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25화 (325/391)

325화

띠링―

화천루주 주월향은 밑에서 들려오는 선율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 고수가 머물기 시작한 지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에 그는 정확히 이 시간대마다 칠현금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는 감탄했다.

분명 첫날의 연주에서는 미비한 점이 살짝씩 엿보였었다.

음이 틀린다거나, 박자가 안 맞는 등의 실수.

하나 지금은 거의 완벽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지금 이 연주를 듣고자 일부러 화천루에 오는 자들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이 연주를 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자신을 찾는 자들까지 있었다.

유례가 없는 손님 몰이였다.

“대체 누구일까?”

바로 귓전에서 연주하는 듯한 선명한 선율을 음미하던 주월향이 감았던 눈을 뜨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청화와 홍화를 붙여서, 정체를 알아보려 했었다.

하나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대개 강호에 몸담은 무인은 명성을 얻기 위해 사는 족속들이었다.

해서, 무인이라면 자신이 어디의 소속인지 혹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소림의 붉은 가사 또는 화산의 매화 문양처럼 어떤 식으로든 단서를 남기는 것이다.

한데 청년에게서는 그 소속이나 정체를 추측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의복은 매일 갈아입어 특정할 수 없었고, 수실과 같은 장신구는 애초에 없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이라면 허리춤에 매는 두 자루의 검이었다.

‘두 자루의 검을 지녔다 하면 매화신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만…….’

현 강호를 격랑과도 같이 뒤흔들고 있는 청년 고수를 떠올리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물론 가능성은 있었다.

풍리와 흑괴단을 노리는 자들이라면 무림맹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이니.

하나, 얼마 전 받은 정보에 따르면 그가 소속된 무림맹의 별동대는 만수문으로 향했다고 한다.

물론 그가 대주로 있는 멸절대는 소수였으니, 따로 떨어져 나왔을 수도 있었다.

하나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그녀는 청년이 매화신협은 결코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한창 연주 중인 청년 고수는 육식과 음주를 즐겼다.

그가 만약 화산파의 도사인 매화신협이라면 당최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자다.’

주월향이 옅게 한숨을 내쉴 무렵.

“루주님.”

장지문 너머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오며, 큼직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위적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말씀하신 정보를 모아 왔습니다.”

주월향의 눈이 반개했다.

“들어와라.”

드르륵―

장지문이 열리고, 위적양이 들어왔다. 품에 많은 종이를 안은 채였다.

저벅― 저벅―

주월향 앞에 다가온 그는 품에 있던 종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말을 덧붙이면서였다.

“사흘 전에 무혈에 입성한 후 아직 떠나지 않은 자들의 명부입니다.”

주월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라.”

간단한 대꾸에 위적양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이윽고 장지문이 닫히자.

스윽―

주월향의 눈이 종이를 담았다.

풍리와 흑괴단을 처리하기 위해 온 자라면 결코 혼자 왔을 리 없었다.

“만약 저 청년이 무림맹에서 온 자라면 이 중에 일행이 있을 터…….”

그녀가 종이를 하나씩 읽어 갈 무렵.

띠잉―

천휘는 여전히 현을 뜯으면서, 매화신공의 공력을 아주 세밀하게 운용하는 중이었다.

매화신공의 공력이 오른 어깨의 견우혈(肩髃穴)을 따라 흘러서 팔꿈치의 척택혈을 지나 손가락에 맺혔다.

천휘는 바로 그때 현을 튕기며, 흘러나오는 선율에 공력을 실었다.

낮고, 묵직한 선율이 증폭되며 팔방에서 울렸다.

‘이제 자연스럽네.’

한편 맞은편에 앉은 청화와 홍화는 몽롱한 눈으로 음에 빠져든 채였다.

바로 귓전에서 연주하는 듯 선명한 선율이 귀를 간질이고 있었다.

그녀들은 멍하니 천휘를 응시했다.

그가 현을 뜯을 때마다 아롱거리는 등롱 불빛이 흔들리며, 은은한 색채를 흩날려 댔다.

그 빛깔들과 어우러져 금을 연주하는 광경은, 마치 산신이 내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띵―

불현듯 천휘의 손이 멈췄다.

“아.”

그러자 옅은 탄식이 동시에 울렸다.

화천루에서 연주를 듣던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아쉬움을 뱉은 것이다.

‘조금만 더 듣고 싶지만…….’

청화는 생각을 빠르게 지웠다.

사흘 동안 그는 이렇게 연주를 시작한 뒤, 딱 한 곡만을 연주하고 미련이 없다는 듯 관두곤 했으니까.

곧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휘에게 바짝 다가가서는 칠현금을 대신 들자, 함께 다가온 홍화가 입을 열었다.

“공자님. 한잔 따르겠습니다.”

청화가 칠현금을 정리하는 동안, 홍화가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신속한 행동이었다.

사흘 동안 모시면서 그녀들은 청년과 친분을 쌓고자 많은 걸 해 봤다.

아양도 떨어 봤고, 유혹도 해 봤다.

하나 그에겐 전혀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와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특별히 매몰차게 대하거나 한 게 아니었음에도, 그 태도에서 명확한 선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이후부터 아양이나, 유혹 같은 것은 모두 관두고 이렇게 술과 음식만을 대접했다.

그때였다.

“음?”

갑자기 고개를 위로 든 청년이 천장을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뗐다.

