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얼핏 가벼워 보이는 행동도 지고한 경지에 오른 고수가 의념을 담는다면 고절한 결과를 부르는 법이었다.
바로 지금의 천휘가 그러했다.
그는 그저 걸음을 걸었을 뿐이지만, 그 결과는 실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저벅. 저벅.
내디딘 발바닥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강렬한 진동이 파도처럼 퍼졌다.
그렇게 시작된 진동은 기둥과 벽을 넘어 끝내 화천루 전체에 골고루 전달되었다.
그그극―
화천루가 들썩이며 흔들렸다.
삐걱거리는 기둥과 벽 그리고 천장과 바닥 사이에서 먼지가 일어났다.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퍼졌다.
마치 이 무혈의 거리에 지진이라도 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하나 지진은 아니었다. 고작 단 한 명이 만들어 낸 현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당사자, 천휘는 유유자적한 발걸음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풍리를 향해서.
저벅. 저벅.
점점 증폭되는 발걸음 소리에 풍리의 눈썹이 한차례 크게 들썩거렸다.
언제 흔들렸냐는 듯 평정심을 되찾은 두 눈동자는 옅은 먼지를 뚫고 걸어오는 천휘를 응시했다.
그가 늘어트린 검이 노란 등불 빛을 분분히 흩트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고요히 걷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자루의 신검(神劍)이 노을을 반사하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침묵하고 있던 풍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마치 본좌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듯한 말투로군.”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강한 공력을 담아낸 채였다.
후우우웅―
순간적으로 그의 주변 대기가 일그러지며, 천장에서부터 떨어지는 먼지를 몸에 닿기도 전에 밀어냈다.
세밀하고, 정제된 내공 운용이었다.
그러한 풍리의 모습을 보았음에도, 천휘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잘 아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말하는 듯이 아주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천휘가 멈춰 섰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일 장.
언제든지 서로가 살기를 띠고 공격을 한다면, 바로 맞닿을 거리였다.
하나 풍리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선공(先攻)을 펼친다고 무조건 성공하리란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공을 펼치다, 오히려 빈틈이 드러나서 후공에 당할지도 모른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며, 긴장했다.
차분히 상황을 살피는 그의 머릿속은 더없이 차가워졌다.
앞에 있는 놈은 고수였다.
그것도 그저 그런 고수가 아닌, 여태껏 봐 온 자 중 수위를 다투는 경지의 무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영역에 들어서 놓고 선공을 펼치지 않는 것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음이 분명했다.
유순하게 올라가 있던 풍리의 입꼬리가 점점 기울어져 갔다.
이윽고 일(一)자가 되며, 굳어 버린 입이 천천히 열렸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무표정이었다.
“네놈의 기세는 인정하지.”
풍리가 천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본좌가 쉽사리…….”
하나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번쩍!
돌연 그의 시야가 빛으로 화했다.
온통 새하얗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그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거리를 벌려야 된다!’
생각과 동시에 그가 뒤로 몸을 빼려던 찰나, 새하얀 시야 속에서 불현듯 기나긴 지평선이 생겨났다.
하늘과 땅을 가르는 몽환적인 선.
그것은 천지를 가르는 검흔이었다.
촤아아악!
핏물이 꽃잎처럼 사방에 피어났다.
“큭!”
풍리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쥔 채였다.
풍리가 고개를 내려, 가슴을 봤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덧댄 무복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피로 범벅인 상처를 보여 주었다.
주르륵―
손가락 사이로 울컥 흘러나오는 핏물을 보던 풍리가 미간을 좁혔다.
그 순간.
스으윽―
덧댄 무복 위에 장포처럼 드리워져 있던 새하얀 공력이 돌연히 움직이며, 전신을 감쌌다.
마치 순백의 갑주(甲冑)를 걸친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기를 잠시, 그가 가슴을 쥐고 있던 손을 떼자.
뚝.
흘러내리던 피가 그쳤다.
그것은 무척 기묘한 일이었다.
분명 가슴팍에는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으나, 출혈이 완전히 멈춘 것이다.
“특이한 무공을 익혔는걸.”
천휘가 턱을 잡아당겨, 손으로 긁적이며 뇌까렸다.
그 서늘한 목소리에 다급히 고개를 든 풍리와 두 눈을 마주친 천휘는 무심한 눈빛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선천지기와 생명을 갉아먹는 무공이라니, 오래 살 생각이 없나 봐?”
천휘의 말에 풍리가 움찔했다.
어려 보이는 청년이 단번에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익힌 영사심결(靈死心結)을.
“그런데 그렇게 선천지기를 소모하면서까지 애쓸 필요 없어. 아까 말했잖아.”
천휘가 차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어 말했다.
“넌 편히 안 죽일 거라고.”
서늘한 살기가 드리워졌다.
위협을 느낀 풍리가 눈살을 구기며, 소리쳤다.
“흑괴단!”
그 직후.
피이이이잉!
사방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댔다.
화살이었다.
빛살처럼 쏘아진 화살들은 벽을 종이처럼 뚫으며, 천휘를 향해 쏘아졌다.
공력이 실린 궁술이었다.
삽시간에 지척까지 다가온 화살들을 본 천휘는 가만히 검을 들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리면서였다.
“쓸데없는 짓거리야.”
그 순간.
번쩍!
허공에 한 줄기 궤적이 그려졌다.
천휘가 곧바로 출수한 것이다.
화월이 은은한 적빛을 발하면서 단숨에 허공을 가르며 기류를 생성했다.
폭풍과도 같은 와류였다.
후우우웅!
거센 기운에 방 안의 물건들이 허공에 나부꼈다.
