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30화 (330/391)

330화

풍리의 눈이 바로 앞의 광경을 담았다.

정확히 관통된 어깻죽지.

그리고 그 너머 멈칫한 적의 모습.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였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평정심을 깨트린다면 허점이 드러나는 법.’

풍리의 눈이 영롱하게 빛났다.

그는 강호를 오랫동안 누벼 온 잔뼈가 굵은 노고수였다.

지금의 위치에 다다르기까지, 그저 그런 무인은 물론 고수의 죽음 역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봤다.

그렇기에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강호의 무인들이 죽는 것은 무위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 외의 이유도 적지 않다는 것을.

환경, 기세, 마음의 동요, 방심 등.

그 때문에 고수가 하수에게 죽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풍리는 그것을 노렸고.

결국 기회를 잡았다.

화아악!

그가 온 내공을 끌어 올렸다.

사일창을 잡은 그의 손끝에서 새하얀 기운이 넘실대며, 기파를 일으켰다.

영사심결의 공능이 발한 것이다.

그의 안광이 활활 타올랐다.

생명력까지 불태운 영사심결의 공능이 그의 안구에 짙게 드리워졌다.

눈이 뜨거워진다 싶은 순간.

온 세상이 느려졌다.

흩뿌려지는 핏물이 선명하게 방울져서 보였고, 그 사이로 미간을 좁히고 있는 적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찰나보다 짧은 초속(初速)의 영역.

그가 익힌 비전무공, 영안법(永眼法)이 시간을 잘게 쪼갠 것이다.

‘이 일격에 죽여야 한다.’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풍리는 이미 그의 무위를 보았고, 체감했다.

그의 무위는 자신보다 아득하게 높았으며, 그 경지가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승산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주 잘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이길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화르륵!

영겁과도 같은 시간 속 풍리는 영사심결의 공력을 세밀히 운용했다.

어깨의 견우혈에서부터 시작된 새하얀 공력의 파동이 팔뚝의 현백혈을 따라서 내려와 이윽고 손목인 내관혈에 다다르는 순간.

휘리리릭!

그는 흐름을 그대로 실어 손목을 돌렸다. 그를 따라 창대가 회전했다.

콰드드득!

강맹하기 짝이 없는 공력의 파동이 관통한 호광개의 어깻죽지를 날려 버릴 듯이 살점을 찢어발겨 갔다.

그리고 그 모든 공력을 담아낸 사일창이 앞으로 번개처럼 쏘아졌다.

그가 칠요선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기 전.

창절귀왕(槍截鬼王)이라 악명을 떨치며, 강남 무림을 휩쓸었던 창술 이역적정(伊淢寂定)이 펼쳐진 것이다.

번쩍!

호광개의 어깨를 관통한 창살이 새하얀 빛살처럼 명멸하며 짓쳐 갔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흩뿌려진 붉은 피를 뚫고 날아드는 것이 숫제 백뢰(白雷)와도 같았다.

우우우웅!

이역적정이 흩뿌리는 경파에 허공이 서글픈 울음을 터트리는 가운데.

천휘는 묵묵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살을 바라봤다.

좁혀졌던 미간은 어느새 평소처럼 돌아왔고, 표정은 무심해진 채였다.

‘나를 격동시킬 생각인가 본데.’

풍리의 의도는 한눈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에서 이런 일들을 어디 한두 번 겪어 봤는가.

‘시시한 짓이야.’

천휘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저자는 자신을 몰랐다.

‘고작 이런 것으로 평정심을 깨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돌연 천휘가 발목을 비틀었다.

다음 순간 검은 장포가 크게 휘날리며, 흑괴단주를 짓누르던 화월이 일순간에 기나긴 궤적을 그려 냈다.

“……!”

흑괴단주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방향을 튼 천휘의 화월이 그의 손을 그대로 잘라 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목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스륵―

그의 목에 혈선이 그어졌다.

여전히 두 눈은 부릅뜬 채였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천휘는 회전하는 그 힘을 이용해서 단숨에 측면으로 발을 내디뎠다.

후우우웅―

순간 그를 중심으로 공력의 바람이 일며, 검은 장포가 크게 솟구쳤다.

흩날리는 옷자락 사이로 천휘가 앞을 봤다.

좌측에 있던 호광개와 풍리를 어느새 정면에서 마주한 상태였다.

창날이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당장이라도 심장에 닿을 듯 지척 거리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천휘는 회전하던 그대로 화월의 검신을 세로로 바짝 세운 뒤 경력을 실어, 순간적으로 몸을 휙 돌렸다.

쐐애애애액!

검은 소매가 펄럭이고, 화월이 기나긴 적빛의 궤적을 허공에 그렸다.

그 순간.

쩌어어엉!

검신이 공력을 실은 창과 둘을 동시에 후려쳤다.

거센 충돌의 여파에 대기가 거미줄처럼 균열을 일으켰고, 공력의 파동이 사방에 휘몰아쳤다.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화월의 검신에 얻어맞은 풍리와 호광개는 파동보다 빠르게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쿵!

둘이 바닥에 쓰러졌다.

호광개는 기절한 듯, 입에 피거품을 문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 반면 풍리는 벽에 부딪힌 상태로 쓰러졌다가, 이내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기를 잠시.

“커허헉!”

그는 처절한 비명을 토해 냈다.

입이 아니라, 마치 가슴속에서부터 깊숙이 쌓여 있던 것을 뱉은 느낌이었다.

그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두 눈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고, 입에선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왔다.

충격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갈비뼈가 부려진 모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상이라도 입은 것일까, 속이 진탕 흔들리고 있었다.

‘어, 얼른 영사심결을…….’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는 재빨리 운기조식에 들어가고자 했다.