“이제야 왔네.”

“공자님?”

“무슨 말씀을…….”

청화와 홍화가 뜬금없는 천휘의 말에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마찬가지로 천장을 바라보던 그 순간.

쿵!

천장이 갑자기 들썩거렸다.

마치 파도가 출렁거리는 것처럼 천장의 중심부터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콰아아앙!

천장이 부서져 내렸다.

“꺄아악!”

“꺅!”

청화와 홍화는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파편들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가올 충격에 대비해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흘러도 충격은 그녀들의 머리에 닿지 않았다.

둘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인 광경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휘가 그녀들의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부서져 내린 나무 파편들이 나부꼈다.

그와 그녀들이 있는 곳만 제외하고.

“공자님께서 구해 주신 건가요?”

“공자님…….”

천휘가 자신들을 구해 준 것을 알아챈 그녀들이 감동한 눈빛으로 입을 떼는 그때.

“저쪽인가?”

천휘는 그녀들의 말은 전혀 듣지도 않는다는 듯 다른 방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 도망친 놈의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대협!”

“무슨 일입니까?!”

밖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주월향과 화천루의 시비들이 달려온 것이다.

곧 방에 온 그들은 숨을 삼켰다.

가만히 눈을 반개한 천휘의 안광을 마주한 순간, 머리가 하얘졌기 때문이다.

천휘는 뒤늦게 넋을 놓은 채 입을 벌린 그들을 힐끗 보더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삽시간에 안광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가 그들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쥐새끼 좀 잡느라고요.”

“쥐새끼……?”

순간 주월향의 표정이 굳어졌다.

쥐새끼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적양.”

그녀는 재빨리 위적양을 불렀다.

“쥐새끼가 누군지 알아내요.”

“알겠습니다.”

위적양이 서둘러 나가고, 주월향은 천휘에게 다가가 바로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본 문이 철저하게 감시를 했더라면…….”

“아뇨. 됐어요.”

천휘가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그쪽이 철저하게 감시했다고 해도 못 잡았을 텐데, 뭐.”

“…….”

주월향이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쓰리지만, 사실이었다.

일이 터지기 전은 물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누구도 그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지 않나.

천휘는 얼굴을 구기는 주월향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그보다 다른 방은 없나요?”

주월향이 바로 몸을 돌렸다.

“대인께 다른 방을 안내하거라.”

* * *

“헉, 헉!”

화천루를 빠져나온 성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삐 앞으로 내달렸다.

그는 흑괴단 소속의 무인이었다.

흑괴단은 예로부터 암살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집단으로 기척을 죽이는 것에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 또한 그러했다.

아무리 무극지경의 고수라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은밀한 운신이 가능한 그였다.

하여, 사흘 전 무혈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청년 고수에 대해 알아 오라는 임무를 받고 화천루에 들어섰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임무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최선을 다해 은밀하게 잠입한 것이었건만. 바로 들켰다.

‘단주님께 얼른 알려야 해.’

그의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무혈에 들어온 이후 내내 숨어 지냈으니, 자신을 봤다고 해도 이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둘렀다.

도망치기 전 찰나지간에 마주한 그의 서늘한 시선 때문이었다.

‘괴물이야!’

한편 그가 달려 나가는 것을 멀찍이서 몰래 쫓아가는 자가 있었다.

“무혈이 아닌, 밖인가?”

단정하게 무복을 입은 청년.

호광개였다.

“대주 말대로 되기는 했는데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발을 뗐다.

바짓단이 살짝 팔락거리며 그의 신형이 한순간에 앞으로 쏘아졌다.

만리추풍신법(萬里追風身法).

개방의 무공 중에서도 속도로는 제일이라는 신법이 펼쳐진 것이다.

“쩝,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

그들의 임무는 하나였다.

이목을 집중시킨 천휘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니, 그런 이들이 출몰하면 그 뒤를 쫓아 그들이 있는 곳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바로 찾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얼마나 쫓아갔을까.

“음?”

호광개가 빠르게 기척을 죽였다.

달려가던 이가 멈춘 것이다.

“이런 곳에 장원이?”

호광개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천루에서 도망친 남자가 거의 폐가나 다름없어 보이는 장원에 들어간 것이다.

그걸 본 그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찾았어.”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던 그때.

“무엇을 찾았단 거지?”

서늘한 목소리가 등을 간질였다.

“흡!”

화들짝 놀란 호광개는 황급히 왼발을 축으로 삼아, 발을 돌려 찼다.

회선각(回旋脚)이었다.

후우우웅!

백결공의 공력이 정강이와 허벅지에 실리며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웬만한 무인이라면 뼈도 못 추릴 일격이 펼쳐졌다.

그러나.

턱.

그의 발은 중간에 ‘턱’하고 멈췄다.

“무슨……!”

당황한 호광개가 고갤 돌렸다.

때가 묻은 더러운 손이 그가 휘두른 발목을 우악스럽게 잡고 있었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쑤욱!

호광개의 시야가 반대로 뒤집혔다.

발목을 잡은 손에서 거센 힘이 느껴진다 싶더니, 그의 몸이 통째로 들린 것이다.

“헙!”

거꾸로 선 호광개가 당혹감을 삼키며, 턱을 잡아당겨 위를 바라봤다.

비루한 행색의 사내가 자신의 발목을 움켜쥔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기 어린 말을 흘리면서였다.

“네놈은 누구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