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22화 (322/391)

322화

호북 무혈.

거리 곳곳마다 사람들로 넘치는 지역이었지만, 이 중 대부분은 무혈에 터를 잡은 이들이 아니었다.

장강을 건너기 위해 찾아온 상인들과 표사들. 그리고 그들에게 고용되거나 혹은 고용되기 위해 골목에서 몸을 기댄 채 기다리는 낭인들.

거의 다 그러한 자들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도시.

무혈이란 그런 곳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무혈의 거리에는 객잔과 기루가 유독 많이 세워져 있었다. 돈주머니를 들고 이곳을 거쳐 가는 이들을 유혹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유혹은 낮이 아닌 밤이 되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거리의 문마다 등롱이 달리며, 빛을 발했다.

붉고 노란 불빛이 잔뜩 아롱거리는 모습은 마치 밤하늘의 별이 지상에 떨어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그 불빛에 이끌리듯 하나둘 거리에 발을 들였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 여기입니다!”

“하하하! 내가 운남에서는 꽤 이름을 날렸었다니까!”

“술맛 좋구먼!”

삽시간에 거리 곳곳이 시끄러웠다.

객잔과 기루에 손님이 가득해지며, 거리 전체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며 떠드는 자들.

여인을 끼고 밝게 웃는 자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무혈의 거리에서 저마다의 욕망을 표출했다.

“자, 한 잔 따라 봐라.”

백색의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양옆에 여자를 낀 채로, 음흉하게 웃었다.

“대인도 참.”

“여기 있습니다.”

양옆의 여인들이 그런 중년인을 향해 눈을 접어 웃어 댔다.

나삼과도 같은 얇은 궁장을 입은 그녀들은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뱉으며, 술잔에 술을 빠르게 채웠다.

주변에 자리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힐끔거렸다.

중년인은 지금 기루에서나 볼 법한 모습을 객잔에서 보이고 있었으니.

얼핏 낯이 뜨거워지는 광경이었다.

그때, 중년인이 자신을 힐끔대는 시선들을 느꼈는지, 양발을 탁자 위에 올렸다.

쿵!

그릇이 흔들리며, 음식이 흘렀다.

하지만 중년인은 그런 것은 신경조차 안 쓴다는 듯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주변의 이들을 훑어봤다.

“…….”

그에 황급히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음식만을 보고 식사를 이어 갔다.

“좋군!”

그 모습에 이죽거린 그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끄러운 웃음 소리는 객잔을 뒤흔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손님들은 물론이고 객잔 주인도 그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건들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었다.

색혼수사(色魂秀士) 장표.

최근 행방불명이 된 독귀수를 대신해 이 무혈을 지배하게 된 고수가 바로 그였다.

‘그 머저리가 알아서 사라져 줄 줄이야.’

색혼수사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독귀수라는 고수가 사라진 무혈은 이제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잔 더 따라 봐라.”

신난 그가 술잔을 기울일 무렵.

촤르륵―

주렴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게 울린 소리와 함께 주렴 사이로 새하얀 손이 모습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한 소리였다.

하지만 묘하게 귀에 맴돌았다.

그 작은 소리에 이끌리듯 객잔 안 모두의 시선이 주렴에 고정되었다.

사락―

주렴을 뚫고, 한 청년이 모습을 보였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묶은 그는,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미청년이었다.

이윽고 그가 객잔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등 뒤로 흔들리던 흑색의 장포가 움직임을 멈추며 내려앉았다.

“어서 오십시오!”

객잔의 한쪽에서 몸을 숨긴 채 색혼수사의 눈치를 보던 점소이가 재빠르게 청년의 앞에 다가왔다.

“일행은 계십니까?”

점소이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색혼수사가 무어라 반응을 하기 전에 자리로 안내할 요량이었다.

“아뇨.”

청년, 천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현재 도복을 벗고, 어디에서나 볼법한 가벼운 무복과 장포를 입은 상태였다.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허술해 보이지만, 좋은 방식이었다.

