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28화 (328/391)

328화

“직접 알아보라는 것은 즉…….”

풍리의 목소리가 깊이 가라앉았다.

옅은 조소가 섞인 천휘의 말에 담긴 저의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알려 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군.”

탁한 음성이 뾰족한 가시처럼 천휘의 귓속을 파고들며, 빙빙 맴돌았다.

귀를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풍리의 감정이 은연중에 흘러나오며 목소리에 그 기운이 섞인 탓이었다.

당혹, 의문, 분노.

그의 감정이 격하게 요동쳤다.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구천압뢰는 련주와 백사신, 그놈만이 익힌 기공술이거늘. 대체 어찌 저놈이……?’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일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백회혈이 타 버릴 것만 같았다.

하나 그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만큼 예상하지 못한 이 상황이 그를 촉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련주가 새로이 제자를……?’

가장 먼저 떠오른 가정이었다.

그리고 최악의 가정이기도 했다.

일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만약 앞에 있는 저놈이 련주가 키워 내서 보낸 제자라면, 자신의 정체가 들켰다는 것과 일맥상통했으니.

하지만 곧 그는 그러한 생각을 떨쳐 냈다.

‘아니, 련주가 제자를 들였다면 이미 그에 대한 정보가 전해져 왔을 터. 거기에다 련주가 제자를 키웠다고 한들, 이런 짓을 벌일 리는 없다.’

풍리는 사흑련주를 떠올렸다.

고고하고, 압도적인 절세의 고수를.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다 해도, 바로 죽이면 죽였지, 이처럼 번거로운 짓을 벌일 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사흑련 내 누군가 내 정체를 알아내서 보낸 자였다면 다른 무엇보다 흑괴단을 먼저 회유하려고 했겠지.’

들끓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았다.

구천압뢰가 펼쳐진 것에 혼란스러워졌던 그의 이성이 냉정을 찾아갔다.

‘즉 사흑련과 관계가 없는 놈이라는 것인데…….’

그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사흑련에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안심이 되었지만, 앞의 놈이 오리무중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천압뢰를 익힌 것이지? 설마 백사신이 죽기 전에 다른 제자를 들이기라도 했다는 건가?’

풍리가 정체불명의 적을 앞에 두고, 사흑련주와의 관계를 배제하는 대신 백사신과 엮어 그 정체를 파악하려 할 무렵이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걸.”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월을 축 늘어트린 천휘가 한쪽 입매를 와락 비틀어 대고 있었다.

천휘는 그를 쉬이 죽일 생각이 없었다. 받은 만큼, 아니. 그것의 배 이상으로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해서, 혼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제는 밝혀도 상관이 없는 자신의 정체를 계속해서 숨기는 것도.

백사신의 독문 무공이자 기공술, 구천압뢰를 펼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오직 그를 농락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상대로 성공했다.

의문과 혼란이 뒤섞인 풍리의 눈동자를 마주한 천휘가 화월을 들었다.

매화신공의 공력을 화하면서였다.

그 순간 미풍이 불어오며 자수조차 없는 흑색의 장포가 밑단부터 펄럭였다.

스으으―

흘러나온 공력이 그의 발밑에 가라앉은 먼지를 사방으로 밀어냈다.

흑색의 단조로운 복장을 하고 흐르는 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은 모습이었는데도,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천휘를 마주한 풍리는 생각하던 것을 끊으며 경계했다.

불어오는 미풍에 살갗이 따가웠다.

미풍에 어려 있는 무색의 기파에는 근본적으로 깊은 공력이 담겨 있었다.

상대는 고수였다.

이토록 잡다한 생각을 하는 상태로 맞설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잠시 천휘를 노려보던 풍리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눈초리를 날카롭게 뜨면서였다.

대호와도 같이 매서운 안광을 발한 그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더 말해 봤자 소용이 없겠군.”

그가 말을 끝맺은 순간.

콰직!

바닥이 부서지며 회색의 무복을 입은 세 명의 무인이 위로 솟구쳤다.

기세가 심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몸 주변으로는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기파를 흘리면서였다.

풍리의 입매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비록 숨어 있다 나타나긴 했으나, 셋은 그저 그런 이들이 아니었다.

