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31화 (331/391)

331화

당황한 풍리가 턱을 치켜들었다.

턱을 치켜든 그는 한 뺨가량 위의 높이에 위치한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네…… 가 혈룡문…… 과 신필유사를…….”

하나 그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청년의 입가에 감돌고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명명백백한 비웃음이었다.

풍리가 입을 다물자 이번엔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뭐라 했더라. 구주삼패세의 시대를 종식하고, 강호를 강자지존(强者至尊)의 세계로 되돌린다고 했던가.”

천휘는 과거 신필유사가 자신을 회유하려고 했던 말을 회상하며, 말했다.

거창한 야망과 계획이었다.

명분도 있었다.

대개의 혈기 왕성한 무인들은 강호에서 자신의 무위를 뽐내고, 그를 통해 명성을 얻고자 했다.

한데 지금 시대는 어떤가.

구주삼패세가 도래한 이후 강호에서의 싸움은 대부분 일정한 통제 아래서 이뤄졌다.

그 세월이 반백 년에 가까웠다.

“뭐, 어찌 됐든 결국에는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됐네.”

풍리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리고 그걸 본 천휘는 예상한 대로라는 듯이 목을 까딱이며, 다시금 입을 뗐다.

“구주삼패세 둘이 부딪쳤으니 말이야.”

세월의 흐름이 사람을 무뎌지게 하고, 망각을 부른다고 했던가.

절대적인 것 같았던 구주삼패세의 질서와 팔무신의 명성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잊혀 갔단 뜻이다.

이를 방증하는 것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사흑련과 무림맹의 전쟁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두 세력은 절대로 전쟁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을 터였다.

풍리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너…… 는 누구지?”

그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어떻게 우리의 목적을…….”

말을 하던 그가 눈을 부릅떴다.

순간 경악스러운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네놈, 설마 팔무신의 제자냐?!”

소스라치게 놀란 풍리의 외침에 천휘가 말없이 웃었다.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동요하는 그와 두 눈동자를 마주한 채 입을 달싹여 아까 한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네가 직접 알아보라니까.”

그 의미심장한 말과 웃음에 풍리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 갈 무렵.

“아, 이제 그럴 필요 없겠네.”

천휘가 말과 함께 좌수를 뻗었다.

공간을 격하며 휘둘러진 좌수가 굳어 있는 그의 목울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장 끌어당겼다.

“내가 누군지 곧 염라가 알려 줄 테니까.”

“…….”

풍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푸하하핫!”

불현듯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조가 섞여 있는 웃음소리였다.

곧 그가 웃음을 뚝 그쳤다.

“여기가 내 묫자리일 줄 몰랐군.”

풍리의 눈빛이 담담해졌다.

사실 위유심공이 무너지는 순간,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었다.

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내상을 회복하기 위해 끌어올렸었던 선천지기는 증발해 가고 있는 데다, 갈 곳을 잃은 위유심공의 공력이 혈도와 혈맥, 몸을 갉아 먹는 중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그는 오히려 평소의 여유를 되찾았다.

“후회 없는 삶이었다.”

그는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보라색으로 변한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그러나 단 하나, 팔무신이 일궈 낸 구주삼패세의 시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은 무척이나 아쉽구나.”

그의 목소리가 점차 나른해졌다.

선천지기가 빠져나가면서, 그의 생명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곧이어 그의 전신에 힘이 빠졌다.

두 번 다시 깨어날 수 없는 수마(睡魔)가 그를 찾아온 터였다.

‘이것이 죽음인가…….’

이내 죽음을 목전에 둔 그의 눈이 완전히 닫히려는 찰나.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고?”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그에 풍리가 흠칫했다.

영성이 실린 음성이었다.

음성은 귀를 뚫고 들어와 멀어져 가던 정신을 일깨우려는 것처럼 곧바로 뇌리에 박혔다.

‘이, 이게 무슨!’

그가 당황할 무렵.

덥썩!

그와 동시에 갑자기 목울대를 우악스럽게 잡는 손짓이 느껴졌다.

“컥!”

숨이 막히며 본능적으로 그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을 크게 뜬 그의 시야가 트였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천휘가 무심한 눈빛으로 자신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쿵!

풍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풍리가 알 수 없는 공포에 잔뜩 돋은 소름을 느끼는 그때.

화아아악!

천휘의 전신에서 투명하기 짝이 없는 공력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눈에서 선명한 광망을 토하며 풍리를 쳐다보던 천휘가 닫혀 있던 입술을 뗐다.

“내가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 한 너는 네 멋대로 죽을 수 없어.”

그 말이 끝난 순간 풍리의 목울대를 쥔 천휘의 손에서 투명하기 짝이 없는 공력이 요동치며, 그를 감쌌다.

그러고는.

두근!

그의 삼백육십오 개의 혈도와 삼단전에 순수한 공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천휘는 세밀하게 내공을 운용했다.

선천지기가 대부분 빠져나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풍리의 육체에 매화신공의 공력이 울창하게 흘렀다.

‘마, 말도 안 돼!’

풍리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신에서 활력이 넘쳐흘렀다.

그 느낌이 너무 괴이해서 그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죽음이 바로 목전이었다.

그런데 앞의 이 정체불명의 청년이 자신의 목숨을 억지로 연장했다.

그것은 무척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그의 손에 좌지우지된다는 뜻이지 않은가.

죽이는 이는 수없이 봐 왔지만, 상대를 살릴 수 있는 무인이라니!

“너, 너는 대체…….”

겁에 질린 그가 입을 달싹일 때.

화아아악!

순간 의식이 아득하게 넓어졌다.

