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하하하핫!”
무림맹주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내 한바탕 웃은 무림맹주가 천휘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순간 그의 수염이 들썩거렸다.
“서두르는군. 이유가 있나?”
그의 눈빛이 검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채 천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바로 보고 싶어서 그런데요.”
천휘는 가볍게 흘렸다.
그의 물음도, 눈빛도.
무림맹주의 수염이 살짝 꿈틀댔다.
“……그게 전부인가?”
“그렇죠.”
천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무림맹주는 그런 천휘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좋네.”
“지금 바로 괜찮다는 건가요?”
“출입을 허락한 이상, 어차피 언젠가는 들어갈 일 아닌가. 본인이 원한다는데 괜히 뒤로 미룰 필요가 있겠나.”
“그건 마음에 드네요.”
천휘가 웃으며 말하자.
“그렇다면 다른 것은 마음에 안 들었다는 건가?”
무림맹주가 꼬투리를 잡듯 대꾸했다.
하나 말과 다르게 무림맹주의 온화한 얼굴에는 입꼬리가 살짝 비틀려 있었다.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었다.
천휘가 그걸 보고 마주 웃었다.
“전부는 아니고, 조금?”
“하하하핫!”
무림맹주가 고개를 젖히며,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무림맹주라는 체면도 잊은 듯 시원한 웃음을 터트린 그는 이내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꿀꺽―
남은 찻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 지켜 온 다도(茶道)의 예의를 집어던진 것이다.
“역시 이게 편하단 말이지.”
속닥이며 찻잔을 놓은 그가 눈동자를 움직여서, 일어선 천휘를 봤다.
어느새 웃음기를 지운 무림맹주의 얼굴 위로 등롱의 불빛이 떨어지며 음영이 졌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모습이었으나, 어딘가 내려다보는 듯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말과 함께 그가 천휘를 훑어봤다.
그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아내려는 듯이.
마치 독사와도 같은 눈빛으로 집요하게 훑는 무림맹주의 시선에 천휘가 입매를 비틀며, 말을 꺼냈다.
“그 마음은 후딱 접으시죠.”
“음, 무슨 말인가?”
“아무리 제가 매력적이라지만, 저는 남색가가 아니라서요.”
순간 무림맹주가 말도 잊고 멍하니 천휘를 봤다.
그러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그것참 재밌는 농이군.”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말하는 무림맹주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를 않았다.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이내 그가 시선을 돌려 제갈공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소협을 안내해 주게나.”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답한 제갈공은 이내 천휘에게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가세나.”
그렇게 제갈공과 천휘가 떠나려고 할 때.
“나중에 또 보세나.”
무림맹주가 천휘에게 인사했다.
등롱의 노란 빛 아래에서 무림맹주는 천휘를 보며, 안광을 토하고 있었다.
그걸 본 천휘가 입을 달싹였다.
“나중에 보죠.”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인사를 건넨 천휘는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 * *
천휘와 제갈공은 누각을 빠져나와서 전에 함께 왔었던 맹의 가장 거대한 전각, 무천각(武天閣)으로 향했다.
“조심히 따라오게.”
제갈공은 예전과 같이 말하며 눈앞에 있는 기묘한 문을 통과했다.
하나, 둘, 셋. 넷…….
끝없이 문이 열리고, 닫혔다.
한밤중의 고요함 속 제갈공의 손을 따라, 열리는 문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문을 연 제갈공과 천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둘이 대화도 없이 끝없이 길게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던 중이었다.
“자네 덕분에 조금 편해졌네.”
불현듯 제갈공이 말을 꺼냈다.
“자네와 멸절대가 임무를 모두 이행해 준 덕분에 사흑련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세작들을 특정해 낼 수 있었어. 하여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세작? 아, 그런 놈들이 있었댔지?
천휘는 임무를 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면 말로만 그러지 마시고, 어떤 방식이든 보답을 해 주시죠.”
