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소도장?”
옥기린이 천휘를 올려다봤다.
흠칫 놀란 눈빛을 띠면서였다.
천휘는 바로 코앞, 지근거리에서 흥미롭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옥기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요동치는 두 눈에서는 동요가 느껴졌다.
그로선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가까워질 동안 기척을 못 느끼다니…….’
그의 기감은 뛰어났다.
특히 검무를 펼친 직후의 그는 약 오 장의 거리를 통제하에 두었다.
한데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여기까지 다가오는 동안에도.
그리고 이것은 간단히 기척을 못 느꼈다는 표현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누구인가?
무당파의 제자였다.
즉 강호의 무림인이란 말이었다.
그리고 강호란 도산검림의 세계로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곳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그는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소도장이 적이었다면…….’
그의 등이 축축해졌다.
어느새 등에서 흐른 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도복을 점차 젖게 한 것이다.
날씨는 춥건만, 몸은 뜨거웠다.
동시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갑자기?’
본래 타인의 무공 수련을 엿보는 것은 강호의 금기였다.
그래서 보통 봤다고 하더라도 숨기기 마련이었다.
한데 그는 오히려 다가왔다.
보고 있었다는 걸 숨기지도 않고서.
그것만이 아니었다.
막 출발했을 당시 대화를 요청했을 때는 매몰차게 거부했으면서, 이런 상황에서 먼저 대화를 거는 것으로도 모자라 호의를 보인다?
대체 무슨 의중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 보고 계셨습니까?”
옥기린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천휘는 매번 싱긋 웃기만 하던 옥기린의 굳은 표정을 보곤, 오히려 더 진한 미소를 띠었다.
‘머리가 완전히 꽃밭은 아니네.’
옥기린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의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든 출수를 준비하는 자세였다.
검에 실린 검기를 감지한 천휘가 그를 응시한 채 입을 달싹였다.
“그쪽이 잠에서 깼을 때부터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육성이 바람을 타고, 옥기린을 스쳐 지나갔다.
이를 들은 옥기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처음부터 봤다는 말을 미안해하거나 민망한 기색도 없이 내뱉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자다.’
그의 생각이 깊어지던 그때였다.
“그것보다 어쩔 거죠?”
또다시 말이 들려온다 싶더니.
쑥―
천휘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흡……!”
순식간에 커진 천휘의 얼굴에 흠칫 놀란 옥기린이 오른발을 뒤로 뺐다.
뒤이어서 그의 손이 움직였다.
파앗!
본능적으로 한 공격이었다.
밑에서부터 쳐올린 손이 빠르게 솟구치며 천휘의 턱을 노렸다.
삽시간이었다.
‘아!’
옥기린은 뒤늦게 아차 했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뻗어 버린 출수가 중간에 이르러서였다.
‘무슨 짓을!’
그가 다급하게 손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이미 출수된 태극수를 거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두둑―
그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를 무렵.
“꽤 능숙하네.”
은은한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
그와 동시에.
턱.
태극수가 중간에 턱 하고 멈췄다.
손목이 천휘의 손에 잡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옥기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내비치며, 태극수를 펼친 손목을 잡아낸 새하얀 섬섬옥수를 바라봤다.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손목에 감촉이 느껴진다 싶은 순간, 확인하니 잡혀 있었다.
“괜찮은 반격이었어요.”
천휘가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
‘괜히 천하 삼대 기재가 아닌가?’
급하게 펼쳐진 수법이었지만 자세가 완벽했고, 내공 운용도 좋았다.
멸절대가 펼치는 그 어떤 수보다 깔끔했다.
아마 저 나이대의 후기지수 중에서는 같은 천하 삼대 기재로 뽑히는 천룡과 흑야차만이 견줄 만하리라.
‘쩝, 화산파의 후기지수 중에서는 아무도 못 따라잡겠는걸.’
그가 최근 실력이 부쩍 상승한 화산파의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무렵.
“앗!”
옥기린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황급히 손을 빼 읍을 취하며, 천휘에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다는 듯 말하면서였다.
“무량수불. 죄송하외다. 갑자기 나타난 것에 본능적으로…….”
“음? 이게 죄송한 일인가요?”
천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무인이라면 당연한 건데.”
아주 담담한 어투였다.
전생에 사방이 적이었던 그에게 이러한 반격은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지금만 해도 기감을 퍼트리면서 언제든지 대처할 수 있도록 경계를 갖추지 않았는가.
‘누가 언제 배신할지 어찌 알아?’
하지만 그러한 천휘의 속내를 모르는 옥기린은 그 담대함에 감탄했다.
‘괜히 신협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구나.’
까딱 잘못되었다가는 문파 간의 정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대단한 실례였다.
한데 그것을 가볍게 넘겼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진정 대인과도 같은 태도였다.
그때 천휘가 다시 입을 달싹였다.
