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늘 위 떠오른 현월(弦月)과도 같은 눈웃음 아래, 눈빛은 투명했다.
누각 주변의 호수와도 같았다.
고요하고, 잔잔했다.
그리고 그 잔잔함을 담은 눈은 밤하늘을 반사하는 호수처럼 맞은편에 있는 무림맹주를 비추고 있었다.
적막이 드리워졌다.
그 눈길이 침묵을 자아낸 것이다.
일순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가만히 서로를 보며 웃는 둘의 미소에는 무거운 압박이 서려 있었다.
‘이 녀석이 현재 무림맹의 맹주란 말이지?’
천휘의 입매가 더욱 비틀렸다.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위압감을 터트린 무림맹주는 이 공간을 철저하게 자신 아래에 두고 있었다.
기세와 기도가 아닌 그 인물 자체가 지닌 본연의 위압감.
즉 의념(疑念)의 발현이었다.
‘패군이 떠오른단 말이지.’
천휘의 눈이 깊어졌다.
무림맹주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패군 제갈고천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를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극찬이었다.
이번 생에서 패군만큼 그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이는 없었으니까.
오직 그뿐이었다.
상대하면서 손에 꼽을 만한 고수였던 녹림대제도, 농질도 한 끗발 부족했다.
꽤나 재밌는 무공을 보여 준 불사천교주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중상에 가까운 상처를 새긴 이였다지만, 그를 상대하면서도 패군이 떠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패군은 그 격이 달랐다.
강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천외천의 경지에 발을 내디딘 절세고수.
이번 생만이 아니라 전생까지 통틀어 손에 꼽히는 고수가 그였기 때문이다.
괜히 당대 강호에서 무신(武神)이라 칭송하며 불리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맹주를 본 천휘의 머릿속에서 패군이 잠깐이나마 떠올랐다 사라졌다.
‘최근 들어 지루할 틈이 없어.’
천휘의 가슴이 들떴다.
이 압박감과 강렬함.
그것이 그에게 흥분을 선사했다.
그때였다.
무림맹주의 눈빛이 시퍼런 광망을 토하더니, 곧 밤하늘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쿵!
돌연 위압감이 위에서 내리꽂혔다.
전신을 삐걱거리게 하는 기세였다.
고절한 경지의 내공 운용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걸 받아들이는 천휘의 표정은 아주 차갑게 변해 있을 뿐이었다.
미소조차 없어졌다.
대신 눈이 사납게 치켜떠졌다.
갑자기 이런 짓을 벌인 무림맹주의 의도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놈 봐라?’
자신을 짓누르는 위압감에는 투기는커녕, 조금의 위협조차 없었다.
거기에 주변은 고요했다.
즉 섬세하게 내공을 운용해서 오직 자신만을 짓누르고 있는 거였다.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그가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을.
‘감히 누가 누굴 시험하려고?’
천휘가 눈을 반개했다.
등롱의 노란빛을 반사하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 순간 은은한 적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아아―
밑의 바짓단이 살랑거렸다.
그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주변에는 바람 한 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천휘의 바짓단에서 미풍이 일기 시작하더니, 점점 세져 갔다.
이윽고 누각에 달려 있던 많은 등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등롱의 노란빛은 분분히 흩어지며, 호수에 새로운 별빛을 흩뿌렸다.
이내 밤하늘보다 더욱 반짝임을 발하던 호수가 미풍에 흔들거리더니.
스으윽―
누각마저 호수의 별빛에 잠겼다.
이윽고 신비로운 광경이 벌어졌다.
주변 전각들이 흐릿해지며 사라지고 밤하늘 위 누각만이 덩그러니 놓인 것 같은 풍경을 조성한 것이다.
말로만 듣던 선계(仙界)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신비로운 풍경을 만든 당사자, 천휘가 입술을 달싹였다.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네요.”
심연과도 같이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가 무림맹주를 고이 담은 채였다.
그러기를 잠시.
“아주 근사하군.”
무림맹주가 주변을 보며, 말했다.
마음에 든 듯한 표정이었다.
이어서 그가 뒷짐을 풀자.
화아악!
그가 풍겼던 위압감이 단숨에 화하며, 꿈결과도 같이 사라졌다.
재빠른 의념의 조화였다.
