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32화 (332/391)

332화

전서를 확인한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글귀였기 때문이다.

‘피습?’

그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옥기린과 천정대는 무혈에 터를 잡은 풍리와 흑괴단의 이목을 뺏기 위해서 만수문 쪽으로 향했었다.

아예 모습을 드러낸 채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니 목표물이 되기 적당하긴 했으나, 풍리와 흑괴단은 무혈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또 다른 사흑련의 병력인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예상이었다.

만수문은 빠르게 진격하는 남궁세가를 바로 코앞에 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옥기린과 천정대마저 만수문 쪽으로 향한다?

만수문을 버리는 게 아니고서야 사흑련의 지원이 있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될 줄이야.’

천휘가 머리를 긁적였다.

본래라면 이대로 옥기린과 천정대가 돌아오면 끝날 일이었다. 한데 예상치 못하게 습격을 당한 꼴이었으니.

그때였다.

“왜 그래, 사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발을 멈추고 전서만 바라보는 천휘의 모습에 의문을 가진 천향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무심한 표정의 천휘를 향해 물은 그녀는 전서 쪽으로 힐끗 눈을 돌렸다.

그리고 적힌 글귀를 본 순간.

“……피습?”

천향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당혹감이 깃든 채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습격이라니? 대체 누가?”

그녀가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글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급해 보이는 그녀와 다르게 천휘는 무덤덤하게 손에 쥔 전서를 정리하며 입을 뗐다.

“저야 모르죠.”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이어서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전서를 흔들었다.

“이것만 보고 어떻게 다른 정보를 알 수가 있겠어요?”

“그, 그건 그런데…….”

그리고 그런 천휘의 여유로운 모습에 오히려 천향의 마음만 더욱더 조급해질 뿐이었다.

“그것보다 얼른 도우러 가야 하지 않겠어?”

목소리가 살짝 높아진 그녀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동쪽으로 향했다.

만수문이 있는 절강 쪽으로, 옥기린과 천정단이 이동한 방향이었다.

“그래야겠죠.”

말하던 천휘가 내공을 일으켰다.

그의 소매가 흔들리더니 곧 전서를 쥔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터져 나왔다.

삼매진화였다.

화르르륵!

손에 있던 전서가 삽시간에 불타오르며, 곧 재가 되어서 흩어져 갔다.

천향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멸절대를 불러 모을게.”

그녀가 힘을 주어 말하자.

“그래요.”

천휘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풍리와 흑괴단주는 처리한 상태다. 그러니 흑괴단의 잔당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옥기린과 천정대를 구하는 것이 더 우선적인 일이지 않나.

‘어차피 잔당을 모두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고.’

생각하던 천휘가 목을 까딱였다.

가볍게 몸을 푸는 행동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직이 말을 흘렸다.

“전 먼저 갈 테니, 대원들 데리고 와요.”

“내, 내가 모아서 가라고?”

“급해 보이는데, 다 같이 가면 늦을 것 같아서요.”

“……그러네.”

천향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휘의 무위는 천외천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멸절대에 그의 속도를 맞출 자신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천휘가 휙 몸을 돌렸다.

동쪽을 향해서 회전하는 그의 몸짓을 따라서 기나긴 장포가 휘날렸다.

가벼운 행동, 하나 묵직해 보였다.

그 행동의 주체가 천휘이기 때문이리라.

곧 천휘가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그럼 나중에 봐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이이이―

천휘의 발밑에서 공력이 움텄다.

매화신공의 내력이었다.

떠날 채비를 갖춘 그의 의념을 따라서 흘러나온 기파가 분분히 흩어지며, 그의 발아래로 번져 갔다.

화아아악!

한순간 투명한 기파가 강한 힘으로 사방에 흩뿌려졌다.

짙게 드리워진 밤하늘 아래, 흩뿌려진 기파가 새파란 달빛을 사방으로 반사시켰다.

그 순간.

천휘가 발을 뗐다.

피로 물들어 있는 가죽신의 앞코가 흙바닥을 한 치가량 짓밟는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이 명멸했다.

“…….”

천향은 넋을 놓은 채, 이미 천휘가 사라지고 텅 빈 공간을 멍하니 쳐다봤다.

신비롭고, 성스러운 광경이었다.

절로 두 손이 모일 지경이었다.

“……사제는 더 강해졌구나.”

넋을 놓았던 그녀의 눈빛이 이내 타오르듯 이글거렸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위축될 법한 압도적인 무위를 목격했음에도 그녀는 오히려 더욱 승부욕을 발산해 냈다.

