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33화 (333/391)

333화

내리쬐던 여명이 분분히 흩어진다.

그리고 그 흩어지는 빛 아래 돌연 조용한 적막이 찾아왔다.

모두가 말을 잃은 것이다.

“…….”

불현듯 등장한 한 청년.

그리고 옥기린이 내뱉은 이름.

그것들이 격렬했던 전장의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듯, 일순간 모두를 정지시켰다.

하나 그것도 잠시.

“처, 천휘라면…….”

“……매화신협!”

갑자기 터져 나온 누군가의 외침에 적막이 사라지고, 혼란이 찾아왔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시끄러워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저, 저자가 녹림대제와 불사천교주를 패퇴시킨 그 고수라고?!”

“저렇게나 어린 연배에 사도의 절세고수들을 쓰러트렸다는 것인가?”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기재라도 허무맹랑한 일이나 마찬가지인데, 생각보다 더 어리다니…….”

침음 섞인 경악성이 사방에서 흘러나오며, 격한 감정을 발산해 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호에서 무위와 명성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강호에서 매화신협이라는 존재는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리고 크게 명성을 떨치는 고수였다.

“……꿀꺽.”

천정대와 싸우던 무리가 주춤거리면서, 슬쩍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백 수십 명이 동시에 그런 움직임을 보였다.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매화신협’이라는 별호에 압도당한 것이다.

“치명상은 피했네요.”

한편 천휘는 그러한 시선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옥기린의 복부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중상은 아니었다.

“아슬아슬했습니다.”

옥기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천휘의 등장에 그는 여유를 되찾은 듯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보다 저 둘은 누구죠?”

천휘가 고개를 들며 묻자.

“파백검장의 장주인 파검군과 만수문의 문주, 쌍수사입니다.”

옥기린이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대답했다.

“네? 만수문주요?”

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며칠 전만 해도 만수문은 남궁세가로부터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문주가 여기에 나타났다? 그냥 사흑련의 세력이 아니고?

의문을 떠올리던 천휘는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대충 파악이 된 것이다.

‘그런 거였네.’

한편 찰랑거리는 냇물 위에 태연하게 선 청년, 천휘를 응시하던 파검군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겨났다.

“저 아해가 매화신협이라고……?”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덩달아 눈빛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긴장감이 몸을 지배한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발소리가 들려왔을 때부터 저 냇물 위에 수상비를 펼치고 있는 지금까지, 그의 존재감이 줄곧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다.

‘……고수다.’

무인의 직감으로 그리 생각할 때.

“매화신협? 훗. 열세인 상황을 바꿔 보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하는군.”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바로 옆에서였다.

만수문주는 서늘한 눈빛으로 천휘를 바라보며, 막강한 기세를 흘렸다.

우우웅―

공기가 울리며, 냇물이 요동쳤다.

만수문의 문주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독문심법, 벽사만공(闢邪滿功)의 공력이 그의 전신 혈맥에 흐른 결과였다.

앞의 청년이 고수인 것은 그 역시 잘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만 해도 전신에 느껴지는 압박감이 상당했으니.

하지만 만수문주는 옥기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오히려 꾀를 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화신협은 화산파의 도사라고 들었다. 한데 화산파의 도복은 어디로 가고 그런 꼴이란 말인가.”

그의 음성이 넘실거리며, 전장에 퍼져 나갔다. 그가 일부러 내공을 실은 까닭이었다.

그 음성에 주춤거리며 물러났던 사파 무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해 보니, 왜 저런 무복을……?”

“화산파의 도사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도복을 입을 텐데?”

만수문주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무리를 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눈빛이 사이하게 반짝였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사기다.’

지금 그는, 아니. 만수문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에 다다라 있었다.

뒤에서는 남궁세가가 쫓아오고 있었고, 앞에는 무림맹이 등장한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옥기린과 천정대는 만수문을 상대로 전투를 일으킬 생각이 없었으나,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복수심에 불타는 남궁세가보다는 후기지수들로 이뤄진 무림맹의 별동대가 더 해볼 만한 상대로 여겨졌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도망치면서 꺼져 가는 문도들의 사기를 다시 불태울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했다.

‘이놈들을 죽이고, 무혈에 도착하기만 하면…….’

만수문주는 며칠 전 사흑련에서 지급으로 보내왔던 연통을 떠올렸다.

