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이튿날 저녁.
화천루는 어젯밤에 큰 소란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사 중이었으며, 심지어 방마다 손님들로 가득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이 무혈의 거리는 낭인들이 날뛰는 곳.
그간 독귀수의 호의로 인해 조용했던 것뿐이지, 무혈 곳곳에선 이런 소란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문을 닫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리고 천휘 또한 새로이 얻어 낸 방 안에서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칠현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제 곧 올 때가 됐어.’
천휘의 눈이 침잠했다.
어젯밤 들키자마자 도망갔었던 무인은 무혈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색혼수사보다 한두 수 위였다.
생각과 함께 그의 손이 움직였다.
머릿속으로는 전혀 다른 것을 떠올림에도, 연주는 계속 이어져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띠잉―
춘야몽의 마지막 음을 연주한 천휘가 칠현금에서 손을 뗀 순간.
“공자님, 여기 있습니다.”
“드세요.”
청화와 홍화가 바짝 달라붙었다.
태도가 더욱 극진해져 있었다.
어젯밤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대접에 더욱 성의를 더한 것이다.
“아름다운 연주였어요. 공자님.”
조심스럽게 술을 따르던 홍화가 천휘를 힐끗 보며 뺨을 붉혔다.
그 모습에 청화가 쓰게 웃었다.
나흘 전 연주 이후부터 청년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니, 어젯밤의 일 이후 그에게 빠진 듯했다.
‘헛된 마음을…….’
앞의 청년은 강호의 고수였다.
그것도 색혼수사를 일격에 쓰러트릴 정도로 엄청난 고수.
즉 기녀들인 자신들과는 사는 곳이 아예 다르다는 뜻이었다.
‘얼른 마음을 접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 사람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겠는가.
‘상처나 받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녀가 쓴웃음을 머금던 그때였다.
짝짝짝!
불현듯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창가 쪽에서였다.
청화와 홍화는 순간 숨을 삼켰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뿐인가, 어떤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건만 지금 창가에는 비루한 행색의 사내가 걸터앉아 있었다.
둘은 오들오들 떨었다.
어젯밤 느꼈었던 죽음의 공포가 지금 더욱 강하게 몰아치기 때문이었다.
“아주 뛰어난 기예로군.”
한편 사내는 두 여인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고, 입매를 바짝 끌어 올렸다.
오직 천휘만을 바라보면서였다.
“내공으로 음을 다스리고, 손 아래에 두다니 고절하기 짝이 없도다.”
사내는 마치 천휘의 연주에 관해서 모두 파악했다는 듯 입을 달싹였다.
“음공을 익혔는가?”
물음에 천휘가 씩 웃었다.
이미 연주하던 도중 그가 이 화천루에 온 것을 파악해 둔 상황이었다.
툭.
천휘는 칠현금을 내려놓고 그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뱉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면서였다.
“아니. 딱히 익히지는 않았는데.”
조소가 섞인 목소리에 사내, 풍리의 눈썹이 찰나지간 꿈틀거렸다.
“어려 보이거늘, 영 예의가 없군.”
“뭐? 예의가 없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 아니야?”
천휘가 입꼬리를 더욱 비틀었다.
완연한 비웃음이었다.
“함부로 방에 들어온 주제에.”
“…….”
풍리는 말없이 천휘를 노려봤다.
차갑고도, 싸늘한 눈빛이었다.
둘의 분위기에 청화와 홍화는 서둘러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렸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것이다.
둘이 불안에 떨며 눈치를 보는 그때.
“하하하핫!”
돌연 풍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공을 실은 것인지 순간적으로 화천루 건물 자체가 삐걱대며 흔들렸다.
“꺅!”
“꺄아악!”
청화와 홍화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화천루에 지레 겁을 먹으며, 서둘러서 벽에 찰싹 붙었다.
“으아악!”
“사, 사람 살려!”
그리고 밖에서는 이미 이 소란에 놀란 객과 기녀들이 뛰쳐나와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웃어 댔을까.