그녀의 성정이 그러했고, 피를 타고 흐르는 숙명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곧 천향이 발을 거칠게 박찼다.

탁!

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떨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힘차게 나아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사방에 흩어진 멸절대를 모으기 위해서.

* * *

절강으로 향하는 기나긴 관도.

막 떠오른 여명이 드리워지고 있는 기나긴 냇가가 붉게 물들었다.

하나 그것은 떠오르는 태양의 붉은 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었다.

새빨갛고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바로 피였다.

청계수라고 불릴 만했던 맑은 냇가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이 흘린 피로 인해서 냇물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는.

“죽어라!”

“이자들이!”

격한 음성이 들려왔다.

수십, 수백 명을 넘는 무인들.

그들이 서로를 향해서 날카로운 병장기를 거칠게 휘두르고 있었던 탓이다.

한 명, 한 명.

살기를 안 품은 자가 없었다.

그들이 바로 맑게 흐르던 냇가를 사지(死地)로 만든 인물들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탄식에 가까운 음성이 번졌다.

부드러운 인상의 미청년, 옥기린은 주변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 절반은 자신의 천정대원들이었다.

그의 눈이 질끈 감겼다.

본래 그의 목적은 절강으로 향하는 관도를 지나갔다가, 무혈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돌아가려던 중 이들과 부딪치게 되었다.

바로 만수문과!

옥기린이 유려하게 휘두른 검을 눈앞의 상대 목에 가져다 댔다.

“왜 우리를 습격한 것이오?”

“으, 으익!”

사내가 목 끝에 닿는 차가운 검신에 눈물을 흘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 그쪽이 먼저 우리 후방을 치려고 해서 우리도…….”

“후방을 친다니, 무슨 말을…….”

옥기린이 사내의 말에 미간을 좁히면서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휘이익!

뒤에서 섬뜩한 바람이 불어왔다.

화들짝 놀란 옥기린이 다급히 냇가에 담근 발에 공력일 실어, 몸을 허공에 띄우며 뛰었다.

콰아앙!

핏물을 머금은 냇물이 솟구쳤다.

저 멀리 비춰 오는 여명이 솟구친 냇물에 부서지며 흩어져 갔다.

아름답지만,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솟구친 핏물이 채 다 떨어지기도 전에 두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단번에 솟구친 냇물을 자른 두 검은 긴 검로를 남기며 맞부딪쳤다.

채애앵!

날카로운 예기가 사방에 뻗쳤다.

두 검이 부딪친 충격의 여파에 솟구친 냇물이 단숨에 흩어졌고, 냇가는 순간 바닥을 보였다.

찰나지간이었다.

‘강하다!’

송문고검, 청광을 휘두르던 옥기린은 눈앞의 중년 검수가 마주 휘둘러 오는 한 수에 숨을 삼켰다.

검을 파지한 손이 아릿했다.

중년 검수가 휘두른 검의 경력을 차마 해소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때였다.

“과연 무당이 아끼는 놈이로군.”

검을 맞댄 중년 검수가 입을 뗐다.

펄럭이는 소매에서 흘러나오는 공력의 파동이 거친 바람을 불러냈다.

지닌바 검세가 강렬한 것뿐 아니라, 내공도 고절한 자였다.

“네가 태극검제의 제자인가?”

말과 함께 그가 발을 내디뎠다.

금실이 수놓아진 청색의 장포 밑단이 바닥이 드러난 냇가에 닿았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당신은…….”

옥기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굵은 눈썹과 오뚝 솟은 코, 꾹 다물어진 입.

남자다움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생김새의 사내였다.

거기에 사납기 짝이 없는 경파의 흐름은 마치 한 마리의 호랑이를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누구기에 이런 검격을……?”

물음에 중년 검수가 웃었다.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미미하게 올라간 것이 마치 어린아이의 재롱이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네 사부에게 물어봐라.”

“무슨 말을……!”

옥기린이 소리치려던 그때.

화아아악!

그보다 먼저 중년 검수의 검이 일렁거렸다. 꽃처럼 피어난 기파가 검신을 어루만지면서, 공력을 발했다.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도 같은 공력이었다.

“……!”

그 순간 옥기린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 기파는 설마?!’

과거 사부님께 들었었던 검법의 기파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일휘파검(日輝破劍)?!”

옥기린이 다급히 청광을 들었다.

상대는 보통의 고수가 아니었다.

과거에 사부인 태극검제와 동수를 이뤘다는 전전대의 사파 무림 거두.

파검군(破劍君)이 그의 정체였던 것이다.

‘저자가 왜 여기까지…….’

옥기린은 목이 탔다.

