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화천루의 최상층.
확 트인 창가에 선 주월향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무혈의 거리가 한눈에 담겼다.
거리는 사람으로 빽빽했다.
호객 행위를 벌이는 이들, 그들을 따라서 객잔과 기루에 들어가는 손님들, 그리고 이미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사람들까지.
별의별 군상들이 다 모여 있었다.
초봄의 저녁엔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건만, 거리에 오가는 이들의 열기로 무혈 전체가 후끈거릴 정도였다.
‘이 거리가 위험해져서는 안 돼.’
불현듯 든 생각에 주월향의 긴 속눈썹이 떨렸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 억지로 거래를 맺은 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흑괴단과 풍리…….”
그들의 정체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읊조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붉게 물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깐 정보를 사고, 그대로 떠날 것 같았던 그들은 무혈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상당히 불안한 일이었다.
현재 강호는 무림맹과 사흑련의 전쟁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사흑련의 정예라 불리는 그들이 몸을 숨긴 채 움직이지 않고 무혈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니.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고…….’
그녀가 걱정을 감추지 못할 무렵.
“루주님.”
장지문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굵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청화(靑花)와 홍화(紅花)가 복귀했습니다.”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주월향의 어두워져 있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무혈의 거리는 무법지대였다.
온갖 낭인들과 혈기에 가득 찬 취객들이 거리에 나돌아다니니, 사고가 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한데 그런 와중에서도 화천루는 큰 사건, 사고 없이 안전하게 하루하루를 보내 왔었다.
모두 독귀수 덕분이었다.
무혈 제일 고수인 그가 매일 화천루에 방문하니, 아무리 혈기가 왕성한 자들이어도 감히 소란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한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독귀수가 그들의 손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된 이후 화천루에서 사고를 치는 자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해서, 주월향은 독귀수의 뒤를 이어 무혈 제일의 자리를 차지한 색혼수사를 품기 위해 청화와 홍화를 보냈었다.
“색혼수사를 데려온 것이더냐?”
그녀가 곧장 물었다.
기대감을 품은 채였다.
하나 장지문 밖에서 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는 말이었다.
“색혼수사는 없었습니다.”
주월향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색혼수사가 없이 돌아왔다는 것은 청화와 홍화가 그를 회유하는 것에 실패했단 뜻이었으니.
“……예상외인걸.”
주월향이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깨물었다.
긴 손톱의 끝부분을 잘근잘근 씹는 그녀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그렇게나 여색을 밝히는 노인네가 청화와 홍화의 미색에 안 넘어갈 줄이야.”
색혼수사는 예로부터 여색을 밝히기로 정평이 난 노괴였다.
괜히 별호에 ‘색(色)’이라는 단어가 들어갔겠는가.
그렇기에 그가 청화와 홍화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다른 기루에서 먼저 선수를 친 건가?’
그녀가 미간을 좁히던 그때였다.
“대신 다른 자를 데려왔습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담아서였다.
“다른 자……?”
그 순간.
“루주님.”
“복귀했습니다.”
장지문 너머로 두 여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바로 청화와 홍화였다.
“색혼수사 대신 다른 손님을 데려왔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담담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에 주월향의 눈이 가늘어졌다.
임무를 실패한 것치고는 왜인지,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가 누구더냐?”
“모릅니다.”
주월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르는 자를 데려왔다고?’
그녀의 눈이 깊어졌다.
청화와 홍화는 어릴 적부터 거둬 그녀가 직접 키운 아이들이었다.
그 때문에 중요한 일에 쓰이는 아이들이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데려오지는 않았을 터.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색혼수사를 단 일격에 쓰러트린 자입니다.”
“……!”
주월향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루주님, 아니. 지부장님과 대화를 하길 원합니다.”
불현듯 호칭을 바꿔 말하는 청화의 목소리에 주월향이 홱 몸을 돌렸다.
루주가 아니라 지부장이라 부른다는 것은 상대가 이미 하오문에 대해서 알고 왔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궁장이 나풀거리며, 처마 밑에 달랑거리던 등롱의 불빛을 반사했다.
그녀는 곧장 장지문 쪽으로 다가가선 단숨에 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무릎 꿇은 청화와 홍화가 보였다.
“그는 어디 있느냐?”
“밖에…….”
왼쪽 귀에 푸른 귀걸이를 찬 청화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하다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굳었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 같은 눈이었다.
“왜 그러…….”
주월향이 입을 떼려던 그 찰나.
“오, 술맛이 상당히 좋은걸.”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주월향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언제 온 거지?’
그녀의 눈빛이 요동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기는커녕, 지금 등 뒤에서 말이 들렸건만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꿀꺽―
그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흐트러진 궁장을 곱게 여민 뒤, 부드러운 몸짓으로 몸을 돌렸다.
차분하고, 정갈한 움직임이었다.
곧 몸을 돌린 그녀의 눈에 비단으로 된 자리에 앉아서 술병을 입에 댄 채로 기울이는 청년이 보였다.
절세 미남이라고까지 하긴 어렵지만, 많은 여인의 눈길을 끌 법한 날카로운 인상의 앳된 미청년이었다.
