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37화 (337/391)

337화

“……아미파에 갔던 혈영대와 귀영대는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습니다. 도망친 수는 극소수…….”

고요한 대전에 사뇌복룡의 무미건조한 보고가 메아리치며 울렸다.

“……그리고 방금 전 풍리와 흑괴단주가 죽었으며, 흑괴단의 일부가 아예 부대에서 이탈해 도망쳤다는 급보가 지급으로 날아왔습니다.”

최근 얻은 급보를 사뇌복룡이 읊자, 가뜩이나 가라앉아 있던 대전에 더욱 싸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스윽―

눈썹을 꿈틀거린 백운이 탁자에 올렸던 두 발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뭐? 지금 풍리가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사뇌복룡의 대답을 들은 백운이 탁자를 두드리며, 호쾌하게 웃었다.

“이야. 세상 말세네, 말세야. 명줄 하나만은 끈질긴 그놈이 죽다니.”

그렇게 웃던 백운이 돌연 허리에 있는 술병을 집어, 입에 들이부었다.

꿀꺽, 꿀꺽.

단번에 술을 다 마신 그는 빈 술병을 뒤로 휙 던지며, 입을 뗐다.

“크! 해서, 누가 그놈을 죽였는데? 무림맹의 고수야? 설마 이번에도 매화신협이니, 뭐니 그놈은 아니겠지?”

“아직 흉수의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뭐, 파악 못 해?”

백운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엉망진창이네. 전쟁통에 정보를 파악하는 것도 이렇게 늦고 말이야. 이러니까 무림맹에 밀려나는…….”

술에 취한 듯 백운이 신랄하게 말하고 있을 때.

“재미있군.”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만히 턱을 괸 채 사뇌복룡의 보고를 듣던 사흑련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공포로 천하에서 군림하던 사흑련이 참으로 꼴사납게 됐어.”

“…….”

백운이 못마땅하단 얼굴로 입을 다물자, 대전에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긴장한 것이 분명한 그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사흑련주는 계속해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쪽 입꼬리가 뒤틀려 있는.

조소였다.

“최근 삼 년 정도인 것 같군. 그 시간에 건재할 것 같던 육황문은 오황문이 되었고, 칠요선은 오요선이 되었단 말이지. 거기에다 영생을 살 것 같던 불사천교주까지 명을 달리할 줄 천하의 누가 알았을까.”

사흑련주의 말에 사뇌복룡을 제외한 여섯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입을 떼지 못했다.

말하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흑련주였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에서는 득보다 실이 많군.”

말하던 사흑련주가 눈짓했다.

바로 옆에 선 사뇌복룡을 향해서였다. 그 눈짓을 마주한 사뇌복룡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였다.

사흑련주의 말대로 이번 전쟁에서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컸다.

“전에 남궁세가가 움직인다고 했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원한을 갚기 위해서 만수문을 습격했습니다. 근방에 있던 사파들이 도운다지만, 아마 패배했을 겁니다.”

대답하는 사뇌복룡의 목소리는 패배를 언급하는 것치고는 무심했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남궁세가는 팔대세가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명문 세가였다.

아무리 만수문과 근방의 사파가 돕는다 한들, 그 차이는 현격했다.

“비천회도 참전하는 모양새로군.”

“그렇습니다.”

“흥미롭군. 균형을 맞추던 구주삼패세가 전부 움직이는 상황이라…….”

사흑련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군사가 보기에는 어떤가?”

사흑련주가 여전히 웃음을 띤 채로 사뇌복룡만을 주시한 채, 물었다.

주변에 앉은 여섯 명의 고수는 거의 없는 듯 취급하면서였다.

“이 전쟁이 어떻게 될 것 같나?”

“본 련의 승산은 육 할입니다.”

사뇌복룡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의외로군. 지금 본 련은 무림맹에게 밀리고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뇌복룡이 사흑련주를 응시했다.

찬란한 눈빛을 띠면서였다.

“련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사흑련주가 입매를 비틀었다.

“본좌를 너무 띄워 주는군.”

“사실일 뿐입니다.”

사뇌복룡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만일 비천회가 끼어든다면 승산은 채 일 할도 안 될 겁니다.”

“허어, 과한 말이군.”

“너무 낮은 것 아닌가요?”

“일 할 이하라고?”

사방에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이 사뇌복룡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발끈하였으나.

“이유는?”

사흑련주는 그런 반응들에는 신경도 안 썼다.

그저 사뇌복룡에게 물을 뿐이었다.

“비천회가 무림맹과 척을 졌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정파입니다.”

