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24화 (324/391)

324화

돌연 나타난 청년 고수의 등장에 무혈의 거리가 크게 들썩였다.

“거, 그 청년 고수가 겨우 일격에 색혼수사를 기절시켰다지 뭔가?”

“일격은 무슨 일격인가. 청년이 던진 술잔에 이마가 깨진 거라네.”

“뭐? 던진 술잔에? 그게 말이나 되는가?”

“믿기 힘들어도, 사실이네.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

채 한 시진도 지나지 않은 일이건만, 거리 곳곳에 있는 객잔과 기루는 그 이야기로 한창 떠들썩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행방불명이 된 독귀수를 대신해서 무혈 제일 고수의 자리를 차지한 색혼수사라지만, 그 또한 그 전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고수였다.

그런데 그가 일격도 아닌 고작 던져진 술잔에 기절하고 만 것이다.

누구인지 모를 청년 고수에게.

“대체 누구지?”

“어디 문파의 소속일까? 아니면 낭인?”

떠들던 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의 끝이 향하는 곳은 무혈에서 가장 높은 전각, 화천루였다.

무혈은 여타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다스리고, 통제하는 문파가 없었다.

그 때문일까.

무혈의 판도는 고수 한 명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기 마련이었다.

전에는 무혈 제일 고수였던 독귀수의 아래 상인과 낭인들이 눈치를 살폈었고, 그 뒤를 이은 색혼수사의 영향에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무혈에 터를 둔 이들은 긴장한 얼굴로 화천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화천루에 들어간 청년 고수에게 귀추를 집중한 것이다.

그냥 무혈을 지나쳐 가는 자일지.

아니면 독귀수, 색혼수사에 이어 무혈의 거리를 지배하기 위해서 나타난 자일지.

한편 그들이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청년 고수, 천휘는 흡족해하고 있었다.

“괜찮네요.”

청화와 홍화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방은 마음에 쏙 드는 곳이었다.

방 안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술병들이 꽉꽉 채워 올려져 있었다.

“상당히 눈치가 좋네요.”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빙그레 웃으며 말하던 청화는 잰걸음으로 탁자로 걸어가,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준비되어 있던 술잔에 따랐다.

부드러운 주향이 방에 가득 찼다.

“대인, 앉으시지요.”

청화가 의자를 꺼내며 말하자 천휘가 성큼성큼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호쾌하게 술잔을 들어 그대로 술을 들이켰다.

“크, 시원하네요.”

넘기는 맛이 깔끔했다.

명주라 칭해도 좋을 정도였다.

“무슨 술이죠?”

“루주님께서 직접 담그신 홍아주입니다.”

청화가 이어서 술을 따르며 대답했다.

화천루는 지금처럼 번성하기 전부터 루주가 담근 술맛은 인정받는 곳이었다.

괜히 그녀의 가명이 술과 달, 그리고 향기라고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 참, 대인.”

갑자기 청화가 무언가를 깜빡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그냥 식사만 하시기에는 심심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살갑게 말했다.

화천루가 이렇게 커진 데에는 여타 다른 기루들과 차별화된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첫 번째가 루주인 주월향이 담근 술이었으며, 두 번째는 바로 기녀들이 지닌 재주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자신과 홍화의 재주를 선보일 생각이었다.

“괜찮으시다면 대인께 미숙하나마 연주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만…….”

천휘가 피식 웃었다.

그녀들의 의도야 뻔히 보였다.

어떻게든 호감을 쌓으려는 것이다.

‘쓸데없는 짓이지만.’

이미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이상에야 그들의 뜻대로 흘러가긴 힘들었다.

천휘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해 봐요.”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물론이고 홍화 역시 뒤로 물러나며, 미소를 지었다.

곧 청화는 방의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칠현금을 꺼냈고, 홍화는 소매 안에서 자그마한 소(簫)를 꺼냈다.

붉은색이 인상적인 퉁소였다.

각자 악기를 준비한 둘은 다소곳하게 앉았다.

그 움직임에 따라서 은사로 수놓은 비단옷이 출렁거리다, 가라앉았다.

이내 둘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둘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곧장 홍화가 소를 들었다.

그녀의 붉디붉은 입술이 소에 맞닿고, 청량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옆의 청화가 곧게 뻗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소매가 펄럭이며, 현을 뜯었다.

띠디딩―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금과 소, 두 악기의 화음은 방 안에 부드러운 물결을 일으켰다.

