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포박한 사파 무리를 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먼지가 일며, 인마가 멀어졌다.
그들이 저 멀리 있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아직까지 남아 있던 긴장감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이어 안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다행이군. 혹여나 싸우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어.”
몇몇 이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그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파 무리와 격전을 벌이느라,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천정대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고, 멸절대는 압도적인 신위를 보이긴 했으나 제압이 끝나자 급하게 이동한 여파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절반가량의 사상자가 나왔을 뿐 아니라 그나마 멀쩡한 이들마저 공력을 소모해서,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아마 남궁세가와 격전을 벌이게 됐다면 승산은 매우 낮았으리라.
긴장의 끈이 끊어진 멸절대와 천정대는 힘이 탁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과연 남궁세가인가. 한 명, 한 명의 기세가 대단하더군.”
“소문으로 듣던 그대로였어.”
멸절대와 천정대는 남궁세가 무인들이 뿜어내던 기세를 되새겨 봤다.
서로 볼일이 없던 탓에 대부분이 그들을 처음 본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금 충격적이기도 했다.
은연중에 아무리 팔대세가라 할지라도 구파일방보다는 한 끗발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남궁세가가 흘리는 공력은 범상치 않았다.
구파일방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렇게 그들이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풍기던 기세를 떠올리고 있을 때.
“남궁세가와 인연이 있었습니까?”
옥기린이 천휘를 향해서 물었다.
놀람이 섞인 목소리였다.
남궁세가가 어디인가.
팔대세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강호에서 그 위세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명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한 차례 대화를 나눈 후 순순히 물러났다.
천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도통 알 수 없어서 만면에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는 옥기린을 보며, 입을 뗐다.
“조금 있죠.”
툭 던지는 말이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길었다.
그렇기에 핵심만 싹둑 자른 것이다.
“그것보다 일단 무혈로 돌아가죠.”
이어서 천휘가 바로 말을 돌렸다.
“무림맹으로 바로 복귀하기는 그른 것 같으니.”
말과 함께 그는 주변을 훑어봤다.
그 시선을 따라서 같이 주변을 훑던 옥기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끔찍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푸르렀던 냇물은 피로 인해서 온통 붉게 물든 상태였고,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리고 명을 달리한 자들이 널브러져 있는 사이사이, 아직 목숨은 붙어 있지만 가냘픈 신음을 뱉는 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옥기린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지금 쓰러진 이들의 절반은 천정대였기 때문이다.
“…….”
옥기린이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잠시 뒤 멸절대와 천정대는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을 수습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정을 취할 곳, 무혈을 향해서.
* * *
나흘이 흘렀다.
무혈의 거리는 한창 어수선했다.
반파된 화천루의 최상층.
그리고 그곳에서 펼쳐졌었던 경천동지할 싸움 이후 닷새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뇌리에는 아직도 그 장면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살면서 본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에 대한 관심 자체는 오래가지 않았다.
사건이 벌어진 이튿날, 무혈에 백 수십의 무인들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자들이.
“옥기린과 천정대가 왔다며?”
“한데 절반이 부상이라던데.”
“거참, 무섭구먼. 최근 강호에 명성을 떨치는 무림맹의 별동대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설마 무혈에서 무림맹과 사흑련의 싸움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서둘러 빠져나가야겠네.”
화천루에서의 일은 지나간 것이 되어 버렸고, 거리 곳곳마다 별동대를 두고 쑥덕거렸다.
현재 강호는 무림맹과 사흑련의 전쟁으로 크게 들썩이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무림맹이 새로 신설한 별동대, 천정대가 방문한 것이니 이는 그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무혈에 머물던 이들 중 대다수가 썰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다.
“……고요하네요.”
주월향이 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무혈의 거리는 인기척 하나가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난생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 무혈의 거리를 응시하던 그녀가 붉게 칠한 입술을 뗐다.
“적양.”
부름에 위적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정체는 파악했어?”
“몇몇 인물들은 파악했습니다. 문사 복장을 한 자는 청성파의 세류도였습니다. 그리고 의방에서 치료받는 자는 개방의 호광개이며…….”
위적양은 나흘 동안에 파악한 인물들의 정보를 보고했다.
“……당시 펼치던 보법을 보아, 화산파의 매화검수들로 추정됩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파악한 화산파의 매화검수들까지 언급한 순간.
“……예상이 맞았네.”
주월향이 눈을 감았다.
“멸절대였어.”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던 바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 고수는 옥기린과 함께 화천루로 돌아왔으니까.