‘풍리와 흑괴단이 있다!’

칠요선 중 한 명인 풍리.

그리고 사흑련의 삼단 중 하나, 흑괴단의 무력은 대방파와도 같았다.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제아무리 남궁세가라고 할지라도 한 수 접어야 할 터.

‘여기만 넘으면 목숨은 건진다!’

생각을 마친 그의 입이 열리고.

“보아하니 저놈을 매화신협으로 가장해 위기를 넘길 심산인 듯한데.”

음유한 사기를 담은 음성이 힘차게 번져 갔다.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곧바로 앞에 있는 천휘와 옥기린을 번갈아 보던 그가 확신하며 쏘아붙이자.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군.”

“옥기린은 정파의 모범이라더니 간악한 술수가 사파에 못지 않은 걸.”

“어쩐지 이상하다 했네. 절묘한 순간에 매화신협이 등장하다니.”

“그것도 혼자 말이야. 분명 별동대 중 하나를 맡고 있다고 했는데.”

사파 무리가 다시 사기를 불태우며, 숨을 고르던 천정단을 노려봤다.

‘계획대로 됐군.’

만수문주가 만족하며 눈초리를 올리던 그때.

“믿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천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고작 별호 가지고 호들갑은.’

천휘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별호를 그다지 진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떠도는 풍문의 일부 정도로 취급했다.

‘중요한 것은 직접 마주한 무위지.’

만수문주가 그 대답에 웃었다.

“훗, 들키니 말을 돌리려는…….”

역시나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한 그가 신나게 떠들던 그때.

“어차피 너희들은 죽을 테니까.”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뭐라고?”

만수문주가 눈을 찡그렸다.

하나 곧 그는 숨을 삼켜야만 했다.

입가에 아찔한 미소를 지은 천휘가 어느새 검을 뽑은 채 서 있었다.

무형의 기파가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빠르게 대주천한 매화신공의 공력이 그의 혈맥을 타고 흐르며, 유형화되어 그 모습을 현현한 것이다.

휘이이―

기나긴 흑색의 장포가 살짝 흔들리고, 그의 발치에서 미풍이 일어났다.

물 위에 선 그를 중심으로 냇물이 찰랑이며, 동심원을 그려 나갔다.

마치 신선이 하산한 것 같았다.

그걸 본 만수문주와 파검군은 자신도 모르게 경직된 표정을 내비쳤다.

순간 비추던 여명이 일렁거렸다.

상대의 전신에서 일어난 공력의 파동이 공간을 일그러트린 것이다.

내공 성취가 뛰어나단 방증이었다.

“……경이롭군.”

파검군이 중얼거렸다.

검파를 쥔 손에 땀이 흥건했다.

이 한순간에 보인 공력만으로 상대의 무위를 대략 짐작한 터였다.

“합공을 해야겠네.”

만수문주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파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합공을 거절했을 그였지만, 지금은 상대가 좋지 않았다.

“좌를 맡지.”

파검군이 나직한 말을 흘리며 손에 든 검, 공멸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파멸공을 끌어올려, 혈맥을 수축시키며 천천히 검집째로 검을 들어 올렸다.

언제든 출수를 할 수 있도록.

“후우.”

숨을 고른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검집에 숨겨진 검, 공멸과도 같이.

‘일수에 모든 것을 보인다.’

검파를 쥔 그의 우수에서 무지막지한 기파가 흘러나와 팔뚝의 혈도를 자극하며 근육을 수축시켰다.

이어 그가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발검과 함께 쏟아진 쾌검.

그 일검에 모든 것을 싣기 위해서.

옆에 있는 만수문주의 손아귀에서 은은한 기파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벽사만공의 공능이었다.

화아아악!

그에 천휘의 전신에서 무형의 기파가 하늘로 치솟으며, 냇가 일대를 장악했다. 공력의 파동이 냇물을 출렁이게 하며 단숨에 둘에게 전해졌다.

‘이런 공력이!’

‘흡!’

둘이 놀라며. 천휘를 바라볼 때.

훅!

돌연 천휘의 신형이 사라졌다.

뒤이어 그가 사라진 곳에서 물방울이 튀어 오르며, 파문을 일으켰다.

작은 파문이었다.

하나 그것은 곧 파도로 변모하며, 냇가의 물살을 위로 솟구치게 했다.