낮고, 높은 두 음은 상당히 조화로웠다.

현을 뜯는 음이 경쾌하게 울리는가 싶으면, 그 뒤를 퉁소의 시원한 음이 바짝 뒤쫓아갔다.

서로 경쟁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때는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음률을 흘렸다.

“음, 나쁘지 않은걸.”

천휘가 술잔을 기울이며, 들려오는 소리를 즐겼다.

전생에 천마신교의 교주였던 그에게 지금의 음악은 굉장히 뛰어난 연주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즐거웠다.

오랜만의 여흥이지 않은가.

귀를 간질이는 선율이 묘한 파동을 일으키며, 천휘의 몸을 감싸고 흘렀다.

천휘는 지그시 둘을 바라봤다.

그녀들의 손가락과 입술에 희미한 공력의 파동이 흘렀다.

음공(音功)이었다.

‘잠깐…… 저거 쓸 만하겠는데?’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 떠오른 천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변복하고, 정체를 숨긴 채 무혈에 입성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풍리가 숨는 것을 막고 도리어 그를 끌어내는 것.

가뜩이나 첫 정보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풍리와 흑괴단이었다. 만약 그대로 들어왔다면 더 깊이 숨거나, 지원을 요청할지 몰랐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인물이 불쑥 나타난다면 그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전쟁 중인 상황에선 어디 소속인지, 누구인지 판단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천휘는 그 점을 노렸다.

그래서 천휘는 일부러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대놓고 색혼수사가 있는 곳을 찾아간 것이었다.

설마 그렇게 대뜸 시비를 걸어 빠르게 쓰러트리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냥 놔뒀더라도 천휘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나 막상 일이 잘 풀렸음에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느꼈는데.

‘저걸 이용하면…….’

천휘의 눈동자가 침잠할 무렵.

띠잉―

때마침 연주가 끝을 맺었다.

“어떠셨는지요?”

혼신의 연주를 마쳐 여운이 남은 듯한 청화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언뜻 자신감을 드러내면서였다.

“좋네요. 무슨 곡이죠?”

“춘야몽(春夜夢)이라 하옵니다.”

“봄 저녁의 꿈이라…….”

썩 어울리는 곡명이었다.

따스하면서 차갑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연주였으니.

천휘는 곡명을 잠시 되새김질하다가, 손을 뻗으면서 입을 달싹였다.

“잠깐 칠현금 좀 빌리죠.”

그 말이 끝난 순간.

“……!”

청화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릎에 고이 올려 두었던 칠현금이 갑자기 공중에 둥실 떠올랐기 때문이다.

툭.

옆에서 퉁소가 밑으로 떨어졌다.

홍화 또한 지금 벌어지는 놀라운 광경에 넋을 잃은 채 입을 벌리며 손에 힘이 풀리고 만 것이다.

청화와 홍화는 말을 잃고 말았다.

강호의 고수는 산을 부수고, 강을 가른다는 풍문을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라 생각해 왔거늘.

지금 그녀들의 눈에 산신이 행할 법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둘이 멍하니 보는 가운데.

스르륵―

공중에 뜬 칠현금은 단숨에 천휘의 앞까지 도달했다.

‘어떻게 했더라?’

천휘가 칠현금을 내려다봤다.

전생을 통틀어도 직접 악기를 연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여태껏 그가 봐 온 연주한 이들의 손놀림이 남아 있었다.

천휘가 손가락을 뻗었다.

칠현금의 현을 향해서였다.

따랑―

현이 뜯기며, 울음을 토했다.

하나 약간 어색했다.

‘이게 아닌데.’

천휘는 조금 전에 청화가 선보였던 연주를 다시금 자세히 회상하며, 손가락을 놀렸다.

땅, 따라라랑.

길고 가는 손가락이 칠현금의 일곱 개 현을 거침없이 뜯었다.

낮고, 묵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청화의 연주와는 상반된 소리였으나, 그 순간 천휘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이거야.’

감을 찾은 천휘가 손을 놀렸다.

청화가 보였던 내공의 운용을 떠올린 천휘의 손가락이 현을 울렸다.

화아악―

일순간 그의 손끝에서 내공이 피어오르며, 흘러나온 선율을 증폭했다.

‘이대로 음을 사방에 퍼트리면.’

생각이 바로 실행으로 옮겨졌다.