천휘는 갑자기 맥이 빠지게 위압감을 거두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한바탕 붙자는 거 아니었어요?”
“허허.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럼 왜 그런 거죠?”
“자네의 실력을 알고 싶었네.”
무림맹주가 씩 웃으며, 답했다.
호남다운 호쾌한 미소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백견이 불여일행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자네의 실력에 대한 얘기는 귀가 따갑도록 많이 들어 왔지만, 직접 이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어서 말일세.”
“별거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네요.”
“그럼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는가?”
“……흠.”
천휘가 입을 다물었다.
시원하게 인정해 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쩝.”
무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천휘가 퍼트렸던 의념을 거두었다.
누각을 뒤엎었던 미풍이 단숨에 사라지며,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쓸데없는 짓 말고 제대로 이야기하죠.”
천휘가 툭 던지듯 말했다.
“원래 목적에 대해서.”
조곤조곤한 어조에 힘이 실렸다.
이곳에 온 목적이야, 확실했다.
비천서고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그 목적을 이루게 할 자는 자신을 부른 제갈공이 아니라 이 앞에 있는 맹주였다.
“그러도록 하지.”
천휘의 말에, 무림맹주는 잠잠해진 주변을 차분하게 둘러보더니, 이내 제갈공에게 그 시선을 멈췄다.
“군사.”
제갈공은 지금 이러한 상황에 짐짓 놀란 듯한 기색이었으나, 무림맹주와 눈이 마주치자 그런 적 없다는 듯 놀란 기미를 깨끗하게 지웠다.
“부르셨습니까?”
“준비한 차를 가져와 주게.”
무림맹주의 말에 제갈공은 고개를 한차례 숙이더니, 곧 발을 옮겼다.
누각의 끄트머리를 향해서였다.
그사이 무림맹주는 누각의 중앙에 놓인 다탁에 앉으며, 천휘를 봤다.
얼른 오라는 손짓을 하면서였다.
“이리 와서 앉게나.”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요?”
“이왕이면 차분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무림맹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천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무림맹주가 앉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것을 모두 지켜보던 무림맹주는 천휘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앉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자네의 활약은 익히 들었네.”
무림맹주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북에 있는 사파 토벌과 아미성전에서 벌인 활약만으로도 놀라울 정도이건만, 백 년을 산 노괴 불사천교주를 죽이고 본단도 무너트렸다고 했던가.”
천휘가 지겹게 들어온 얘기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답했다.
“그렇죠.”
무림맹주는 천휘의 그러한 태도에도 미소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정말 놀랍더군. 그 나이대에 자네만큼 놀라운 활약을 선보인 자는 없을 것이네.”
“아, 그래요?”
계속되는 쓸데없는 찬사에 천휘가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던 그때.
“차를 가져왔습니다.”
제갈공이 찻주전자와 찻잔을 가져와 다탁 위에 조심스럽게 놔두었다.
“좋군.”
무림맹주가 찻주전자를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부글부글―
찻주전자가 끓는 소리가 들렸다.
삼매진화였다.
단숨에 차를 끓여 낸 그는 앞에 놓인 찻잔에 쪼르르 따랐다.
부드러운 향이 사방에 퍼졌다.
새하얀 연기를 뿜는 찻물을 지켜보던 무림맹주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휘를 보며 말했다.
“먼저 마시게나.”
동시에 찻잔이 공중에 떠올랐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어서 허공에 둥실 떠오른 찻잔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며 나아가더니, 천휘 앞에 조심히 놓였다.
지고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할 수 있는 수법.
허공섭물이었다.
그 고절한 무위를 숨 쉬는 것처럼 손쉽게 선보인 무림맹주는 다시 찻주전자를 들더니, 바로 앞에 놓인 찻잔에 찻물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끼는 용정차라네. 향이 은은하니, 마음을 평안하게 해 줄걸세.”
“흐음, 그 말대로 향은 좋네요.”
설명을 들은 천휘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며 담담하게 들이켰다.
어찌 보면 예의가 없는 듯한 태도.
하지만 무림맹주는 그런 것은 신경도 안 쓰는 듯 자신이 따른 찻잔을 들어 차를 조용히 들이켤 뿐이었다.
그렇게 둘이 잠시 차를 즐기던 어느 순간.
탁.
뜨거운 차를 다 마신 천휘가 찻잔을 놓았다.