“그러한 것보다 이제 질문에 대한 대답 좀 듣고 싶은데요.”
“대답이라면……?”
“어디가 문제인지 알고 싶냐고 물었었어요.”
옥기린이 움찔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동시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솔직히 그는 천휘가 지금 하는 말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대단한 것은 알았다.
조금 전 선보인 한 수만 해도 그의 뛰어난 무위를 보여 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별개다.’
옥기린의 눈빛이 심오해졌다.
그가 펼친 검법은 그저 그런 검법이 아닌 태극혜검이었다.
그 무학의 깊이가 얼마나 심오한지, 불혹에 다다라 입문한 사부님조차 이해가 쉽지 않았다고 하셨다.
‘만약 사부님이 아니었다면, 나 또한 아예 입문도 못 했을 검공이거늘.’
그는 자신이 천운을 지녔다고 자부했다.
물론 지닌 재능도 뛰어났다.
무당파가 단 두 개만 보유하고 있던 태청단을 섭취하라고 주었을 정도이지 않나.
하지만 그의 재능이 완전히 개화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사부의 힘이 컸다.
사부인 태극검제가 제자인 자신을 위해서 늦은 나이에 태극혜검에 입문해, 공부하고 구결을 쉽게 풀어 주었으니.
만약 사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역시 태극혜검에 입문하는 건 힘들었을 터였다.
그토록 힘든 것이 태극혜검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부님조차 지금의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셨다.
한데 지금 앞의 천휘가 문제를 알고 있다고 하니, 어찌 믿으랴.
“소도장께서는 빈도가 펼친 검법이 무엇인지 아시는 겁니까?”
그는 애써 말을 돌리며, 물었다.
모른다고 하면 그대로 넘어갈 심산으로 말한 것이었다.
하나 그 계획은 바로 어그러졌다.
“태극혜검이잖아요.”
“……!”
옥기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믿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태극혜검은 기나긴 무당파의 역사에서도 세상에 나온 적이 손에 꼽았다.
사부인 태극검제는 강호에서 태극혜검을 펼친 적이 없었으며, 자신조차도 다른 이에게 익혔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걸 알아본 것이다.
당혹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걸……?”
“후발제인(後發制人)을 위주로 하는 무당파의 검법 중 초식의 형태가 계속 달라지는 것은 오직 태극혜검밖에 없지 않나요?”
천휘가 당연하다는 듯 태극혜검에 대해서 막힘 없이 술술 말했다.
달변가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극혜검은 전생에서도 꼭 보고 싶었던 검법이었다.
‘천하에 몇 없는 절대검공이니.’
천휘의 눈이 어스름하게 반개했다.
그러며 드러난 눈빛은 마치 멍울진 노을이 진 것 같았다.
매화신공의 내력이 그의 눈에 실리면서 영롱한 안광을 비춘 탓이었다.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무학에 미쳐 있는 그였다.
그런 그가 태극혜검을 보게 된 이 상황을 결코 놓칠 리 없었다.
옥기린이 마른침을 삼켰다.
“태극혜검이 그러하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천휘는 말하려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사실 태극혜검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천마서고의 기록서와 비마의 비동에서 본 강호무공서열록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둘 다 언급하기는 문제가 있었다.
천마서고는 당연히 안 됐고, 강호무공서열록이라고 하면 도리어 믿음이 없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화산에 있는 고서에서 봤어요.”
천휘가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다소 애매한 것이었으나, 그보다 완벽한 대답은 없었다.
“고서 말입니까……?”
옥기린 역시 명확하지 않은 답이라 잠시 고민하긴 했으나, 이내 납득했다.
화산파라면 오랜 옛날부터 무당파와 같이 구파일방의 소속이었다.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휘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엔 여전히 부족한 답이었다.
“소도장께서 뛰어난 무위를 지녔다는 것은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보았습니다. 하나 기록으로만 본 검법의 문제점을 알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옥기린이 천휘를 보며, 말했다.
삭풍과도 같이 메마른 음성이었다.
그냥 넘어갈 심산이었던 것이 복잡하게 되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것이다.
“본시 무공이란 것은 세월을 쌓아서 이룩한 공부입니다. 저는 이 태극혜검을 익히는 데 제 인생의 절반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한 번 본 것만으로 문제점을 알아보셨다고 하니…… 같은 상황이라면 소도장께서는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음, 저라면 믿든 안 믿든 일단은 들어볼 것 같은데요.”
천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학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자신은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흥미롭다고 느낄 바였다.
“…….”
옥기린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담대한 말이었다.
그는 이미 대단한 무위에 오른 자였다. 그럼에도 누군가 조언한다면, 들어 보겠다는 말이었으니.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고수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부끄러워졌다.