사흑련에 알려진 자신의 인상착의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단순할 터였다.

화산파의 도사.

그것을 비틀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좋은 방법은 화산파의 도복을 벗는 것과 육식을 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고기 좀 마음껏 먹겠어.’

천휘는 코를 간질이는 고기 냄새에 기분이 좋아져 작은 미소를 띠고 입을 달싹였다.

“혼자예요.”

“그렇습니까? 그럼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점소이가 재빨리 움직였다.

괜히 여기서 말을 길게 하는 것보다는 일단 자리에 안내하여 시선을 흩트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곧 점소이는 천휘를 색혼수사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탁자로 안내했다.

“웃기는 놈이군.”

색혼수사는 멀어져 가는 천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낯짝은 썩 괜찮았다.

하지만 멍청한 녀석이었다.

“강호에서 검을 두 자루나 차고 다니다니.”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강호에서 검을 두 자루나 차는 것은 무공에 ‘무(武)’ 자도 모른다는 걸 방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무인인 척하려는 멍청한 놈이군.’

천휘를 보던 시선을 돌린 색혼수사는 술잔을 들려다,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찌푸렸다.

그제야 주위를 보니, 자신의 양옆에 끼고 있던 여인들이 몽롱한 눈으로 천휘를 보고 있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색혼수사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에 천휘를 응시하던 여인들이 화들짝 놀랐다.

“저놈의 낯짝이 마음에 드나 보군.”

색혼수사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여인들이 식겁했다.

“아닙니다, 대인.”

“대인이 계시는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두 여인이 재빨리 말하며, 색혼수사에게 붙어서 아양을 떨었다.

하지만.

“됐다.”

색혼수사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미 식은 마음은 돌릴 수 없었다.

이어서 그는 스스로 술병을 기울여 술잔에 술을 채웠다.

따스하게 데워진 술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을 험악하게 노려보던 그가 그것을 단번에 들이켰다.

“술맛이 안 나는군.”

싸늘하게 말한 그가 쥐고 있던 술잔을 거세게 던졌다.

점소이에 안내에 막 자리에 앉으려는 천휘를 향해서였다.

쐐애애액!

공기를 가른 술잔이 쏘아졌다.

무방비하게 걸어가는 천휘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가는 술잔을 보며 색혼수사가 천천히 입매를 비틀었다.

술잔은 금세 바로 지근거리까지 도달했다.

이대로 술잔이 저 뒤통수를 가격해서, 재수 없는 청년을 기절시킬 것만 같았다.

이윽고 술잔이 닿는 순간.

휙!

갑자기 술잔이 사라졌다.

“……!”

색혼수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들짝 놀란 그가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감았다 뜰 무렵.

우뚝.

천휘가 걸음을 멈췄다.

“이것 봐라?”

차가운 목소리를 흘리면서였다.

“손님?”

전후 사정을 모르는 점소이가 갑자기 멈춘 천휘를 보며 의아해할 때.

스윽―

불현듯 천휘가 몸을 돌렸다.

그 손에 술잔을 든 채였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

싸늘한 음성이 객잔에 내려앉았다.

마치 한겨울의 한파와도 같았다.

색혼수사의 안색이 하얘졌다.

‘수, 술잔을 잡았다고? 그걸?’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공력을 실어서 던진 술잔이었다.

한데 그것을 그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잡아챈 것이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고절한 수법이었다.

‘고, 고수……!’

자신이 실수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런 경솔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검을 두 개나 찬 자라 해도, 상대가 누구인지 샅샅이 알아본 뒤에야 움직일 정도로 철저한 그였으니까.

최근 무혈을 자신의 손바닥에 두며, 저도 모르게 안하무인처럼 행동한 것이 이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만 것이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색혼수사를 바라본 천휘가 걸음을 옮긴 것이다.

둘 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휘이이―

밑에서부터 바람이 일었다.