하나 그녀는 상당히 어려 보이는 천휘의 모습에도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나이가 많은 자일지도 모르는 일…….’
강호의 고수 중 내공이 깊은 자들은 도리어 어려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앞의 청년이 그런 고수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자일지 몰랐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차리면서, 다소곳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소인은 화천루의 루주인 주월향이라 하옵니다.”
청년, 천휘가 입에 대고 있던 술병을 떼면서, 주월향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하오문의 지부장이죠?”
“그렇습니다.”
주월향이 선선하게 인정했다.
본래라면 하오문과 거래를 튼 자가 아니고서는, 알려 줘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하지만 상대인 저 청년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하오문에 오는 일이야, 당연히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천휘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정보 좀 사려고요.”
주월향이 슬쩍 뒤를 돌며 눈짓을 했다.
그러자 곧바로 청화와 홍화가 뒤로 물러났고, 장지문이 탁 하고 닫히며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단숨에 최상층에는 둘만이 남게 됐다.
“무슨 정보를 원하십니까?”
주월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바로 이곳까지 거침없이 올 정도라면, 괜한 대화는 귀찮아할 터.’
그러한 그녀의 생각은 정확했다.
“시원시원하니 좋네요.”
천휘가 씩 웃으며,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흑괴단과 풍리가 무혈에 온 이유에 대해 알고 싶은데.”
“……!”
주월향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현 무혈에 흑괴단과 풍리가 있다는 정보는 아직 강호에 퍼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만큼 은밀한 정보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청년고수는 그걸 언급하고 있었다.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대협께서는 누구십니까?”
그녀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하오문이 그런 것도 묻던가요?”
하나 돌아온 대답은 까칠했다.
주월향이 눈을 찡그렸다.
‘하오문과 거래를 해 본 자였나.’
본래 처음 하오문과 거래를 트는 자는 이러한 물음에 자연히 대답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니었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주월향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화가 말하길 앞의 청년은 무혈을 지배하는 색혼수사를 단 일격에 쓰러트린 고수였다.
그런 그를 상대로 떠보는 짓을 했으니, 무슨 짓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나 천휘는 그런 그녀가 사과하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더 캐묻지 않으니 굳이 따질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보는 얼마죠?”
“죄송합니다. 그 정보는 팔 수 없습니다.”
주월향이 더욱 깊게 고갤 숙였다.
그에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하네요. 하오문은 돈만 주면 무슨 정보든 판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주월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본 문이 파악하지 못한 정보를 어떻게 팔 수 있겠습니까?”
“음, 모른다라…….”
천휘가 턱을 매만졌다.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오문이라면 그들의 목적쯤은 파악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천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꽤 은밀하게 움직이나 보네.’
생각하던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들이 이렇게나 은밀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무혈에서 하는 일이 중요하단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디 있는지는 알아요?”
주월향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도 모릅니다.”
“쩝, 이렇게 아는 게 없을 줄이야.”
천휘가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정보를 얻으러 왔건만, 소득이 전혀 없었다.
‘그놈들이 활동할 때까지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그때였다.
“하지만 그들이 며칠에 한 번씩 나타나는 곳은 알고 있습니다.”
주월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휘가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어디죠?”
“그 전에 값을 치르고 싶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주월향의 눈을 마주한 천휘가 피식 웃었다.
“좋아요. 얼마죠?”
“돈은 됐습니다.”
주월향이 눈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정보를 교환하고 싶습니다.”
“오호라.”
천휘가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그거 재밌겠네요. 그렇게 하죠.”
“그러면 먼저 답하겠습니다.”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지, 주월향이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그들이 며칠에 한 번씩 나타나는 곳은 바로 이곳, 화천루입니다.”
천휘의 눈이 반개했다.
‘하오문에서 정보를 샀다, 이건가?’
듣자마자 얼추 파악이 됐다.
그들이 이곳을 방문할 이유가 그것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주월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제가 묻겠습니다.”
차분히 말한 그녀가 숨을 한번 크게 골랐다.
긴장감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곧 그녀는 천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정보를 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민을 거듭하다, 나온 질문이었다.
‘일단 정보를 얻으려는 저의를 알아야 해.’
그의 정체가 가장 궁금하기는 했지만, 인상착의만 안다면 언제든지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대답을 기다리며 청년, 천휘의 입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기를 잠시 입술이 벌어지고 충격적인 말이 그 사이로 내뱉어졌다.
“그들을 죽이려고요.”
“헙!”
놀란 주월향이 헛숨을 들이켰다.
‘칠요선 중 한 명인 풍리와 사흑련의 정예인 흑괴단을 죽인다고?’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하지만 혹시 몰랐다.
‘만약 이 앞의 청년이 그들과 비슷한 전력을 가진 곳에서 왔다면?’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긴 손톱이 손바닥 사이를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이 머리를 모조리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천휘를 보기 위해서 고개를 든 순간.
“그럼 이제 끝났네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당황한 그녀가 말을 더듬거렸다.
갑자기 끝나다니.
한편 천휘는 당혹감을 드러내는 그녀를 보며, 입매를 천천히 비틀었다.