“그러면 그는 매화신협이겠지?”
위적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게 생각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주월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이곳으로 모셔와.”
“그를 말입니까?”
위적양의 눈이 커졌다.
매화신협은 엄청난 고수였다.
그리고 철저한 자였다.
자신이 화산파의 도사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육식과 술을 할 정도이지 않은가.
위적양으로선 그런 자와 독대하는 것이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괜찮겠습니까?”
위적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어?”
주월향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두려워.”
화천루를 지배하던 존재감을 떠올린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적양도 알잖아? 위험한 인물이라고 해도, 만나야만 한다는 걸.”
말하던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하오문의 지부장인 이상 무섭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곧 결연한 눈빛을 띤 그녀는 떨림을 진정시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여기로 모셔와 줘.”
* * *
나무 내음이 가득한 대전.
수수하기 짝이 없는 대전 내부에 덩그러니 놓인 원형의 탁자에는 일곱 명의 남녀가 둘러앉아 있었다.
“이렇게 모인 것도 오랜만인걸.”
두 발을 탁자 위에 올리며 삐딱하게 앉은 중년인이 입을 달싹였다.
예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의 태도에 대해서 뭐라 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시 여겼다.
왼쪽 귀에 달랑거리는 화려한 귀걸이와 눈에 칠해진 진한 붉은 분칠.
탈혼제 백운.
칠요선을 이끄는 자였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오황문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련주가 무섭긴 한가 봐?”
비웃음이 섞인 백운의 어조에 몇몇 이들이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하지만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당신도 마찬가지지.”
옆에서 두 손을 곱게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곧 길게 드리워진 눈썹이 들리고.
스윽.
새파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카락과 어울리지 않은 아주 새파란 눈동자. 부모 중 색목인이 있는 혼혈인 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전대의 강호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던 여인의 것과 같았다.
청안귀희(靑安鬼姬) 구약(救藥).
귀원신궁의 장로로 과거 사파의 여고수 중 제일 고수를 뽑는다고 하면 무조건 거론되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곱게 모은 손을 유지한 채 눈동자만 백운 쪽으로 움직였다.
나지막한 말을 흘리면서였다.
“안 그래?”
여인의 투명한 시선에 백운이 웃어 젖혔다.
“하하하.”
그렇게 한참을 웃던 백운이 불현듯 웃음을 뚝 그쳤다.
“아주 정곡을 찌르는데.”
말과 함께 차가운 살기가 흘렀다.
순간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 같은 긴장감이 대전 내에 감돌 무렵.
“이래서 오기 싫었거늘.”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운의 맞은편에 앉은 노인.
파암산장의 호법, 송천악(松天惡)은 찌푸려진 눈살로 주변을 훑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무림맹과의 전쟁에서 뭔가 보여 주겠다더니 패배만 겪은 놈들이 말이 많단 말이지.”
그의 시선이 백운을 꿰뚫었다.
“오호라, 그거 내게 하는 말이요?”
백운이 빙그레 웃었다.
하나 송천악을 담아내는 그의 눈동자는 아주 차가운 살기를 흘리며, 뾰족하게 벼려져 있었다.
“네놈만이겠냐.”
송천악이 눈을 옆으로 움직였다.
그 시선에 백발과 백미를 내버려 두듯 기른 노인이 눈을 치켜떴다.
불사천교의 일사자, 귀천사자였다.
“…….”
귀천사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송천악이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기 때문이었다.
“본좌에게 할 말이 있나?”
그가 싸늘하게 말을 뱉었다.
매서운 살기를 쏘아 대면서였다.
이어 감정을 담아낸 듯한 그의 새까만 무복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송천악은 전신을 옥죄어 오는 살기에 눈썹을 움찔하다가, 이내 입을 달싹였다.
“아니, 없네.”
한발 물러선 것이다.
‘이미 기울어 가는 곳이다. 가뜩이나 날이 서 있는데 괜히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을 터.’
아무리 불사천교주가 죽고, 본단이 무너졌다 한들, 불사천교의 그림자 십삼사자들 대부분은 건재했다.
귀천사자가 선선히 물러나는 송천악을 계속 노려보던 그때였다.
“그런데 참 신기하네요.”
그들의 신경전을 즐기듯 콧소리가 들려왔다.
비파를 든 여인의 입에서였다.
“칠요선 중 한 명인 농질과 불사천교주가 목숨을 잃다니.”
그녀는 검지를 턱에 가져다 대며, 요염한 목소리를 흘렸다.