“그래서 이렇게 자네가 들어가고자 하던 비천서고에 가고 있지 않은가?”
“쩝.”
천휘가 입맛을 다셨다.
그 말대로 임무를 수행하면 비천서고에 들어가게 해 준다고 했었으니, 더 내놓으라 하기도 애매했다.
그런데 그때 제갈공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자네는 무림맹에 침투한 세작들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나?”
담담한 물음.
하지만 내용은 상당했다.
천휘는 턱을 매만졌다.
세작이라…….
“딱히 궁금하지는 않은데.”
제갈공이 말하기 전까지 세작이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을 정도였다.
이제 와 관심이 갈 리가.
“신기하군.”
제갈공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이라면 무림맹의 세작이 누군지 알고 싶어서 두 눈에 불을 켤 텐데 말이야.”
“그건 그들이죠. 전 저고.”
천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군.”
이내 제갈공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계단의 끝이 보이고, 영롱한 빛이 천휘의 눈에 들어왔다.
‘흠, 오랜만에 온 것 같네.’
사실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무림비고에 들어갔던 일이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최근 강호를 왔다 갔다 하며 여러 일을 겪었다 보니, 체감상 오랜만이라 느껴졌다.
이내 제갈공이 빛에 몸을 파묻었고.
저벅.
천휘 또한 빛을 향해 나아갔다.
빛으로 들어오니 거대한 두 개의 철문이 있었다.
그리고 두 문의 중앙에 하나의 의자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흰 머리가 빽빽한 노인이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다.
문지기, 육무광이었다.
“어르신.”
“흐음?”
육무광은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제갈공과 천휘를 보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이거 의외로구먼.”
육무광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군사, 자네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곳에 다시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제갈공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육무광은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주름진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같은 목적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반쯤 잠긴 눈으로 군사를 보던 육무광이 시선을 돌려 옆의 천휘를 바라봤다.
“자네는 언젠가 또 올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구먼.”
천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가요? 전 늦은 것 같은데.”
“허허, 자신감이 넘치는군.”
“자신감이 아니라, 사실이죠.”
“보기 좋은 모습이구먼.”
육무광은 천휘의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가 제갈공에게 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가? 전과 같이 무림비고인가, 아니면 비천서고인가.”
“비천서고입니다.”
“아주 좋은 선택이로군.”
육무광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윽고 그는 왼쪽 문에 다가가 손을 가볍게 움직여, 문 위에 대었다.
그리고 그때.
화아악!
천휘의 눈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매화신공의 내력이 실린 눈이 세밀하게 육무광과 문을 살폈다.
상단전이 열리고, 사고가 빨라졌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 속에서 기운이 요동쳤다.
문을 마주한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기의 흐름이 문양을 만들어 냈다.
이윽고 그 문양이 완성된 순간.
쿠구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바닥과 천장이 흔들렸다.
그러다 이윽고 철문이 활짝 열리며 그 안의 광경을 훤히 내보였다.
무림비고가 열릴 때 본 광경과 같았다.
‘저런 식으로 기운을 비틀고, 흘리면 문이 열린단 말이지?’
천휘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한 번 보는 것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던 내공의 흐름이나, 두 번 보게 되자 확실히 그 현상을 간파할 수 있었다.
육무광이 알면 기겁할 일이었다.
이곳은 오랜 역사를 지닌 무림맹의 최후 보루로써 지어진 곳이었다.
그러한 만큼, 두 문은 제갈세가와 모산파가 힘을 합쳐 만든 온갖 진법과 술법의 결정체였다.
거기에다 이 문을 열 방법은 오직 일인 전승으로만 전해져 왔고, 현재 그 방법을 아는 자는 당대 계승자인 육무광과 지금 누구도 모르게 은밀히 키워 놓은 제자뿐이었다.
그런데 천휘가 알아낸 것이다.
