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천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피어난 공력의 파동이 가닥가닥 실처럼 엮이며, 눈을 세밀하게 감쌌다.
한순간 시야가 넓어졌다.
얼음장과도 같이 투명한 두 눈동자가 저 앞의 광경을 한눈에 담았다.
드넓은 갈대밭 한가운데에 있는 옥기린이 검을 휘두르는 광경을.
천휘는 그의 움직임을 아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게, 정신을 집중했다.
“태극혜검, 무당파의 절대검공.”
불현듯 천휘가 속닥였다.
아주 희미한 음성이었다.
옅게 불어온 삭막한 바람에 휘날려 그대로 사라질 정도로.
직후, 천휘의 눈이 더더욱 깊어졌다.
무저갱과 같이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는 밤하늘에 뜬 달과 별마저 집어삼키며, 오직 옥기린만을 투영했다.
느릿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검무를 추는 것보다는 밤하늘을 종이 삼고, 검을 필로 삼아 기나긴 획을 하나 그려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광활한 천하에 그 홀로 있는 듯했다.
‘깊이 빠져들었어.’
천휘의 의식이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해 갔다.
그는 옥기린에 대해 더욱 깊이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는 지금 두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조언을 제대로 깨우치고, 검에 모든 것을 맡긴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의 몸 곳곳에 기억된 태극혜검을 불러내면서, 옥기린은 현재 무의식 속에 이를 발현하고 있었다.
그의 도복 소매가 나풀거렸다.
밤하늘 아래 한 줄기 긴 획을 그어 가던 검신에서 공력이 피어올랐다.
검고, 하얀 기운.
음과 양이었다.
상반된 기질을 지닌 공력이 희끄무레하게 피어나, 검신을 어루만졌다.
꽤나 묘한 광경이었다.
흑과 백, 음과 양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의 륜을 그리면서였다.
바로 태극이었다.
“무당은 무당인가.”
무당파의 무공은 예부터 그러했다.
태극, 음양의 조화.
그것을 추구하며 완성하고자 수련하는 이들이었다.
애당초 무당파의 개파조사, 삼봉진인이 태극을 추구하는 자였지 않은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당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당파가 지향하는 그것이 지금 옥기린이 선보이는 태극혜검에서 매우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도 삼봉진인이 말년에 창안한 검공, 그것이 태극혜검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수백 년을 살았다고 알려진 삼봉진인의 광활한 태극의 무학이 바로 저 검공에 담겨 있단 뜻이었으니.
천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전생에도 못 본 태극혜검을 뜻하지 않은 기회에 마주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를 어찌 놓치랴.
화아아악!
백회혈이 열리며, 삼단전이 통했다.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매화신공의 내력이 꿈틀거렸다.
천휘의 의식을 따른 것이다.
‘태극혜검이 오롯이 내 것이 될 때까지…….’
그 순간 매화신공의 순수하기 짝이 없는 공력이 솟구쳤다.
삽시간이었다.
온 세상을 포용하는 매화신공의 공력이 단숨에 천휘의 상단전에 닿았고.
화아악―
의식이 순간 아득하게 넓어졌다.
수많은 무학이 천휘의 머릿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물경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심법, 검법, 도법, 수법 등…….
무학들이 너울지며, 천휘의 의식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급격하게 빨라진 사고 속.
번쩍!
천휘의 눈에서 시퍼런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지며, 날카로운 안광을 토했다.
마치 벼락이 내리친 것 같았다.
일순간 시야와 의식의 경계가 흐릿해진 듯 모든 것을 하나로 품은 천휘가 옥기린을 응시했다.
강한 통찰이었다.
어느새 푸른빛이 사라지고 적빛이 감도는 두 눈동자는 옥기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요소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 때문일까.
안 그래도 느렸던 옥기린의 움직임이 마치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송문고검(松紋古劍) 특유의 소나무 문양이 살아 있는 듯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둔검, 후발제인, 무형(無形).”
천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 눈앞에 구현되는 태극혜검이 보이고 있는 것을 읊조린 것이었다.
“그리고 조화.”
천휘의 입매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눈은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일정하지 않은 초식들의 연계, 근육의 움직임, 옥기린이 풍기는 음과 양의 기운, 태극을 이루고자 하는 검의까지.
그것들은 천휘의 뇌리에 박히며, 차곡차곡 무학을 쌓아 올렸다.
깊고도, 심오한 무학을.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그렇게 약 한 시진가량 지났을 때.
스윽.
검을 멈춘 옥기린이 고갤 들었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였다.
“……아침인가.”
어느새 깜깜했던 밤하늘을 밀어내며 저 멀리서 여명이 비쳐 오고 있었다.
꼬박 밤을 새운 것이다.
휘이이―
이른 아침 특유의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뺨을 쓸었다.
서늘한 바람에도 그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펼친 검무는 심란했었던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 것을 만끽하던 옥기린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아! 소도장께서는…….”
다급히 천휘를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려 한 순간.
“어때요? 잊어도 잘되죠?”
천휘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옥기린은 신기루와도 같이 모습을 드러낸 천휘를 보며, 읍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소협.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였다.
보통 때의 예보다 더욱 진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태극혜검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가짐도 바꾸어 주었다.
천휘는 고개를 숙인 옥기린의 정수리를 보면서, 속으로 아쉬워했다.
