠한 절차도 없이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응?’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던 천휘는 찌르는 듯한 눈길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수문 무사들이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주 익숙한 눈빛이었다.

호기심과 동경 그리고 감탄.

매화신협이라는 별호가 퍼지고 나서부터 자주 받아 온 눈빛이었다.

“천휘 소협께서는 여전히 많은 분의 관심을 받으시는군요.”

별거 아닌 일에 천휘가 다시 시선을 돌릴 때, 설검이 옆에서 흥얼거리듯 말했다.

지금 그는 기분이 좋았다.

현 무림맹에서 가장 큰 명성을 떨치는 자는 다름 아닌 천휘였다.

그리고 그는 천휘와 멸절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그의 입술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무림맹과 사흑련의 전쟁을 시작으로 강호는 변화를 추구하게 될 터.

과거의 잔재가 사라지고 신흥 강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설검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을 뱉는 천휘의 옆얼굴을 본 그가 씩 웃었다.

저벅, 저벅.

설검의 안내로 셋은 함께 내각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이윽고 셋은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계단이 끝난 내각의 최상층에 이르렀다.

정면에는 굳게 닫힌 문이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 문이었다.

‘응?’

문을 보던 천휘가 눈을 반개했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기척도 있네.’

그때 설검이 문에 다가갔다.

“매화신협과 옥기린을 모셔 왔습니다.”

나지막한 말을 속닥이자.

“들어오게.”

담담한 대답이 들려왔다.

설검은 그 대답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리고는 천휘, 옥기린과 짧게 눈을 맞추었다.

그 뒤 그는 바로 문을 열었다.

휘이이―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봄바람 특유의 시원한 바람이 천휘와 옥기린의 머리카락을 쓸어 갔다.

이어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사방이 뚫린 방.

그 중앙에 놓인 탁자에 앉아 있는 스무 명의 인물들을.

그들은 현 무림맹의 중추.

구파일방에서 맹에 보낸 고수들과 삼단사대의 단주, 대주들이었다.

“저 아해가 매화신협…….”

“무당의…… 옥기린인가?”

“…….”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는 그들의 시선이 셋에게 쏠리는 그때.

“왔는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석에서였다.

의자에 앉은 무림맹주는 사방에서 부는 바람과 동떨어진 듯 흔들림 하나 없이 둘을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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