일순간 객잔 내에 있던 등롱이 흔들거리며,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천휘가 공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흡!”

색혼수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청년이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짓눌러 오고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한편 양옆에 있는 여인들은 사시나무처럼 떠는 색혼수사에 당황했다.

“대인?”

“왜 그러십니까?”

그녀들의 말을 들은 색혼수사의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바로 옆에 있는 여인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꺼내고 있었다.

이 압박감을 못 느낀다는 듯.

‘내게만 이 존재감을……’

두근!

그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숨이 막혀 오는 것만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윽고 청년이 그 앞에 서자.

쿵!

색혼수사가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의자째로 넘어가 바닥을 뒹굴던 그는 다급하게 무릎을 꿇으며, 빌었다.

“고, 고인을 못 알아보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색혼수사의 태도에 객잔에 있던 이들 모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색혼수사는 현 무혈의 최고 고수였다.

그런 그가 무릎을 꿇은 채 빌고 있는 것이다.

저 어린 청년에게.

그때였다.

스윽―

천휘가 말없이 손을 움직였다.

술잔을 쥐고 있던 우수였다.

이내 그의 우수에서 흐릿한 기파가 흘러나온다 싶더니, 검은 장포의 소매가 흔들리며 무언가가 쏘아졌다.

‘수, 술잔?!’

뒤늦게 날아오는 것의 정체를 확인한 색혼수사가 눈을 부릅뜰 무렵.

빠각!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색혼수사는 이마에 느껴지는 큰 통증과 함께 의식이 빠르게 멀어져 감을 느꼈다.

기절이었다.

* * *

천휘는 가득 찬 술잔을 기울이며 눈앞의 오향장육을 입안에 넣었다.

“괜찮은걸.”

평탄한 맛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의 육식을 하게 된 천휘는 어떠한 천하 진미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음? 술이 없네.”

천휘가 빈 술잔을 보며, 말하자.

“여기 있습니다! 대협!”

바로 술을 따르는 이가 있었다.

색혼수사였다.

이마에 선명한 술잔 자국을 지닌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천휘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부족한 것은 없으십니까?”

색혼수사가 두 손을 비비며, 굽실거렸다.

조금 전 안하무인이었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색혼수사를 따라온 여인들은 지금의 상황을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저자는 대체 누구기에…….’

‘색혼수사를 일수에 제압했어.’

그녀들은 눈짓으로 대화했다.

그들은 기녀면서도, 하오문도였다.

그렇기에 색혼수사의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달라붙었던 것이건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였다.

달그락―

천휘가 젓가락을 놓았다.

배가 부른 것이다.

“크, 이제야 좀 먹은 것 같네.”

방긋 웃으며 말하던 천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검을 옆구리에 찼다.

“지, 지금 가시려는 겁니까?”

색혼수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로서는 이대로 넘어가 주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바로 계산해 두겠습니다.”

천휘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그는 재빨리 발을 움직였다.

천휘는 그렇게 계산하러 떠나는 색혼수사를 힐끗 보더니, 바로 고갤 돌렸다.

색혼수사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저 지나가는 벌레와도 같았다.

지금 천휘가 관심이 있는 것은 탁자의 구석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섬서 지부장이 기루에 하오문도가 많다더니, 맞았네.’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 여인에게서 풍기는 공력은 과거 하오문 섬서 지부에서 봤었던 지부장과 같은 결을 하고 있었다.

천휘가 둘을 보며, 말했다.

조용하게 기막을 펼치면서였다.

“하오문도죠?”

단도직입적인 천휘의 물음에 두 여인이 흠칫했다.

하나 곧 그들은 표정을 고쳤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는 한낱 기녀일 뿐입니다.”

둘은 애써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하오문도는 하오문이라고 직접 밝혀서는 아니 되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됐고, 안내나 해봐요.”

천휘는 그런 그녀들의 노력을 무시하며 할 말만 말했다.

차디찬 음성으로.

“이곳의 지부장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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