잔혈마도(殘血魔刀) 홍소약(紅小弱), 낭살검(狼殺劍) 삭일(朔日), 음살귀(蔭殺鬼) 고악영(高嶽永).

흑괴단원이기 전에 강호에 그 이름을 드높였던 사파의 거두들이었다.

바닥을 뚫고 가장 먼저 천휘의 지척까지 당도한 단발머리의 여인, 잔혈마도가 등 뒤에 맨 거도를 거침없이 뽑았다.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솟구쳤다.

강렬하게 발현된 내공이 거도에 똬리를 틀면서 벼락처럼 내리쳤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뒤이어 천휘의 옆구리에 파고든 낭살검이 협봉검을 화살처럼 찔렀고, 그 반대편에서는 음살귀가 비도를 쏘았다.

제대로 짜인 합격진이었다.

전방, 우방, 좌방.

천휘는 삼방에서 이루어진 합격진을 무심한 눈으로 보며, 입을 뗐다.

“언제 기어 나오나 했네.”

천휘는 진작에 그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기척을 숨긴 채 이 밑에 층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는 것까지.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훑어본 천휘가 발끝을 놀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쐐애애애액!

잔혈마도의 거도가 단숨에 천휘를 정수리부터 그대로 갈라 버렸고, 협봉검과 비도가 그의 몸을 관통했다.

“……!”

그와 동시에 셋의 눈이 커졌다.

분명 그들의 공격은 적에게 제대로 박혔건만, 손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통과해 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콰아앙!

천휘가 있던 바닥이 산산이 부서지며, 나무 파편이 허공에 나부꼈다.

그걸 본 셋의 눈살이 구겨졌다.

자신이 베어 냈다고 생각한 천휘의 신형이 흐릿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형환위……!’

동시에 깨달은 셋이 다급히 시선을 교환하는 그때.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그들의 귀를 울렸다.

바로 뒤에서였다.

놀란 그들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화월을 가슴께까지 든 천휘의 모습이 있었다.

셋은 황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나 그보다 먼저.

번쩍!

불현듯 일어난 적빛의 기파가 너울지며, 셋을 삽시간에 스쳐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한 줄기의 붉은 혈흔이 새겨졌다.

천휘는 좌에서 우로 그었던 화월을 거두면서,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세 명과 차례로 두 눈을 맞췄다.

잠시 뒤.

촤아악―

피가 사방에 솟구쳤다.

경악에 부릅뜬 그들의 두 눈동자가 점점 빛을 잃어 갔다.

이윽고 수급과 함께 사체 셋이 쓰러지며, 뚫린 바닥으로 추락했다.

뒤늦은 ‘쿵’ 소리가 일었다.

밑에서부터 먼지가 올라왔다.

하지만 천휘는 그곳에 눈길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매서운 기파가 팔방에서 몰아쳐 왔기 때문이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흑괴단원들이 천휘가 검을 거둔 그 찰나를 노리고 전방위를 덮치며, 공격해 왔다.

사아아악!

전방위에서 경파가 몰아쳤다.

한 명, 한 명이 최소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내지르는 공격에 대기가 크게 일렁거리며, 찢길 듯 굉음을 터트렸다.

그들이 휘두른 날카로운 칼날과 쇠붙이들이 천휘를 쇠꼬챙이처럼 찔러 버리려고 하던 그때.

파락―

천휘의 새까만 장포가 펄럭였다.

어느새 들린 화월의 검신은 옆으로 고이 누운 채, 검강을 피우고 있었다.

동시에 천휘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공력이 전방위에서 그를 압박하고자 뿜어진 경파를 압도했다.

그걸 본 풍리가 움찔했다.

“후퇴해라!”

화월에서 흘러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세를 읽은 그가 소리쳤지만.

번쩍!

화월은 이미 휘둘러진 뒤였다.

찰나 지간에 종으로 그어진 궤적은 분분히 나뉘며, 순간순간 끊어져 보였다.

잔상이었다.

천류신화검(天流神華劍).

미완성인 채로 수백 년 동안 암향비동에 간직되어 있었던 극한의 쾌검이 펼쳐진 것이다.