“귀청 떨어지겠어.”
천휘가 귀를 후비며, 입을 떼더니.
휙―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마치 벌레를 쫓아내는 듯한 그 손짓에, 순간 풍리의 눈이 굳었다.
‘……저것은?’
손짓이 바람을 일으켰다.
옅은 바람이었다.
하나 그 바람에 실린 경파는 폭풍과도 같은 광풍을 담아내고 있었다.
가볍게 휘두른 손동작도 고수가 펼친다면 절고의 수법이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앞의 청년이 선보인 손짓은 그것을 완벽히 보여 주었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시작된 경파가 방 안을 쓸어간다 싶은 순간.
쩌어어엉!
대기가 비명을 토했다.
동시에 내공이 실렸던 사자후가 갈기갈기 찢기며, 빠르게 흩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풍리가 웃음을 뚝 그쳤다.
동시에 흔들리던 화천루도 잠잠해지며, 고요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과연…….”
풍리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나 보군.”
“천방지축으로 날뛰진 않았는데.”
“색혼수사를 일격에 쓰러트리고 이렇게 무혈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겐가?”
“오, 그렇게 생각해?”
천휘가 재밌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한 대로 됐네.”
“원한 대로……?”
풍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언뜻 웃음기 가득했던 표정이 점차 무심해지더니, 어느새 딱딱한 가면과도 같이 무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노렸군.”
그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섰다.
마치 짐승의 목소리 같았다.
“본좌가 오기를.”
“맞아.”
반면 천휘는 가벼운 태도로 시원하게 말했다.
아주 산뜻해 보였다.
“그런데 조금 뜻밖인걸. 더 지켜보다가 움직일 줄 알았는데, 설마 바로 직접 올 줄이야.”
말과 함께 입매를 비튼 천휘가 풍리를 지그시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목을 끈 보람이 있어.”
천휘의 입가에 지어진 비웃음을 본 풍리가 몸을 꼿꼿이 세웠다.
차디찬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와, 방 안을 완전히 뒤엎었다.
“무림맹에서 온 것이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천휘는 놀리듯 말하며,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잡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 행동을 본 풍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술을 마셨다.
그것은 무림맹 소속이라면 그 범위가 빠르게 좁혀지는 일이었다.
‘이 정도 무위를 지닌 젊은 고수…… 무림맹은 아니다.’
무림맹의 후기지수 중 이만한 수준이라면 매화신협이나 옥기린 정도를 꼽을 수 있었다.
별동대가 만수문으로 향했다고는 하나, 빠져나와 여기에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은 각각 무당과 화산의 도사였으니, 눈앞에 청년은 아닐 터였다.
그의 콧잔등이 찡그려졌다.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무림맹의 정보는 다 파악했다고 들었거늘…… 혹 무림맹의 소속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건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던 풍리가 천휘를 응시하며, 입을 달싹였다.
“그 나이에 그 정도 무위를 지닌 자는 천하에 적다. 천하 삼대 기재라 불리는 아해들과 매화신협이 지금 그 정도의 무위를 지녔을 테지. 보아하니 그들은 아닌 것 같은데…… 네놈은 누구지?”
천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질문이네. 네가 물어보면 내가 곧이곧대로 알려 줄 것 같아?”
도발과도 같은 말이었다.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
“……오만한 놈이로군.”
풍리의 옷자락이 나부꼈다.
덧댄 의복 사이로 순백의 연기와도 같은 기운이 자욱하게 스며 나왔다.
신비롭고, 기이한 광경이었다.
마치 비루한 행색 위에 새하얀 장포를 걸친 것만 같은 모습이었으니.
그 속에서 그가 입을 달싹였다.
“네놈 같은 자들이 이따금씩 있지. 나이에 맞지 않은 실력을 얻어서 자신을 과신하는 경우가.”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자로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은 어느새 유순하게 올라가 있었다.
