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하하하.”
불현듯 옥기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거부를 당했건만, 그는 천휘를 바라본 채로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였다.
“아직도 낯을 가리시는군요. 하지만 이번에 같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니 어색하여도 조금 친분을 쌓는 것이…….”
옥기린이 호의를 담아 말을 계속해서 내뱉자, 천휘가 귀찮다는 듯 그 말을 끊었다.
“됐으니까, 그냥 가죠.”
축객령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제야 옥기린은 천휘가 정말 대화를 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히 물었다.
“이러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는 한껏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혹여나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천휘에게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물은 그는 대답을 기다렸다.
만약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곧장 사과를 할 준비를 하면서였다.
이윽고 천휘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그 대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말이었다.
“그냥 하기 싫은 건데.”
“……네?”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에 옥기린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공기 빠진 소리를 뱉었다.
‘그냥 싫다고? 나와 대화하는 게?’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강호에서는 특별한 악연이 있지 않은 이상, 서로가 인연을 쌓기 위해서 좋은 말을 해 주는 편이었다.
한데 저렇게 대놓고 싫다 하다니.
한참 말을 잃고 멍하니 천휘를 바라보던 그가 정신을 깨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고작 그것 때문입니까?”
그가 다시 확인차 물었지만.
“그런데요.”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
“…….”
너무나 단호한 그 말에 옥기린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슬쩍 고개를 돌려, 천휘의 옆에서 나란히 가고 있는 천향을 봤다.
‘저 말이 사실이냐?’라는 뜻이 내포된 눈짓을 하면서였다.
천향이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긍정의 의미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그에 옥기린은 천향을 보던 시선을 천휘에게로 옮기며, 입을 달싹였다.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냥 안 와도 돼요.”
천휘는 됐다는 듯이 말했다.
이만 가라는 손짓을 하면서였다.
옥기린은 천휘의 행동에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우물거렸다가 결국 다시 입을 다물며, 말고삐를 돌렸다.
그렇게 그가 멀어져 갈 무렵.
“그래도 되겠어?”
천향이 점점 작아지는 옥기린의 등을 보며 말했다.
옥기린은 같은 임무를 수행할 천정대의 대주였다.
한데 그냥 귀찮다는 이유로 대화를 거절하는 꼴이었으니, 어찌 걱정되지 않으랴.
“그래도 이제부터 같이 임무를 수행할 텐데, 척을 지면…….”
“같이 임무를 수행해요?”
천휘가 무슨 말이냐는 듯 천향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뭔 패망할 것도 아니고.”
“응? 무슨 말이야?”
천향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천휘는 그런 천향의 반응에 혀를 찼다.
딱 보면 모르나?
그의 시선이 사방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천정대에게로 향했다.
약 삼백에 달하는 인원.
마치 군세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들을 빠르게 훑어보는 천휘의 눈에는 미덥지 못하다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오합지졸들이 많아 봤자 다 거기서 거기죠.”
천휘의 평가는 딱 그 정도였다.
외화내빈(外華內貧).
겉으로는 대단해 보이지만, 속을 자세히 파고들면 실속이 전혀 없었다.
몇몇 무위가 괜찮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채 백도 되지 않았다.
‘차라리 멸절대처럼 소수 정예로 수련해서 합을 맞추는 게 실전에선 낫지.’
천휘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옥기린을 응시했다
‘급하게 만든 별동대라 인원을 모두 받아들인 것 같은데…….’
그의 심정은 얼추 알 것 같았다.
부대의 힘을 빠르게 키우는 방법은 다름 아닌 병력을 늘리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저것은 분명한 실책이었다.
부대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을 감당하는 것에도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특히 군세와 같은 형태일 경우 통일된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데, 무림인들의 경우 그 수가 많아지면 하나로 획일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저 중에 절반은 죽겠지.’
차갑게 내려앉은 천휘의 안광이 번뜩였다.
경험에서 나온 확신이었다.
천휘는 옥기린과 천정대를 훑어보던 시선을 거두며, 입을 달싹였다.