파검군은 파백검장(破魄劍莊)의 장주로 절강에서 나오는 일이 없는 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흡!”

순간적으로 옥기린이 숨을 삼켰다.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뿜어내는 일휘파검의 경력은 냇가를 넘어, 자신을 짓눌러 왔다.

옥기린이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끌어낸 공력이 그의 온 혈도를 타고 흘러와, 손끝에 닿았다.

‘잊어야 한다!’

생각과 함께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얼마 전 천휘에게서 받았던 가르침을 되새긴 그의 손이 일순간 가벼워졌다.

곧 옥기린이 눈을 감았다.

그는 시각을 포기한 동시에, 온 전신의 감각을 완전히 곤두세웠다.

사방이 그의 권역이었다.

권역 안의 모든 것이 기감을 통해 파악되었다. 상대의 기파도, 공기의 흐름도.

그리고 그 심상 속에서 옥기린은 검으로 하나의 원을 그려 냈다.

바로 태극이었다.

그 의념은 이내 그의 손에 닿았고.

곧 태극을 발현했다.

“음?”

파검군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태극검제의 제자라더니. 저만한 나이에 태극혜검을 펼치는 건가?’

그는 곧장 알아봤다.

지금 옥기린이 행한 신검합일과 그것에 이어질 하나의 검법을!

“하나 아직 세월이 얕군.”

파검군이 내력을 끌어올렸다.

모든 것을 깨트리는 파(破).

모든 것을 지우는 멸(滅).

오롯이 부수겠다는 일념으로 만들어진 내공심법 파멸공(破滅功)의 내공이 그의 손에 움트며, 그의 오랜 벗에게 실렸다.

우우우웅―

그의 벗, 공멸(空滅)이 울었다.

이내 그의 손에서 자욱한 경파가 뻗쳐 나가며, 공간을 채웠다.

그와 더불어 그가 발을 내디뎠다.

푹!

물이 없어진 냇가의 바닥.

그 위로 발끝이 살짝 닿는다 싶은 순간, 그의 검이 쏘아졌다.

땅이 거칠게 갈라지며, 희끄무레한 동심원의 기파가 사방에 폭발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이 부딪쳤다.

쩌어어엉!

냇가의 물이 사방으로 터졌다.

한순간에 크게 울린 폭음으로 귀가 먹먹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뚝, 뚝.

핏방울이 멍울지며, 떨어졌다.

“큭.”

신음을 흘린 옥기린은 허리춤을 훑고 지나간 검흔에 인상을 찌푸렸다.

“목숨은 부지한 건가.”

파검군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뒤늦게 돌아온 냇물에 피를 번지게 하는 옥기린을 보며, 씩 웃었다.

그 직후 손목을 털어 냈다.

옥기린에게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 또한 아주 멀쩡한 상황은 아니었다.

“저릿저릿하군.”

파검군이 중얼거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검신이 부딪치며 타고 올라온 경파가 하단전을 크게 뒤흔들고 있었다.

“파검군.”

그때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거의 칠 척에 다다르는 장신의 노인, 만수문주인 쌍수사(雙手邪) 수양악(手楊岳)이었다.

파검군이 내상을 입은 것을 알아챈 그가, 바로 옆에 서며 입을 열었다.

“저런 아해를 상대로 자네가 내상을 입은 것은 예상외로구먼.”

“……강호의 소문이 헛된 것은 아니었나 보군. 괜히 천하 삼대 기재라고 칭하는 것이 아닌 실력일세.”

“그 정도란 말인가?”

쌍수사의 눈이 귀기를 흘렸다.

그와 동시에 피로 물든 그의 무복이 넘실거리면서,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면 삭초제근을 해야겠군.”

그의 손에서 공력이 요동쳤다.

사이하고, 격렬한 기세였다.

“…….”

옥기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파검군 한 명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어려운 상황인데, 이제는 만수문주인 수양악까지 합세한 상황이다.

‘이대로 끝인가?’

직감적으로 패배를 느낀 그 순간.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모두가 멈칫했다.

그것은 굉장히 기이한 일이었다.

집요하게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건만, 고작 발소리에 모두가 멈칫한 것이다.

‘이것은…….’

옥기린이 고개를 돌리자, 한 청년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요동을 쳤다.

청년이 길게 드리워진 흑색의 장포를 흩날리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삼 장의 거리를 격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턱.

청년은 그들의 면전에 다다라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무슨 보신경이!”

“이게 무슨……!”

놀란 그들이 뒤로 물러날 때.

“아직 괜찮나 보네요?”

청년이 그 둘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옥기린만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옥기린은 더없이 환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천휘 소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