탁자와 의자는 물론이고 술병과 술잔, 음식들까지 와류에 섞여 갔다.
물건들이 부딪치고 깨지며 일어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강풍이 더욱더 거세져 갈 무렵.
콰지지지직!
일순간 공간이 압축되어 갔다.
“그건……!”
풍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천휘는 그런 풍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를 향해 공간을 압축시킨 일격을 떨쳐 냈다.
* * *
콰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무혈의 거리에 있던 자들은 폭발하는 화천루의 최상층을 보며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뜬금없는 재해였다.
순간 최상층에서 거센 돌풍이 몰아친다 싶더니, 단숨에 폭발한 것이다.
“미, 미친…….”
“저게 무슨 일이야?”
폭발에 놀란 몇몇이 주저앉았다.
엄청난 광경을 마주하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투두둑!
위에서 나무 조각과 깨진 병의 잔해 등 온갖 파편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허, 헉!”
화천루 근처에 주저앉은 이들이 떨어지는 파편을 마주하고는 공포에 질린 채로 있을 때.
홱!
불쑥 나타나 그들의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채는 손들이 있었다.
위적양을 비롯해 무공을 익힌 하오문도들이 루주의 명을 따라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하나 그것도 잠시.
“이대로는…….”
그들의 눈빛은 빠르게 암울해졌다.
무공을 익힌 하오문도에 비해 화천루 근처의 사람이 배 이상 많았다.
그들의 숫자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위적양이 안타까운 얼굴로 아직 구하지 못한 자들을 바라보던 그때.
휙!
허공에 그림자들이 불쑥 나타났다.
수십 명에 달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벌벌 떠는 이들의 목덜미를 낚아채더니, 빠르게 어깨에 올렸다.
파바밧!
수십의 그림자가 일사불란하게 그를 지나쳐서는 사람들을 구해 냈다.
순식간이었다.
위적양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보법만으로도 무위가 평범한 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저런 자들이 언제 무혈에……?’
위적양이 불현듯 나타나 움직인 그들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쉬지 말고, 얼른 움직여요!”
면사로 입을 가린 여인이 정신 차리라는 듯 말했다. 이어서 빠른 속도로 그를 지나친 여인은 어깨에 네 명의 기녀를 매고는 움직였다.
다급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안 그러면 휩쓸려요!”
위적양은 자신을 지나쳐 가는 여인의 다급한 외침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봤다.
‘이런 괴물 같은……!’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화천루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기파가 범람하며, 그를 덮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서, 서둘러야 한다!’
위적양은 재빨리 목덜미를 잡은 이들을 옆구리에 끼며 땅을 박찼다.
신법을 펼치면서였다.
하나 급히 움직이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빠르게 거리를 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파가 그를 뒤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타다닷!
쫓기듯 달리던 그는 눈앞에서 멍하니 화천루를 보는 이들에게 외쳤다.
“모두 뒤로 도망치시오!”
“흡!”
“으, 으아악!”
위적양의 사자후에 모여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쳤다.
순식간에 화천루 주변에 있던 이들이 썰물 빠지듯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삽시간이었다.
“헉, 헉.”
화천루와 떨어진 거리에 도착한 위적양은 옆구리에 낀 이들을 바닥에 털썩 내려놓으며, 숨을 크게 골랐다.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잠시간 숨을 고른 그는 이내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화천루가 보였다.
그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붉고, 노란 등불로 훤히 빛나던 최상층은 완전히 부서진 모습이었다.
그걸 본 위적양의 살이 떨려 왔다.
이렇게나 멀리 거리를 벌렸건만 공력의 파동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곳처럼 보였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기파였다.
‘……저런 자를 몰라봤다니.’
그가 숨을 죽이며 바라볼 무렵.
“감사를 표합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저와 일행 덕분에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주월향이 그들을 도운 면사 여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인데요.”
여인, 천향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 눈은 화천루를 향해 있었다.
화천루에서 먼지가 피어났다.
천휘가 한 행동으로 벌어진 일이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돕고 싶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히려 방해겠지.’
현재 무혈의 거리에 모여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보다 천휘를 잘 아는 그녀였다.
그에게 멸절대의 도움은 불필요했다.
‘우리는 사제의 명을 잘 따르기만 하면 돼.’
천휘가 내렸던 명령을 떠올린 그녀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일 무렵.
“총 팔십 명인가?”
화천루의 최상층에 선 천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면서였다.
밤하늘을 가렸던 천장이 훤히 뚫린 채로, 별과 달을 보여 주었다.
단 일격.
그 일격에 화천루의 지붕과 기둥 그리고 벽이 완전히 박살 난 것이다.
동시에 그가 턱을 내렸다.
그 앞에는 풍리가 있었다.
그는 이리저리 갈기처럼 사방으로 뻗친 채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을 매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네놈, 그걸 어떻게 익힌 것이냐.”
그의 목소리가 그르렁거렸다.
마치 짐승의 울음 같았다.
그의 눈빛이 사이하게 흔들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담으면서였다.
“이거?”
하나 그토록 크게 놀라는 풍리와 다르게 천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검을 가볍게 흔들면서였다.
그 순간 검 끝에서 일어난 풍압이 하나로 뭉치며, 구(球)를 생성했다.
놀라운 공력이 담긴 채였다.
풍리의 눈썹이 바짝 올라갔다.
역시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저것은 사흑련주와 백사신, 단 둘만이 익힌 기공술…….
구천압뢰(九泉狎牢)였다.
“어떻게 그것을!”
놀란 풍리를 본 천휘가 씩 웃었다.
조소가 섞인 말을 뱉으면서였다.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