쩌어어엉!

전방위에서 덮치던 병장기들이 천류신화검에 속수무책으로 부서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커헉!”

“컥!”

부서진 병장기를 쥐고 있던 흑괴단원들이 토혈을 뱉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천류신화검의 여력이 병장기를 타고서 그들의 혈도를 찢은 것이다.

열댓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천휘는 다시 화월을 들었다.

곧 적광이 화월의 움직임을 따라서 아름다운 궤적을 기다랗게 그렸다.

‘아직이야.’

천휘가 공력을 발산했다.

돌연 천휘의 시야가 확 트였다.

백회혈을 자극한 공력이 일순간에 그의 기감을 드넓게 만들었다.

반경 십 장이 그의 아래 놓였다.

지금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이들은 고작 이 정도의 인원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건 일부일 뿐.

최소 칠십 이상이 포위 중이었다.

그들을 파악한 천휘는 다시 화월에 내공을 주입하며, 진각을 밟았다.

콰직!

그의 발바닥을 중심으로 바닥에 균열이 일며, 충격파가 사방에 퍼졌다.

그리고 그 순간.

휙!

천휘의 신형이 명멸하며, 쏘아졌다.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풍리의 앞까지 도달한 천휘가 화월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압도적인 속도의 쾌검.

천류신화검이 다시 펼쳐진 것이다.

‘계속 숨어 있을 요량이라면…….’

천휘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들을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끌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간단했다.

이 앞의 적, 풍리를 공격하는 것.

쐐애애액!

적빛의 검로가 잔상을 남겼다.

매화신공의 공력이 실린 화월의 검강이 그 흔적을 짙게 남긴 것이다.

“……!”

풍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쉽게 당할쏘냐!’

풍리의 전신에서 공력이 흘러나오며, 순백의 갑주가 영성을 발휘했다.

선천지기를 다루는 영사심결.

생명력을 갉아먹는 만큼 그 공력은 다른 내공심법보다 더욱 정순하고 강했다.

고강한 기운이 좌수로 향했다.

저릿저릿한 기파가 활짝 펼쳐진 장심에서부터 어깨까지 뻗쳐 나왔다.

동시에 발뒤꿈치가 들렸다.

무게가 실린 가죽신의 앞코가 균열이 일어난 바닥을 거칠게 짓밟았다.

쩌저저적!

부서진 바닥이 갈라지며, 솟아났다.

그 속에서 풍리는 어깨의 천정혈에서부터 시작된 공력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장심까지 밀어냈다.

온 무게와 힘을 실은 장법.

사극인혈장(邪極引血掌)이었다.

활짝 펼쳐진 손바닥이 오른 어깨를 베어 버릴 심산으로 날아드는 검과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둔중한 진동이 사방으로 번졌다.

화천루가 크게 들썩거렸다.

둘이 디디고 있던 바닥은 원형으로 크게 내려앉았고, 나무판자가 자연의 섭리를 벗어난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

모든 것을 베어 버릴 것만 같던 검의 궤적은 흔적도 없이 흩어져 갔다.

대신 공간엔 혈향만이 가득했다.

“조금 얕았네.”

천휘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짙은 혈향이 풍겨 나오는 곳, 정면에 있는 풍리를 보면서였다.

그의 좌수는 성치 않았다.

화월의 검신이 활짝 펼쳐진 손바닥을 정확히 파고들어 그의 중지와 약지, 소지를 완전히 잘라낸 것이다.

주르륵―

풍리는 엄지와 검지만 남은 좌수를 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핫!”

“뭐야, 고작 그걸로 정신 줄 놓은 거야?”

천휘가 비꼬듯이 말할 때.

“잊고 있는 게 있나 보군.”

풍리가 입매를 더욱 비틀었다.

이어 사나운 눈빛을 발한 그가 고개를 들어서, 입을 달싹였다.

“흑괴단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남자가 위에서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육척장신에 빼빼 마른 남자였다.

하나 천휘는 그러한 그의 모습보다도 그가 손에 든 것에 눈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손에는 깜빡 잊고 있던 호광개의 목덜미가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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