‘조금만 더 보면 될 것 같은데.’
괜히 절대검공이 아니었던가.
태극혜검을 파악하기 위해서 극한의 집중을 지속했건만, 완전히 이해하기엔 아직 조금 부족했다.
‘그러면…….’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말로만 고맙다고 끝낼 건 아니죠?”
천휘의 물음에 옥기린이 살짝 놀란 듯 흠칫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옥기린이 진중하게 말했다.
그는 무당파의 도사였다.
어찌 은혜 갚는 것을 대충하겠는가.
천휘가 그러한 옥기린의 표정을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번 임무를 가는 도중에 이렇게 밤마다 무당파의 무공을 좀 보고 싶은데, 괜찮죠?”
옥기린의 눈이 커졌다.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제안이었다.
잠깐 본 천휘의 조언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또 무공을 보인다면,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몰랐으니.
“빈도야 좋습니다만…… 그걸로 괜찮겠습니까? 이걸로는…….”
옥기린이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깊고도, 깊은 은혜였다.
그러니 고작 무공 몇 번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내기에는 미안했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해요. 뭐, 그쪽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나중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따로 말하죠.”
옥기린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제 날도 밝았으니 일단 돌아가죠.”
천휘가 씩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많이 볼 필요도 없었다.
두세 번.
그 정도만 견식하면 됐다.
천휘는 송문고검을 납검하는 옥기린을 보며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만족감이 깃든 미소였다.
‘얻는 게 많겠어.’
* * *
멸절대와 천정대는 엿새 만에 목적지인 무혈의 근방까지 도달했다.
어느 순간, 옥기린이 고삐를 잡으며 멈춰 섰다.
그리고 천휘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화를 통해 진작 세워 놓은 계획이 있었다.
“그럼 후에 뵙겠습니다. 소협.”
나직이 말한 옥기린이 웃으며 천휘와 눈을 맞추더니, 말을 돌렸다.
“천정대는 빈도를 따라오시오!”
외친 그가 곧바로 미리 얘기해 둔 방향으로 내달렸다.
다그닥― 다그닥―
그리고 천정대 또한 그의 뒤를 따르면서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밤마다 같이 어디로 가더니, 상당히 친해졌나 봐.”
천휘 옆에 있던 천향이 멀어져 가는 옥기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딱히 그건 아닌데요.”
천휘는 바로 싹둑 잘라서 말했다.
깨달음을 얻게 해 준 대가로 무당파의 무공을 본 것뿐이지 친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향은 그런 천휘의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흠, 그래도 저쪽은 친하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엿새간의 여정을 떠올린 천향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옥기린은 틈만 나면 천휘에게 다가와서 이야기를 건네고는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천휘는 대충 대답하며, 말을 끊어 버렸지만.
‘……일방적인 친분인가.’
천향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보다 이제 어쩔 거야?”
하던 생각을 지운 천향이 얼굴을 굳히며,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이제 계획대로 하면 돼?”
그녀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바로 코앞이 무혈이었다.
즉 임무를 곧 실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에 응답하듯.
“그렇죠.”
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후우, 이번도 쉽지 않겠는걸.”
그 대답을 들은 호광개가 천휘에게 바짝 달라붙으며, 숨을 크게 골랐다.
그만이 아니었다.
멸절대 모두가 천휘의 말을 들었는지 긴장감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대주. 그럼 바로 가는 것이오?”
호광개가 눈을 굳히며, 물어왔다.
그는 언제든 전투할 준비를 마친 것처럼 전신에 공력을 두른 채였다.
“아뇨.”
천휘가 그를 보며 단호하게 답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일단 정보를 모으려고요. 아직 무혈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으니까.”
천휘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현 무혈에 풍리와 흑괴단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임무를 떠나기 전, 연통으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나 그들은 무혈에 도착한 뒤 오히려 자취를 감추고 정체를 보이지 않았다.
그게 벌써 열흘 전이었다.
“정보라면 본 개방이 있네.”
호광개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정보에 관해서라면 강호에서 개방을 따라올 곳이 거의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당장 지부에 연락해서…….”
“아뇨.”
천휘가 호광개의 말을 끊었다.
개방이 뛰어난 것은 그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번 임무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 개방에 연락하는 것은 풍리와 흑괴단에게 ‘나 여기 왔소.’라고 알리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실수했군.”
호광개가 멋쩍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보를 우선하는 개방도인 만큼 천휘의 말뜻을 바로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다른 곳에 의뢰해야죠. 개방만 정보 문파인 것은 아니잖아요.”
“하오문이로군.”
호광개가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하오문이라면 개방만큼 뛰어난 정보망을 구축한 곳이었다.
“그렇죠.”
천휘가 담담하게 인정했다.
하오문이라면 정보를 알 것이다.
“하면, 어떻게 의뢰하려는 거지?”
호광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혈에 들어가는 것이 알려지면 그들이 모습을 감출 것이 분명했다.
그 물음에 천휘가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긴요. 조용히, 은밀하게 움직여야죠. 그들이 우리를 알아채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하던 천휘가 정면을 바라봤다.
방법은 꽤 쉬웠다.
곧 정면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천휘가 멸절대를 향해, 명을 내렸다.
“일단 모두 옷부터 갈아입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