저런 고수도 남의 조언을 들어 본다는데, 자신은 얘기를 듣기도 전에 무공도 모르면서 괜한 핀잔을 준다 생각했으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였다.
곧 그는 천휘를 똑바로 봤다.
창피함에 살짝 발개진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였다.
“……그렇다면, 소도장께서 보신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일단 그 전에 하나만 묻죠.”
천휘가 그를 마주 보며, 물었다.
“보아하니 태극혜검은 초식의 형태가 따로 없는 것 같던데, 맞나요?”
옥기린의 눈에 놀람이 깃들었다.
그 말이 맞았다.
태극혜검은 초식의 기수식이라거나, 자세 같은 것이 존재치 않았다.
검의(劍意).
오직 초식의 뜻만을 익혀서 자유자재로 펼치는 것이 태극혜검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어려운 검법이었다.
“그렇습니다.”
“역시 맞네.”
천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문제는 간단해요.”
그때 천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기린은 바로 귀를 기울였다.
“생각이 너무 많아요.”
“네?”
옥기린이 당혹감을 드러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태극이란 조화를 일컫죠.”
천휘가 누구나 알법한 태극의 정의를 내뱉으며, 입매를 바짝 올렸다.
“그런데 그쪽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심신의 조화가 무너졌어요.”
“심신의 조화?”
옥기린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신의 조화라니.
“즉 검의만 생각하며 휘두르다 보니,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거죠.”
“……과유불급이란 말이군요.”
대꾸한 옥기린이 생각에 잠기며 잠시 침묵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심득이 너무 높아서 몸이 못 따라간다니. 어느 누가 그런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혹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까?”
옥기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문제를 알아낸 천휘라면 해결 방법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있긴 한데.”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천휘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잊어요.”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공력이 실리기라도 했는지, 흘러나온 음성은 옥기린의 귀를 무겁게 자극했다.
“초식도, 검법도. 머리에서 모두 지우라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
옥기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잊으라니?
그럼 여태 태극혜검을 익혀 온 세월이 허송세월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지금 그쪽의 실력으로는 일검마다 태극혜검의 검의를 모두 담아서 펼쳐 내는 것은 무리예요.”
천휘는 신랄하게 말을 내뱉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철침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말에 옥기린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말대로 지금 자신은 태극혜검을 제대로 펼칠 수 없지 않은가.
천휘는 입을 다문 옥기린을 보면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지금 태극혜검의 검의를 펼치려 하는 건 그 쪽에게 큰 도움을 주지 않으니까, 버릴 건 버려요.”
“하지만 제대로 뜻을 담지 않고 무공을 펼치면 그게 무슨 소용이…….”
“무공은 세월의 공부라면서요. 지난 시간 동안 꾸준히 쌓아 온 공부일 텐데, 몸 곳곳이 기억하지 않겠어요?”
천휘는 옥기린이 했었던 말을 되돌려 주며, 입매를 비틀었다.
“알아서 움직여 줄 거예요. 방금전에 무의식적으로 공격했던 것처럼.”
“…….”
그 말에 옥기린이 시선을 내리더니 묵묵히 검을 바라봤다.
잊어라. 그리고 버릴 건 버려라.
몸 곳곳이 기억하니,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천휘가 했던 말이 마치 화살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가슴을 찔러 왔다.
특히 버릴 건 버리라는 말이 그 어떠한 말보다 가슴에 사무쳐 왔다.
그는 모든 걸 품고 싶었다.
무공도, 수하들도.
하지만 현실은 냉담했다.
태극혜검은 아직도 자유자재로 펼쳐지지 않았고, 많은 수하가 자신의 손을 떠나야 했다.
‘……지금의 내 그릇은 모든 것을 담기에 부족하다.’
그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인정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잊고, 버려라.’
이윽고 그는 머리를 비워 갔다.
생각도, 태극혜검도, 그 외에 잡생각도.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모두 다 사라져 가더니 이윽고.
무(無)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순간.
번쩍!
옥기린의 뇌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동시에 그가 검을 파지했다.
무의식 중에 한 행동이었다.
휘리릭―
뽑혀 나온 그의 검이 곧장 유려하게 움직였다.
검신은 나비와도 같이 춤추며, 사방에 아름다운 청광을 흩뿌렸다.
“이건 예상외인데?”
천휘는 그새 무아지경에 빠졌는지 눈을 감은 채 검무를 추는 옥기린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물러나 근처 바위 위에 앉았다.
“뭐, 상관없나?”
천휘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차피 목적은 하나였다.
바로 이 태극혜검을 코앞에서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지 않은가?
천휘의 눈이 찬란하게 빛났다.
어느새 피어난 공력이 그의 두 눈동자에 실리며, 옥기린을 훑어갔다.
혈맥과 근육, 내공까지.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모두를 머리에 담던 천휘가 두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지었다.
“제대로 된 태극혜검 좀 봐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