“제가 원하는 정보는 그것 하나뿐이었거든요.”
말을 마친 천휘가 움직이는 순간.
“대협!”
주월향이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에 천휘가 멈칫하자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 이곳 화천루에서 지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정성껏 대접하겠습니다. 그들을 노린다면 이곳에서 머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천휘가 발을 멈추며, 그녀를 봤다.
“그래서 그쪽이 좋을 게 있나요?”
“대협께서 색혼수사를 일격에 쓰러트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는 청화에게 들었던 정보를 말하며, 천천히 말을 읊조렸다.
“그리고 아마 그 소문은 지금도 무혈에 파다하게 퍼지는 중일 겁니다.”
천휘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즉 제가 머묾으로써 화천루에 일이 안 일어나게 막겠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흠, 저야 상관없어요.”
천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오히려 좋았다.
어차피 그들이 이 화천루에 올 것은 확실시되는 일이지 않은가.
“감사합니다.”
주월향이 다소곳이 한차례 고개를 숙인 뒤, 장지문을 향해서 외쳤다.
“밖에 누구 있느냐!”
큰 외침에 누군가 후다닥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부르셨습니까?”
청화와 홍화였다.
주월향은 두 여인의 등장에 부드럽게 웃더니, 곧바로 입을 달싹였다.
“대협을 특실로 안내하거라.”
잠시 뒤 천휘가 떠나고 난 뒤 최상층에는 주월향 그녀만이 남았다.
“그를 화천루에 머물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돌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지부장, 위적양이었다.
“만약 풍리와 흑괴단이 알게 된다면 무슨 사달이 일어날지…….”
위적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풍리는 괴팍하고, 냉혹한 자였다.
그가 만약 자신을 노리는 천휘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불똥이 튈지도 몰랐다.
“아니, 괜찮아.”
하지만 주월향은 그런 걱정은 전혀 안 된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 해가 없을 테니까.”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풍리가 이길 경우, 저자를 화천루에 대령하기 위해서 묶어 놨다고 하면 될 일이지. 그리고 반대로 저자가 이긴다면 우리는 정보를 넘겨준 것뿐이니, 아무 문제가 없지 않겠어?”
“아!”
위적양이 나직이 감탄을 터트렸다.
참으로 교활한 대처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하오문인 그들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대처였다.
“누가 이기든 우리는 가만히 결과만 기다리면 될 일이야.”
그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물론 그 전에 누가 이길지는 모르니, 둘 다 호감을 쌓아 둬야겠지.”
그녀는 철저하게 계산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발언을 모두 다 듣고 있는 자가 있음을.
‘잔머리 좀 굴리는걸.’
청화와 홍화의 뒤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던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절세의 감각을 지닌 그가 퍼트린 기감이 화천루를 감싸며, 그녀가 내뱉는 말이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바로 지근거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단은 모른 척 넘어가 주지만, 모두 끝난 뒤에는…….’
그 순간 천휘의 입가에 엄동설한과도 같이 차가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무표정으로 청화와 홍화의 뒤를 따라서 계속 걸어갔다.
* * *
화천루 아래, 담벼락에 여러 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저기가 하오문 지부였나?”
단정한 인상의 문사 차림을 한 사내가 고개를 들어서 화천루의 꼭대기를 보며 말했다.
“뭐, 대주가 들어간 것을 보면 그렇겠지.”
옆에 있던 깔끔한 차림새의 무인이 맞장구를 치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 둘은 이번 임무를 위해서 변복한 단리관천과 호광개였다.
한편 둘의 사이에서 단아한 궁장을 입은 여인이 입을 가린 면사를 귀찮다는 듯이 확 열어젖히며, 말했다.
“윽, 갑갑해. 왜 이런 복장을…….”
여인, 천향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궁장이 불편한 것인지 소매를 확 걷어붙여 올리기도 했는데, 상당히 남사스럽게 보였다.
“아이고,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그녀의 행동에 호광개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부렸다.
장난기가 섞인 어투였다.
“임무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 그 차림을 하셔야 합니다. 아가씨께선 귀한 가문의 자제분이 아니십니까.”
천향은 능청맞은 호광개의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보다, 피식 웃었다.
그 이후 면사를 내리며, 말했다.
아주 다소곳한 목소리와 행동으로.
“알겠어요. 비운(飛雲) 공자.”
호광개는 이번 임무를 위해서 지은 가명을 부르는 것으로 곧바로 되돌려주는 천향에 마주 웃음을 지었다.
“이제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그때 단리관천이 나직이 말했다.
“계속 뭉쳐 있으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말이오.”
그 말에 웃던 천향과 호광개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입을 열었다.
“저는 동쪽으로 가죠.”
“나는 서쪽으로 가지.”
“그럼 빈도는 남쪽에 가겠소.”
단리관천이 둘을 보며, 말했다.
“후에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자를 발견하거든, 연락을 취하시면 되오.”
“알고 있어요.”
“당연한 것을.”
셋은 서로를 보며 고갤 끄덕였다.
그러기를 잠시.
파앗!
셋이 단숨에 흩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여럿의 인영이 빠르게 쫓으며, 단숨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