천휘가 흘려 낸 매화신공의 순수한 기운이 대주천을 마친 것 때문일까.

멀어져 가던 풍리의 의식이 또렷해지면서,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잊고 있었던 격통마저도.

“끄아아아악!”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잡힌 목을 통해 느껴지는 우악스러움은 물론이고, 옆구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검신의 격통까지.

모든 고통이 단번에 몰아쳤다.

천휘는 풍리가 손에 잡힌 채 발버둥 치는 것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럼 이제 시작하자고.”

그가 말과 함께 화월을 치켜들었다.

화월의 검신이 내리쬐는 달빛을 반사하며, 문양을 분분히 흩뿌렸다.

시린 달빛을 머금은 꽃이 피는 것만 같은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을 반겨 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으, 으으…….”

하지만 그것을 보는 풍리는 그러한 광경을 보면서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없었다.

청화를 피워 내는 검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닿는 순간 살갗을 그대로 저밀 것만 같이 날카롭게 벼려진 살기를 풍긴 채였다.

“……으, 으윽!”

풍리가 아연실색하며 다가오는 검을 바라봤다.

공포가 찾아왔다.

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그의 마음과 다르게 천휘와 검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천화루의 최상층에 시리도록 푸른 달빛을 담은 청화에 이어 새빨간 혈화가 사방에서 피어났다.

비명을 양분으로 삼으면서.

* * *

“……끝났나?”

천향이 화천루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연이은 폭음과 함께 강렬한 충격파를 계속해서 쏟아 내던 화천루가 고요해진 지 벌써 이 각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그 누구도 차마 화천루 쪽으로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였다.

스륵―

불현듯 앞에서 인영이 나타났다.

사체나 다름없을 만큼 피로 범벅인 사내의 목덜미를 손에 든 청년이었다.

천향이 반색하며, 바로 달려갔다.

청년이 익숙한 이였기 때문이다.

“사제!”

천휘는 반갑게 달려오는 천향을 향해 손에 든 사내를 냅다 던졌다.

“어?”

그러한 행동에 천향이 화들짝 놀라며, 던져진 사내를 황급히 받았다.

그리고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호광개?”

받아든 호광개의 상태는 끔찍했다.

온 전신이 피로 범벅이었고 어깨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왜 이런 상처를?”

그녀가 고개를 들며, 묻자.

“뒤를 쫓다가 걸려서 고문을 당했나 보던데요.”

천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의 몰골이 어떻든 신경조차 안 쓴다는 듯 태연한 어투였다.

“고문……?”

천향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호광개와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같은 멸절대 소속이었다. 당연히 분노가 차올랐다.

“누가 그랬어?”

그녀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마치 잘 벼려진 검과 같았다.

“풍리와 흑괴단주요.”

천휘의 말에 천향의 기세가 더욱더 날카로워지려는 순간.

“그리고 둘은 이미 죽었어요.”

천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사제가 처리했어?”

“뭐, 그렇죠.”

툭 던지듯 말하던 천휘는 바로 목소리를 내리깔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멸절대는 다 움직였어요?”

“모두 다 움직였어.”

천향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가 말한 대로 싸움이 멎자마자, 도망치는 놈들이 있더라고.”

눈을 얇게 뜬 천향은 천화루가 고요해진 이 각 전부터 급하게 움직이던 이들을 떠올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럼 우리도 가죠.”

천휘가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잠시만. 그 전에 호광개를 의방에 맡겨야 하지 않겠어?”

천향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그녀의 품 안에는 호광개가 간헐적으로 미약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음, 그러면 여기서 따로 가죠.”

“그게 좋겠어.”

천향이 동의하며 말하는 순간.

“제가 가겠습니다.”

불쑥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인파에 숨어 있던 임하율이 빠르게 걸어왔다.

“제가 빠지고 대주님과 부대주님께서 움직이는 게 좋을 겁니다.”

그녀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임무는 끝이 아니었다.

풍리와 흑괴단주를 죽였다지만, 아직 남은 흑괴단의 잔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임무에는 무위가 약한 자신보다 대주와 부대주가 힘을 보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부탁할게요.”

천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어 그녀가 호광개를 넘기자, 평소와 달리 시비의 복장을 한 임하율이 재빨리 호광개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임하율이 떠나자.

“가죠.”

천휘가 천향 쪽을 보며 말했다.

사전에 계획을 세울 때, 미리 얘기해 둔 바가 있었기에, 둘은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사방에 퍼진 멸절대가 무혈의 거리를 포위하며 모였을 곳으로.

그렇게 나아가던 중.

“옥기린에게 연통은 보냈어요?”

천휘가 천향을 보며, 물었다.

옥기린과 천정단의 분리는 시선을 끌 미끼이면서, 동시에 추후 무혈의 거리를 빠져나갈 적들을 잡기 위한 포위망 구축을 위함이었다.

천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답신이 올 거야.”

천향이 나직이 말하던 그때였다.

하늘 위에서 활공하던 매가 수직 낙하하며, 둘에게 가까이 붙어 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딱 맞춰서 왔네.”

천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빠르게 낙하하는 매의 발목에 하나의 천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급하기는 급했나 봐. 이렇게 전서응까지 보내고.”

천향이 바로 팔뚝을 내밀자.

턱.

전서응이 그 위에 착지했다.

천향은 발목에 묶인 자그마한 천을 풀어헤치며 바로 천휘에게 건넸다.

“자, 여기.”

천휘가 천을 받아들여, 펼쳤다.

그리고 그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

천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 천에는 다급함이 느껴지는 글이 휘갈기듯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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