그리고 무림맹주를 보며 말했다.
“원하는 대로 차도 다 마셨으니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하죠.”
얼른 끝내자는 태도를 보이는 천휘의 말에 무림맹주가 찻잔을 놓았다.
“성질이 급하군.”
“차나 마시러 온 게 아니라서요.”
천휘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이야기라면 바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무림맹주는 쓸데없이 차를 건네며, 시간만 잡아먹고 있었다.
‘본론에 언제 들어가려고.’
천휘의 눈빛을 읽은 무림맹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좋네. 본론으로 들어가지.”
무림맹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자네가 최근에 쌓은 공적은 높더군. 작금의 무림맹에서 그 누구도 쫓지 못할 정도로 말일세.”
무림맹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주변의 어둠보다 낮게 깔린 음성이 천휘의 귓가를 천천히 간질였다.
“그 공을 치하하고자 하네.”
천휘의 눈이 반개했다.
기다리던 말이었다.
이어서 무림맹주가 말을 덧붙였다.
“군사에게 듣기로는 비천서고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들었네.”
말하던 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맞는가?”
“그렇긴 하죠.”
“그럼 그걸 보상으로…….”
그때 천휘가 입을 달싹였다.
“그거 말고 다른 보상을 받고 싶은데, 안 되나요?”
“다른 보상……?”
무림맹주가 눈썹을 찡그렸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는 곧 찡그렸던 눈썹을 되돌리며 천휘를 향해서 물었다.
“어떤 보상을 원하나?”
천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원래라면 천휘는 무림맹주의 말처럼 비천서고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바로 그의 눈앞에 비천서고보다 더 탐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천휘는 바로 입을 달싹였다.
무림맹주를 똑바로 마주 보면서.
“그쪽과 비무를 하고 싶네요.”
“…….”
무림맹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나와 비무 말인가?”
“네.”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질척거리는 흥미의 미소였다.
“이렇게 뛰어난 고수와 비무를 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것을 걷어차는 건 너무나도 아쉬워서 말이죠.”
천휘의 몸에서 투기가 휘몰아쳤다.
그 말을 꺼낸 순간부터 당장에 출수라도 할 것처럼 기세가 타올랐다.
찻물이 살짝 출렁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누각이 흔들렸다.
매화신공의 내력이 뿜어낸 기파를 누각이 차마 버티지 못한 것이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날뛰려 할 때.
“불가하네.”
무림맹주가 나직이 거부했다.
“자네도 현 상황을 잘 알지 않나?”
그가 차가운 음성을 흘렸다.
그 음성에는 지금 불어오는 겨울바람처럼 차갑고도, 싸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사흑련과의 전쟁 중일세.”
“……쩝.”
천휘가 바로 기운을 거두었다.
‘역시 안 통하나?’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다.
사흑련과의 전쟁 중에 무림맹주와의 비무는 자칫 제 살 깎아 먹기였으니.
그래도 한 번 찔러 본 것이었다.
혹시 받아 줄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그때 무림맹주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지금은 불가하고, 후에 사흑련과의 전쟁이 끝나면 해 주겠네.”
천휘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정말 받아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사흑련과의 전쟁이 끝난 뒤라는 애매한 전제가 붙기는 했지만,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다.
“좋아요.”
무림맹주의 허락에 천휘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
“어디를 가려는 겐가?”
무림맹주가 그를 불렀다.
“이야기도 다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려는 건데요.”
천휘가 뭔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말하자, 무림맹주가 물었다.
“비천서고에는 안 들어가려는 건가?”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천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무림맹주를 바라봤다.
“비무로 끝난 거 아닌가요?”
“말했다시피 자네의 공은 크네. 어찌 비무만으로 그 공적을 다 치하했다 할 수 있겠나.”
무림맹주가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말했다.
“자네가 거부한다면야, 상관없지만…….”
무림맹주가 더 말을 하기 전에 천휘가 재빨리 입을 달싹였다.
“그렇게 해 주면 저야 좋죠.”
무림맹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았네.”
뒤이어 무림맹주가 곧바로 말했다.
“군사.”
부름에 제갈공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군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무림맹주가 천휘를 보며 물음을 뱉었다.
“그렇다면 언제 들어가겠는가?”
그 물음에 천휘가 씩 웃었다.
이미 정해진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