그 말로 끝이었다.

모두 조용해졌다.

단번에 이해한 것이다.

정파와 사파, 이 둘의 갈등은 수십 년이 아닌 천 년을 넘은 관계였다.

“내 생각과 일치하는군.”

사흑련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비천회가 참전한다면, 무림맹보다는 우리를 공격하려 들겠지.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오랜 원한이 묵혀 있으니.”

중얼거리며 눈을 반개한 사흑련주가 검지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툭, 툭.

짧게 끊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내 그가 다시 입을 달싹였다.

“그렇다면 군사가 보기에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나?”

사흑련주의 물음에 사뇌복룡이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눈을 빛냈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비천회가 참전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 * *

“크으, 술맛 좋네.”

주월향은 옆에서 청화와 홍화가 따라 주는 술을 거침없이 마시는 청년을 보며, 좁혀지는 미간을 펴기 위해 노력했다.

정면에 있는 청년은 두 여인이 따라 주는 술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마시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릇에 담겨 있는 고기까지 음미하듯 먹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너무나도 익숙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아마 청년은 지금 그녀가 가진 감상처럼 남들 또한 그렇게 보기를 노리고 이러는 것일 터였다.

‘정말 무서운 자야.’

주월향이 몸서리를 쳤다.

이미 그녀의 피부에는 닭살이 돋아나 있었다.

오한이 전신을 삼킨 탓이었다.

앞의 청년은 두려울 만큼 철두철미한 자였다.

그렇게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의 어느 누가 생각하겠는가.

화산파의 도사이자 현 강호에서 혁혁한 공을 쌓고 있는 매화신협이 기루에 들어와서 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고, 육식을 할 것이라고.

‘아무리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라지만 설마 화산파의 도사라는 자가 술과 육식을 즐기는 듯 보이도록 행동할 줄은…….’

그녀의 목울대가 크게 움찔거렸다.

예로부터 도사는 술과 육식을 금해 왔었다.

그것이 도가의 법이며, 규율이니.

그런데 앞의 매화신협은 그 도가의 규율을 완전히 깨고 있었다.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가 매화신협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한 그녀조차, 지금의 모습을 보며 순간 자신이 잘못 짚은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까.

‘목적을 위해서라면 도가의 규율조차 깨는 인물…….’

그녀의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상대는 그저 그런 자가 아니었다.

그녀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는가.

풍리와 흑괴단을 어려움 없이 상대하며 드러낸,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 같던 무위.

천휘를 주시하던 주월향이 이내 눈을 한 번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마음을 다스리면서였다.

그 덕분일까.

긴장감을 조금 가라앉힌 그녀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직후 맞은편의 천휘 쪽을 향해서 두 손을 공손히 모은 뒤 고개를 숙였다.

오랜 세월 기녀로서 살아온 그녀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공손한 예였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본 홍화와 청화는 곧바로 심상치 않은 일임을 인지하고는, 그 자리에서 뒤로 빠졌다.

두 여인이 방을 빠져나가자.

“소녀의 부름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주월향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과 음식을 즐기던 천휘는 주월향의 말에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무심함이 느껴지는 눈빛으로였다.

이미 주월향이 자신을 불렀을 때부터 어떠한 의도가 있음을 알아챈 천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흘이나 지나지 않았나.

그동안 언제든 부를 수 있었음에도 지금에야 불렀다는 것은 무언가를 알아낸 후에 자신을 불렀음이 분명했다.

‘내 정체야, 이미 알아냈을 테고.’

당연한 일이었다.

하오문은 개방에 비견되는 정보 문파이지 않은가.

아마 옥기린과 천정대와 같이 복귀하는 순간, 어느 정도 눈치챘으리라.

사흘이란 시간은 확신을 더하는 시간이었겠지.

‘그런데 이제 와서 날 불렀다는 것은 뭔가를 하겠다는 건데…….’

천휘가 고개를 숙인 주월향의 뒤통수를 응시하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불렀죠?”

주월향이 순간 움찔했다.

그래도 예를 차려 인사를 건넸으니, 오고 가는 말이 조금은 있을 줄 알았건만, 단도직입적이었다.

“은혜를 갚고자 걸음을 요청드렸습니다.”

주월향이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대협의 수하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본 루의 기녀들이 목숨을 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불렀다, 이거죠?”

“그렇…….”

“그런데 좀…… 아니, 많이 이상하네요. 은혜를 갚고 싶다면서 왜 구해 준 사람들 다 부르지 않고, 나만 부른 건지…… 참 이상해.”

천휘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거 아나 모르겠네요. 제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건데.”