음침한 미소를 띤 채였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던 놈들의 끝은 대부분 일치한다.”
그 순간 그가 눈을 번뜩였다.
“바로 이놈처럼 말이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둘 사이로 큼지막한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쿵!
그것은 사람이었다.
전신이 피로 물든 것이 거의 사체 같아 보였는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인지 가슴이 살짝 들썩거렸다.
‘……이 기운은?’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반 사체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운은 너무나도 낯익은 것이었다.
때마침 풍리가 허리를 굽히더니 그자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쥐고는, 단숨에 번쩍 들어 올렸다.
“으…….”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휘는 풍리가 들어 올린 이의 얼굴을 보고는 입꼬리를 스윽 내렸다.
“이제야 웃음이 사라졌군.”
풍리가 턱을 치켜들었다.
조소를 머금으면서였다.
“네놈의 수하가 이 꼴이 된 것을 보니, 어떠하냐?”
천휘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킬 것 같으면 도망치라고 말했는데, 그걸 잡혀서는.”
호광개를 향한 핀잔이었다.
“그래도 저놈이 계속 내 정체를 물어보는 것을 보니, 정보를 내뱉지는 않았나 보네요.”
그 목소리에 호광개가 움찔했다.
이어 그가 입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를 낼 힘도 없는 것인지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자세한 건 나중에 듣죠.”
풍리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듯한 천휘의 태도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네놈들에게 나중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말하던 풍리가 좌수를 움직였다.
덧댄 소매가 순간 흐릿해지더니 그의 손이 기나긴 잔상을 그려 냈다.
그 목적지는 호광개의 목이었다.
휘이이―
손바닥에서 움튼 공력이 거칠게 폭사하며, 순식간에 돌풍을 일으켰다.
일순간 공기가 일그러질 정도였다.
이윽고 그의 손날이 호광개의 목을 관통하는 궤적을 완성했다.
후욱!
하나, 그의 손은 허공을 지나쳐 갔다.
“……!”
풍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들고 있던 자는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였다.
그리고.
“…….”
그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바로 눈앞, 청년이 자신의 손에 잡혀 있었던 이를 들고 있었다.
천휘는 호광개를 살펴봤다.
용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고문이라도 당한 것인지 상처가 가득했고, 칠공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심각한 얼굴이 된 그가 손끝으로 내공을 흘렸다.
내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속은 나은가.’
천휘가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다행히도 겉모습과 다르게 속은 엉망이 되거나, 부서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런 꼴이 됐으면서 잘도 아무 정보도 안 불었네.’
거의 초주검이 된 상태였다.
한데 이런 꼴로도 자신과 멸절대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은 것이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걸.”
작게 속닥이던 천휘가 그 상태로 호광개를 눕히고는, 옆구리에 찬 검집에서 화월을 뽑아냈다.
적빛이 감도는 은은한 검신이 노란 등롱의 불빛을 반사하며 흩뿌렸다.
순간 노을이 진 것만 같은 착각을 부르는 빛깔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넌 큰 실수를 저질렀어.”
나직한 목소리가 팔방에서 울렸다.
육합전성이었다.
들끓는 매화신공의 공력이 천휘의 음성을 증폭시키며, 공간을 삼켰다.
모든 것을 그 아래에 두었다.
풍리가 이를 악물었다.
육합전성은 어지간한 내공량과 내공 운용으로는 차마 따라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경지의 것이었다.
한데 앞의 청년이 해낸 것이다.
‘고수다.’
생각보다 더한 고수임을 깨달은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때 천휘가 다시 입을 달싹였다.
“나를 동요시켜 보겠다고, 저런 꼴로 만들었나 본데…… 그럴 것이라면 차라리 확실히 죽여서 데려왔어야 했어.”
말과 함께 천휘가 발을 내디뎠다.
저벅.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서늘하기 짝이 없는 무심한 목소리가 그 걸음을 뒤따랐다.
“그래야 편히 죽을 수 있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