냇물을 반으로 가르면서였다.

‘시작인가!’

파검군이 공력을 폭사했다.

저 파도 사이로 느껴지는 희끄무레한 기척이 자신의 권역을 침범했다.

매우 빠른 속도였다.

‘파공멸(破空滅).’

하나의 초식을 준비한 그의 왼발이 거친 공력과 함께 진각을 내디뎠다.

쩌저적!

그의 가죽신이 물속의 진흙을 짓밟으며 순식간에 발목까지 파묻힌 순간 그가 쥔 검, 공멸이 단숨에 검집에서 뽑혀 나와, 허공을 잘랐다.

찰나였다.

솟구치던 냇물이 그의 쾌검에 빨려 들어가며 강렬한 궤적을 그렸다.

순간 냇물이 소용돌이쳤다.

이어 물결을 휘감은 파공멸이 허공을 부수며, 단숨에 앞으로 쏘아졌다.

코앞에 도달한 기척을 향해서!

콰아아앙!

충돌의 여파가 근방을 뒤덮었다.

진흙과 물이 사방에 해일처럼 일어나서는 냇가의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앙.

“이, 이럴…….”

파검군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정확히 심장이 뚫린 채였다.

어떻게 검이 휘둘러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인 것인지 아무것도 못 봤다.

그저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상대, 천휘를 노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휘릭!

천휘가 발을 놀려, 몸을 회전했다.

측면에서 달려드는 만수문주를 기감으로 파악한 천휘가 검을 올렸다.

순간 그의 장포가 크게 펄럭였다.

파검군은 시야를 가린 장포가 거슬린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스걱!

한차례 회전한 검은 파검군의 심장을 그대로 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천휘의 뒤를 노리며 쌍수를 펼치던 만수문주를 향해서 하나의 기나긴 궤적을 유려하게 그려 냈다.

뒤늦은 적빛이 궤적을 따랐다.

그 직후.

쏴아아아!

승천하던 냇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폭포와도 같았다.

그렇게 한참 냇물이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야, 그 안의 광경이 나타났다.

천휘는 검을 늘어트린 채 서 있었다.

냇물이 쏟아졌음에도 그의 머리칼과 무복에는 물기 하나 없었다.

오직 그가 쥔 검 화월에서만 붉은 물, 피가 뚝뚝 떨어질 뿐이었다.

반면 상대는 달랐다.

파검군과 쌍수사의 몸은 한창 크게 들썩이는 냇물에 반쯤 잠겨 있었다.

미동도 없는 채였다.

뒤이어 출렁이는 냇물에 흔들리던 그들의 몸에서 붉은 핏물이 번지자.

“무, 문주님이……!”

“쌍수사와 파검군이 단 일격에!”

“이럴 수가!”

사파 무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파검군과 쌍수사는 절강의 패자(霸者)라 일컬어지던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합공을 펼쳤음에도, 단 일수에 처참한 시체가 되어 버렸다.

격이 다른 강함이었다.

“으, 으으!”

“도망쳐!”

사파 무리가 홱 몸을 돌렸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도망치려고 하자.

“천정대는 적들을…….”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있었던 옥기린이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하나 그보다 먼저.

파바밧!

사방에서 인영들이 불쑥 솟으며 나타났다.

차오르는 여명을 등에 쥔 인영들은 도망치려던 사파 무리를 포위했다.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약 사십을 헤아리는 숫자.

백 수십을 헤아리는 사파 무리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보일 정도였다.

하나 사파 무리는 멈칫했다.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사제!”

그들 가운데에 있던 여인이 소리를 높였다.

궁장의 소매를 찢어서 두 팔을 드러낸 여인이 방긋 웃으며 밝게 말했다.

“모두 데려왔어.”

“꽤 빨리 왔네요.”

천휘가 화월을 털어 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새빨간 피가 흩뿌려지며 물에 번졌다. 그 위로 옅은 햇빛이 반사되었다.

“대주.”

그녀 옆에 있던 문사의 차림을 한 청년이 차가운 눈빛을 발하며, 입을 달싹였다.

그 손에는 검이 들린 채였다.

“명을.”

그의 눈빛이 사파 무리를 향했다.

투기에 젖은 눈이었다.

천휘는 그런 그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천천히 열어 목소리를 흘렸다.

“전부 처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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