순간 주월향이 흠칫했다.

귓속을 관통해 뇌리에 직접 전해지는 무덤덤한 목소리는 그녀의 안색을 새하얗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어 뒤늦게 뒤통수에 닿는 따가운 시선을 느낀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오늘 대협을 뵙고자 한 것은 혹여나 오해가 생겼을까 싶어, 설명을 드리고자 귀한 걸음을 부탁드렸습니다.”

다급하게 말을 쏟아 낸 그녀는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추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대협께서도 아시다시피 예전부터 본 문은 마땅한 값만 치러 준다면, 의뢰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고 정보를 파는 곳입니다. 정파와 사파, 새외 어디든 가리지 않지요.”

천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난 또 뭐라고.’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된 것이다.

“즉 하오문은 풍리와 흑괴단, 아니 사흑련과는 그저 거래만 하는 관계였다. 이 말을 하고 싶나 보죠?”

주월향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말이었다.

하오문은 중립의 문파였다.

그런데 혹여나 이번 일로 무림맹에서 하오문이 사흑련에 소속됐다거나, 그들과 손을 잡았다고 판단하게 되면 곤란해질 따름이었다.

해서,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흠,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천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만약 사흑련과 손을 잡았다면, 애초에 대협께 그들이 며칠에 한 번씩 온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을 겁니다.”

주월향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물음에 대답했다.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천휘가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네요.”

대답을 들은 주월향이 안도했다.

대화는 전에 계획해 둔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

천휘의 긍정에 그녀가 다행이라 생각할 때.

“하지만 그건 네가 노린 거잖아.”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리와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

조소가 담긴 천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놀라 눈을 크게 뜬 주월향이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떨리는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가 모르쇠로 넘어가려는 찰나.

“고수의 기감은 넓어. 이 누각 모두가 내 손에 있는 것처럼 말이야.”

천휘가 눈을 반개하며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흡……!”

눈을 마주한 주월향이 헛숨을 삼켰다.

아주 차갑고, 투명한 눈빛이었다.

분명 문이 다 닫힌 실내였으나, 그 눈을 마주한 주월향은 북풍한설이 덮쳐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적양과 한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소리…….’

그녀가 식겁할 무렵.

“다 잊어 줄 테니, 말과 마차를 준비해 놔. 이곳에 상단도 많으니 그 정도쯤이야 빨리 준비할 수 있지?”

천휘는 그대로 굳어 버린 그녀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주월향의 눈이 살짝 떨렸다.

하오문의 지부장인 그녀는 감정이 심히 요동치는 상황에서도 지금 천휘가 하는 말의 의미를 곧장 알아챘다.

이건 거래였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마차 열 대에 말 백 필.”

“……!”

주월향의 눈이 부릅떠졌다.

상당한 양이었다.

확실히 준비하려면 준비할 수 있었지만, 돈이 꽤 드는 일이었다.

“왜? 뭐가 부족해?”

“저, 돈이…….”

우물쭈물하는 주월향을 본 천휘가 미간을 좁히면서, 입을 달싹였다.

“돈이 부족하다고?”

“죄송합니다. 망가진 화천루를 복구하다 보니, 최근 지출이 많아서…….”

천휘가 턱을 쓰다듬었다.

“돈만 있으면 돼?”

“그, 그렇습니다.”

“그럼 하루 만에 구할 수 있어?”

주월향이 고개를 주억였다.

주변에 있는 상인들과 촌락을 뒤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내 정보 팔아.”

“……!”

주월향의 눈이 번쩍 뜨였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조금 불안해하며 물은 말에 천휘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감사합니다.”

주월향이 다시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매화신협이 이곳에 방문했다는 사실과 이곳에서 보인 무위는 아직 현 강호에서 알려지지 않은 정보로 어떠한 것보다 비싼 것임이 분명했다.

곧 지급할 말과 마차.

그것들의 값을 모두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로.

“그럼 오늘 내에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녀가 말과 하며 일어나려다 멈칫하더니, 곧 천휘를 향해 입을 뗐다.

“대협께서 배려해 주셔서 셈이 남습니다. 후에 남은 값을 제대로 치를 테니, 본 문에 들러 주십시오.”

천휘가 피식 웃었다.

그 의도가 눈에 뻔히 보였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과 인연을 만들어 볼 요량이었다.

“나중에 정보가 필요하면요.”

냉기를 지우고 그녀에게 툭 던지듯 가볍게 말한 천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꿈결과도 같았다.

주월향은 천휘가 떠난 자리를 가만히 보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적양! 한시가 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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