본래 무공의 심법이라 하면 후천지기를 쌓아 다루는 공부를 칭했다.

하나 영사심결은 그 결이 달랐다.

선천지기까지 다루는 심공.

생명력을 소모하는 대신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공부였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가 그렇게 영사심결에 대한 신뢰로 다급히 내상을 다스리려 할 때.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천휘가 다가오고 있었다.

화월을 축 늘어트린 채였다.

“오, 오지 마라!”

풍리가 발작하며 소리쳤다.

그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목숨을 거두려고 찾아오는 저승차사와도 같아 보였다.

‘이놈은 괴물이야.’

풍리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영안법을 펼친 그의 눈은 초속의 영역에서도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런 그조차 모두 헤아릴 수가 없었다.

검이 움직인다 싶더니 허공에 적빛의 궤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압도적인 속도의 쾌검이었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건 실력만이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가 옆을 힐끗 봤다.

그곳엔 그가 붙들고 있던 인질, 호광개가 있었는데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깨에 뚫린 구멍은 자신이 낸 것이라지만, 옆구리를 가격한 흔적은 바로 앞의 이자가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 흔적은 자신이 만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경파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것이 저자를 빈사로 만들었다.

숨소리가 아주 옅은 것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자, 잘못 건드렸어.’

그의 등 뒤에서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그를 잠식해 갔다.

분명 충직한 수하임에도 상대는 거침이 없었다.

그뿐이랴.

‘거, 거기다 일부러 마지막에 내공을 거두었어.’

입안이 마르며 혀끝이 거칠어졌다.

상대는 악독한 놈이었다.

“내, 내가 졌다! 항복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목숨만은…….”

그는 다급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처량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비굴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상관치 않았다.

굴욕? 그딴 게 무슨 상관인가.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그러나.

“뭔 개소리야?”

천휘가 어이없다는 투로 뇌까렸다.

“널 살려 줄 생각은 전혀 없는데.”

“그, 그렇다면 왜 마지막에 손속에 사정을 둔…….”

“아, 그거?”

천휘의 입가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조소였다.

“아까 말했잖아. 너는 편히 죽을 수 없을 거라고.”

“……!”

풍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소리에 담긴 것은 진심이었다.

‘이, 이러면…….’

그의 눈이 사방을 살폈다.

하나 주변엔 사체만이 가득했다.

수급이 잘린 흑괴단주는 바닥에 처참하게 자빠져 있었고, 그 옆에 휩쓸린 흑괴단원들이 나무토막이라도 된 것처럼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럼 일단 처음은 네가 창을 찌른 것부터 해야겠지?”

천휘가 가볍게 화월을 치켜들었다.

뾰족하게 날이 선 화월에는 아무런 기세도, 강기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는 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푹!

천휘는 화월을 그의 어깨를 찔러 넣었다.

“끄아아아악!”

풍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하나 천휘는 무덤덤하게 내려다보며 차가운 살기를 흘렸다.

“이 정도로 그러면 안 되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풍리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가차 없는 천휘의 목소리에 죽음의 기운이 풍겨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이를 악물고는 영사심결을 모두 해방했다.

몸 곳곳에서 선천지기가 들끓었다.

이내 그의 전신에서 묘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선천지기와 섞이며 순간 기묘한 광경이 벌어졌다.

스으으으―

그의 몸에서 백광이 흘러나오더니, 천휘의 발밑에 자욱하게 깔렸다.

마치 구름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음?”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발에 자욱하게 깔린 백광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히 괴상했기 때문이다.

음양오행의 기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역천의 기운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기운 같았다.

‘잠깐, 이거…….’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천휘의 눈동자가 명명하게 빛나는 그 순간.

스륵―

풍리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던 화월이 무언가에 밀려 나가듯 빠져나왔다.

이어서 풍리의 몸이 피처럼 새빨개지며, 심장 박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쿵! 쿵!

선천지기가 그의 혈도와 혈맥을 돌면서, 생기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놀랍도록 강렬한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부서진 파편들이 부유했다.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 공력의 파동이 그를 지키듯 호신강기를 이뤘다.

몹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그의 입이 열렸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굳건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벌려진 입에서 새하얀 수증기가 뿜어졌다.

이어서 그의 몸이 그대로 일으켜졌다.

누운 상태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몹시 신비로웠다.

곧이어 공력의 파동이 압축되며 그의 몸으로 흡수되려고 하던 찰나.

쩌어엉!

돌연 공력의 파동이 터져 나갔다.

“……!”

당황한 풍리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화월을 든 천휘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숨 막히는 공력을 흘리면서였다.

“설마 이걸 여기서, 그것도 네놈에게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과 함께 화월을 휙 털어 낸 천휘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미 한 번 본 내공 흐름이었다.

제대로 발동되기 전 중간에 끊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풍리는 모르는 일이었다.

“무, 무슨…….”

그의 눈빛이 혼란에 뒤덮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그가 펼치는 것은 주화입마에 드는 것도 감수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한데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때 천휘가 똑바로 몸을 일으킨 풍리와 두 눈을 맞추며, 입을 뗐다.

“혈룡문, 신필유사.”

불현듯 내뱉은 천휘의 말에 풍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무, 무슨 소리를…….’

혈룡문과 신필유사는 회에서 길러온 세작들이었다. 한데 약 일 년가량 전에 갑자기 멸문당하며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설마 이놈이……!’

그가 의심을 품은 그때.

“그리고 위유심공(僞有心功).”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말이 들려왔다.

풍리가 충격에 멍한 표정을 짓는 순간, 천휘가 씩 웃으며 입을 뗐다.

“역시 거기서 온 놈이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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