“우리는 남들 말고 임무에만 신경 쓰면 돼요.”
“따로 움직이려고?”
“네.”
천휘가 담담하게 답했다.
처음부터 그는 옥기린, 천정대와 같이 합공할 생각이 없었다.
“같이 임무를 수행하라고 했지, 같이 움직이라는 말은 없었잖아요?”
* * *
어둠이 천하에 드리워졌다.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별빛과 만월이 어둠 속을 비출 무렵, 평야의 한곳에 많은 모닥불이 타올랐다.
멸절대와 천정대였다.
찾아온 밤에, 거의 하루를 꼬박 달린 그들이 노숙을 준비한 것이다.
불침번을 제외한 모두가 깊은 수마에 잠겼다.
피곤함이 절정에 달한 탓일까.
피풍의를 이불 삼아서 덮은 이들의 쌔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고요함이 일대 공간을 지배했다.
그 고요함 속.
“헙!”
거친 숨소리와 함께 몸을 벌떡 일으키는 이가 있었다.
옥기린이었다.
“헉, 헉.”
일어나 앉은 그는 가쁜 숨을 뱉었다.
더운 김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가, 바람과 같이 빠르게 사라졌다.
“또인가?”
옥기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는 나직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과 별이 떠오른 밤하늘 위로 방금 전 꾸었던 악몽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대, 대주님!’
‘도와, 컥!’
싸늘한 주검이 된 대원들과 천정대를 그만둘 만큼 중상을 입게 된 순간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그의 눈빛에 지독한 착잡함이 감돌았다.
벌써 사망자만 오십에 달했으며, 자잘한 부상자까지 부상자만 백을 넘었다.
그것도 겨울이 채 지나가기 전에.
“쉬이 가질 않는구나.”
속닥이던 그가 손을 움직였다.
그는 이내 자연스럽게 옆에 고이 놔두었던 평생의 벗, 검을 잡았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도 자기는 그른 것인가.”
그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못 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마음이 심란한 탓일까.
천정대를 이끌고 임무를 수행한 이후부터 그는 쭉 악몽에 시달렸다.
옥기린은 익숙하게 발을 옮겼다.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 그를 안심시켜 주는 것은 무공밖에 없었다.
그렇게 걸어간 그는 근처에 허리춤까지 닿는 갈대들이 자란 곳에 도착했다.
휘이이―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며 그를 간질였다.
겨울이 지났음에도 북풍한설과 같은 차가움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한껏 열이 올랐던 옥기린은 오히려 시원하다 여겼다.
스르륵―
바람을 느끼던 그가 검을 뽑았다.
능숙한 손짓이었다.
어느새 검이 그의 가슴께까지 들어 올려지며, 푸른 검신을 드러냈다.
옥기린이 검을 묵묵히 바라봤다.
강호에 출도할 때 사부님께서 건네주신 것으로 청광(靑光)이라 부르는 검이었다.
그 이름대로 검신은 내리쬐는 만월을 푸르른 빛으로 반사해 사방에 흩뿌렸다.
아름다운 청광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그때.
스으으―
청광이 꼬리를 늘어트렸다.
검이 움직인 것이다.
가슴께까지 들어 올려졌던 검은 좌에서 우로 움직이며, 궤적을 그렸다.
한데 그 움직임이 아주 느릿했다.
둔검(鈍劍)인가, 싶을 정도였다.
이윽고 좌에서 우로 기다란 궤적을 그린 검신이 우뚝 멈춰서고.
스걱―
뒤늦게 갈대가 잘려 나갔다.
옥기린은 자신의 주변에 날아다니는 갈대를 보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저 횡으로 긋기만 한 검로.
하지만 재차, 삼차 펼칠 때마다 검로는 조금씩 형태가 달라져 있었다.
어떤 때는 살짝 옆으로 기울었고, 어떤 때는 한 치가량 위로 올라갔다.
마치 옥기린이 지금 펼치는 검에 익숙하지 않은 듯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검을 휘두르던 어느 순간.