“매화신협이란 아해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인가 봐요.”
그녀의 말에 일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말 그놈 혼자서 한 일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르지.”
송천악이 툭 말을 흘렸다.
“정파라는 것들은 예부터 겉만 반지르르하고, 속은 더러운 족속이니.”
“이제 약관을 넘은 나이라 들었는데, 그런 일을 벌인다? 헛소리지.”
청안귀희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곳에 모인 대부분은 풍문을 믿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모인 이들 전부 농질과 불사천교주를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공력도, 무위도.
그렇기에 풍문을 믿지 않았다.
그러한 와중에 귀천사자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살기를 풍긴 그는 눈이 시뻘겋게 변했는데, 금방이라도 핏물을 흘릴 것 같았다.
‘교주가 패배?’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교주를 잘 알았다.
백 년에 다다른 세월 동안 쌓은 내공도, 공능도…….
그것은 인외의 영역이었다.
‘교주가 숨겨 온 것을 모두 다 끌어낸다면 동귀어진을 할지언정 사흑련주도 상대할 수 있으리라.’
반개한 귀천사자의 붉은 두 눈에 형용할 수 없는 귀화가 타오를 때.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검을 겨뤄 보고 싶군.”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말을 뱉은 차가운 인상의 사내를 보며,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흐음. 우리 사영검군(死影劍君)께서도 관심이 가나 보네요?”
“언제부터 너와 내가 우리였지?”
십야문의 사영검군이 차갑게 말했다. 싸늘한 눈빛을 흘리면서였다.
“처음부터 아니겠어요?”
“처음?”
짜증이 난 듯 눈살을 찌푸리는 사영검군의 모습에 여인이 씩 웃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재밌어하는 듯했다.
“같은 사흑련이잖아요. 그러니…….”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사영검군이 불쾌함을 드러내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색기나 치우고 그 말을 지껄여라. 색녀.”
“아이고, 무서워라.”
여인, 음현신녀(音現神女)가 겁을 먹은 척 일부러 몸을 떨며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는 그때.
“한데 련주는 언제 오지?”
여태 가만히 있던 일월문의 장로, 사도신권(死刀神拳)이 입을 뗐다.
그의 눈빛은 아주 매서웠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안 그래도 일월문은 신창양가와의 전쟁으로 손해가 막심한 상태였다.
그런데 거기에 무림맹과의 전쟁까지 겪다 보니, 현재 일월문은 그 재정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거야 련주 마음이겠지.”
백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느새 뒤통수에 두 팔을 올린 그는 하품을 내뱉으며, 말을 덧붙였다.
“모든 건 련주의 뜻이니.”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여기 모인 이들은 오황문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자들로, 악명과 무위는 천하를 호령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백운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흑련주.
그 이름이 가진 무게는 그들이 다 모인 것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이다.
정적이 드리워지던 그때였다.
“련주님께서 오셨군요.”
그들이 떠드는 동안에도 계속 침묵하던 청년이 말과 함께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멀리서, 희미한 소리였다.
하지만 대전 안에 있던 여섯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이윽고.
끼이익―
대전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이 열린 틈 사이로 칠 척 장신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숨을 삼키며, 들어서는 인물에게 집중했다.
화려한 금빛의 용이 수놓아진 자색의 장포를 입은 사내는 기나긴 머리카락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였다.
걸을 때마다, 머리가 찰랑거리고.
그 사이로 얼굴이 드러났다.
오뚝한 콧날과 냉소적인 표정.
언뜻 남자다운 얼굴이라고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여성스러운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한 명의 얼굴에 여러 명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내는 계속해서 걸었다.
기나긴 장포와 머리카락이 휘날리면서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침묵이 대전을 지배했다.
저벅. 저벅.
고요함 속 걸음 소리만이 퍼졌다.
이윽고 사내가 탁자 앞에 섰다.
그가 자연스레 그들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는 순간 대전 안이 그의 존재감으로 완전히 사로잡혔다.
사파제일인, 사흑련의 지배자.
사흑련주의 등장이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내리깔아졌다.
무저갱과도 같이 아주 새까만 눈동자가 그들을 한 명씩 스치며 담았다.
백운을 시작으로 청안귀희, 음현신녀, 송천악, 사도신권, 사영검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소곳이 선 청년, 사흑련의 군사인 사뇌복룡(邪腦伏龍)까지 본 그가 뭔가 비웃는 듯한 얼굴로 입을 뗐다.
“드디어 모두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