그것도 고작 두 번 보는 것만으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나 그것을 모르는 육무광은 비천서고 안으로 들어가며, 따뜻한 얼굴로 천휘를 향해 손짓했다.
“자, 들어오게.”
“전과 똑같네요.”
천휘는 제갈공에게 말하며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비천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쿠구구궁―
열렸던 철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고, 밖에 있던 제갈공이 입을 뗐다.
“기한은 한나절이네.”
그 말이 끝나며, 문이 닫혔다.
그로 인해 어둠이 찾아오려 할 때.
파앗!
사방에서 야명주가 빛을 비췄다.
“오호.”
천휘가 눈을 빛냈다.
은은하게 내부를 비추는 야명주의 불빛 아래, 수많은 책장이 존재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거 한나절 만에 다 읽기는 무리겠는데?’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눈에 들어오는 곳만 해도 화산파의 만경각(萬經閣)만 할 것 같았다.
“얼른 읽어야겠어.”
천휘가 바로 발을 움직였다.
시간이 없었다.
한나절, 그 시간 안에 최대한 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봐야 했다.
천휘는 바로 앞의 서책을 꺼냈다.
동시에 그의 상단전이 활짝 열리면서 그의 의식이 매우 빨라졌다.
이윽고 그의 손이 움직이고.
파라락―
종이가 찢어질 것처럼 거칠게 넘어갔다.
* * *
“맹주님.”
누각으로 돌아온 제갈공은 차 대신에 술잔을 기울이는 맹주를 불렀다.
“왜 부르는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비무를 받아들이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제갈공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휘의 공이 크다지만, 비천서고 역시 쉽게 출입 허락이 떨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그런 비천서고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했으니, 비무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그는 받아들였다.
그가 아는 무림맹주라면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였다.
“생각보다 더 강하더군.”
무림맹주가 술잔을 탁 놓으며 말했다.
출렁거리는 술이 점점 기울기 시작한 현월을 아슬아슬하게 담아냈다.
“아마 나와 동수일 것이네.”
“……!”
제갈공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표정 변화가 별로 없던 그조차 이 말에는 경악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고작 이십 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무림맹주와 같은 무위라니.
일순간 혹시 무림맹주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무림맹주가 무위와 관련된 일로 거짓을 말할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갈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비무는 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비무에서 동수라도 이뤘다가는…….”
그가 급하게 말을 뱉었다.
무림맹주는 고고해야 했다.
후의 대계를 위해서도.
그래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무림맹주는 고개를 내저으며 씩 웃었다.
“상관없네.”
그가 차가운 눈빛을 발했다.
아주 싸늘한 한파와도 같았다.
“아니, 오히려 좋지 않은가. 그렇게 된다면 은거 중인 그들을 밖으로 끌어낼 미끼로 충분할 테니 말일세.”
제갈공의 눈이 커졌다.
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
“설마 팔무신을 다시 강호에…….”
차마 다 내뱉지 못한 제갈공의 말에 무림맹주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기 여명(黎明)이 비추는군.”
어두운 밤하늘을 빛내던 현월과 많은 별이 여명에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밤이 가고, 아침이 오는 것이다.
느릿하게 변해 가는 광경을 무림맹주가 묵묵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현 강호는 밤과 같지.”
지금의 강호는 어두운 밤이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팔무신이 만든 구주삼페세의 밤에서 수십 년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꿈만 꿀 뿐이었다.
“하나 그것도 이제 끝이네.”
무림맹주가 눈을 감았다.
이 기나긴 영원과 같은 강호의 밤을 끝내기 위해선 여명이 필요했다.
저기 밤을 물러나게 하는 밝은 여명이.
그리고 그 여명은 새로운 아침을 불러 강호에 해가 떠오르게 할 것이다.
스르륵―
무림맹주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눈꺼풀 아래에서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저 멀리서부터 떠오른 여명보다 더욱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침 밤하늘이 사라지고 아침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것을 보던 무림맹주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내 손에 이 밤이 끝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