저벅―
그가 불현듯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가죽신의 앞코가 자라난 풀잎을 지그시 밟으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낮은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휘이이이―
부드러운 바람이 생성되었다.
그를 중심으로였다.
동시에 그의 검은 기묘한 검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 좌에서 우.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가 멈췄다.
짧은 멈춤.
하지만 그것은 검무에 들어선 그의 인지 영역에서는 길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내 옥기린이 숨을 골랐다.
하단전을 자극하면서였다.
고이 휴식을 취하던 내공은 검무를 출 때부터 이미 준비를 끝냈다는 듯, 단숨에 그의 의지를 따랐다.
그의 전신에 기운이 피어났다.
흑과 백.
음과 양.
상반된 기운이었다.
옥기린은 그 상반된 기운을 단번에 하나로 끌어올리더니, 검에 담았다.
번쩍!
청운에 푸르른 빛이 스며들었다.
검기였다.
“음과 양을 인도해 하나의 조화로운 륜(輪)을 그릴지어니.”
머릿속에 있던 구결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옥기린은 검기를 품은 청광을 부드럽게 흘렸다.
부드럽게 움직인 검이 내리쬐는 달빛을 흘리며, 비단처럼 떨어져 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옥기린은 발놀림을 쉬지 않고, 몸을 회전했다.
휘리릭―
단숨에 그의 전신이 회전하더니 그의 주변에 피어난 흑과 백, 양과 음의 기운이 기운차게 섞여 들어갔다.
신비로웠다.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흑과 백이 하나로 합쳐져 가더니, 이윽고 허공에 하나의 륜을 그려냈다.
태극(太極)이었다.
그렇게 그는 마음속을 점령했던 심란함도 잊은 채 검무에 빠져 갔다.
한편 멀찍이서 바위에 앉아 검무에 빠진 옥기린을 보는 자가 있었다.
천휘였다.
옥기린이 잠에서 깨어나 빠져나갈 때부터 따라온 천휘는 흥미의 눈빛을 발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당파의 검법이라, 오랜만인걸.”
그렇게 한창 검무를 구경하던 천휘가 눈을 빛내며, 턱을 매만졌다.
“잠깐만 저 검법은…….”
천휘의 눈이 깊어졌다.
마치 무저갱과도 같은 그 눈빛이 옥기린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쫓았다.
그러기를 잠시.
“태극혜검(太極慧劍)?”
천휘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태극혜검은 정종팔대검법(正宗八大劍法) 중 하나인 절대검공이었다.
전생의 무당파에서도 이를 제대로 익힌 자는 없다시피 해서 오직 문헌으로만 봤었던 검법이거늘.
지금 앞의 옥기린이 펼친 것이다.
‘무당파가 기대할 만하네. 태극혜검에 입문하는 건 어지간한 무재로는 턱없었을 텐데.’
여간 기대가 아니었을 듯했다.
기나긴 무당파의 역사에서도 대성한 자는 겨우 다섯밖에 안 된다는 절대검공을 저 어린 나이의 옥기린에게 알려 준 것이었으니.
“그런데 많이 아쉬운걸.”
옥기린을 살피던 천휘가 혀를 찼다.
갈수록 그는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저 절대검공을 저렇게밖에 펼치지 못하다니.”
옥기린은 태극혜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방증하듯 어느 순간부터 천휘는 검무를 펼치던 그의 움직임에서 묘한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살짝 손대면 부서질 것 같은 느낌.
바로 그 순간.
화아아아악!
옥기린의 기파가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검을 휘두르던 옥기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거두었다.
“……큭.”
충격을 받은 듯 옥기린은 짧게 신음을 흘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공을 채 갈무리하지 못한 충격이 그의 전신을 휩쓴 것이다.
“여기서 또…….”
속닥이던 그가 이를 악물었다.
매번 이러했다.
태극혜검의 중반부를 펼칠 때마다 이 부분에서 어긋나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지?”
그가 중얼거리던 그때.
“뭐가 문제인지 알려 줄까요?”
뜬금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옥기린이 고개를 든 순간,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씩 웃고 있는 천휘와 눈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