우우우웅―

내공이 실린 소리는 대기를 울리면서 이 방을, 나아가 화천루를 짓눌러 갔다.

그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청화와 홍화는 등 뒤에서 소름이 돋아 몸을 곧추세웠다.

오싹했다.

분명 칠현금을 뜯는 천휘의 자세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방금 전까지 흘러나오던 연주도 능숙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선율이 남달랐다.

‘장강의 물결 같아.’

‘춘야몽은 부드럽지만 차가운 연주였는데…… 이토록 강렬하다니.’

둘은 마치 장강의 물결이 덮쳐 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둘만이 아니었다.

“…….”

화천루가 부지불식간 조용해졌다.

술을 마시면서 떠들던 객들도, 그들에게 웃음 짓던 기녀들도.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갑자기 들려온 금 음에 귀를 기울였다.

복도를 지나가던 이들도 발을 멈췄다.

그저 다들 눈을 감으며, 낮고 묵직한 선율을 음미했다.

“으음, 좋은 연주로다.”

“누가 연주하는 것일까?”

그렇게 모두가 귀를 기울이며 연주에만 집중하기를 얼마나 되었을까.

띵―

천휘가 손을 멈췄다.

이미 현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연주가 끝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화천루는 고요했다.

누구 하나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천휘가 연주한 춘야몽의 여운에 취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편 연주를 마친 천휘는 여상한 얼굴로 칠현금을 옆에다 놓았다.

나지막한 속닥임을 흘리면서였다.

“조금 아쉬운 연주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화천루가 기감에 모두 잡혔다.

넋을 놓은 이들은 물론이고, 기척을 숨긴 채 몰래 지켜보는 이들도.

바삐 움직이는 그들의 기감을 느낀 천휘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한파와도 같은 차가운 미소였다.

‘저놈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 * *

오직 호롱불만이 일렁거리는 어두운 방 안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비루한 행색의 사내, 풍리였다.

“흥미롭군.”

그의 눈빛이 어둠에서 번뜩였다.

차갑고도, 서늘한 눈빛이었다.

“이제 막 약관을 넘은 듯 보이는 청년 고수라.”

푸른 눈동자가 앞을 쏘아봤다.

“정체는 파악했나?”

물음에 앞의 어둠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곧 회색의 무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확인 중에 있습니다.”

“하오문은?”

“그들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까다롭군.”

풍리가 앉은 채로 다리를 꼬았다.

그에 남자가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무림맹의 별동대는 무혈을 지나쳐, 만수문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무혈로 오지 않고?”

“그렇습니다.”

풍리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무림맹이 비천회와 손을 잡은 건가?”

“그것은 아닐 겁니다.”

남자가 나직이 대답했다.

“만약 두 곳이 손을 잡았다면 만수문으로 향하기 전에 이미 합류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지?”

“아직 정확한 것은 파악 중입니다만, 아마 남궁세가가 정말 만수문을 습격하는 것인지 먼저 알아보려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무림맹으로서도 비천회의 동향에 예민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혹은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다른 꿍꿍이라.”

“그 수가 많긴 하나, 분명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한데 일부러 행적을 알리는 것처럼 대놓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끼일지 모른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풍리가 턱을 매만졌다.

비천회를 견제하는 것과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둘 다 납득이 가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정답일지는 지금처럼 부족한 정보로는 알 수 없었다.

곧 그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쨌거나 참 아쉽군.”

사나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오래 굶은 짐승이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무림맹의 별동대가 이쪽으로 온다기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거늘.”

사내가 순간 목을 움츠렸다.

일순간 자신의 목이 이빨에 뜯겨 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사나운 기세였기 때문이다.

사내는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삼키며,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정보가 퍼졌으니, 후에라도 올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를 압박하던 기운이 단숨에 해소되었다.

곧 풍리의 안광이 빛을 발했다.

“꼭 그랬으면 좋겠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그가 다시 입을 뗐다.

“더 보고할 것은?”

“없습니다.”

“그럼 나가도록.”

“존명.”

풍리의 축객령에 회색의 무사가 빠르게 사라졌다.

곧 적막이 방 안을 감쌌다.

“예상과 다르게 전쟁이 꽤나 길어졌단 말이지. 이대로라면 둘 다 무너질 수도 있겠어.”

중얼거리던 풍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흔들거리는 호롱불을 응시했다.

곧 그의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그가 호롱불을 향해서 입김을 내뿜었다.

잠시 뒤 방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지고,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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