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단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섞인 묵직함 이 대회의전을 단숨에 짓눌렀다.
침묵이 드리워졌다.
대회의전에 먼저 도착한 이들은 맹주의 등장에 복잡한 눈빛을 띠었다.
여태껏 모습을 안 보이던 무림맹주가 뜬금없이 등장한 것이다.
예고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그렇게 대회의전을 사로잡은 맹주가 고즈넉한 눈빛을 띠며,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자들이 꽤 있구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몇몇 이들을 훑더니, 이내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였다.
그가 은거에 들어가기 전에는, 보지 못했었던 이들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현도가 있었다.
일순간 맹주와 시선을 짧게 마주친 현도가 눈을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혔다.
심의검협 주천극(朱天極).
세력 없이 검 한 자루만으로 홀로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구파일방에서조차 한 수 접는 협객이었다.
‘소문이 과하지 않은 기도야.’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절대자의 위엄이 이러할까.
딱히 기세를 뿌리지도 않았건만, 무림맹의 주축들이 모인 대회의전을 오직 존재감만으로 사로잡았다.
한편 한 명씩 회의장의 인원을 살펴보던 맹주가 시선을 거둘 즈음.
“새로운 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때를 맞춰 군사가 음성을 흘렸다.
마치 노린 것처럼 딱딱 맞았다.
“그런가.”
무림맹주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동안 무림맹도 많이 바뀌었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그때.
“아미타불. 오랜만이오. 맹주.”
불현듯 원종대사가 입을 뗐다.
은은한 금광을 발하며 법력까지 발휘한 그가 맹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맹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사께서는 아직도 계시는구려.”
원종대사가 눈을 찡그렸다.
무덤덤하게 말한 것 같았지만 듣기에 마치 늙은 중이 아직까지도 무림맹에서 버티냐는 말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모습을 안 보인 맹주께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빈도가 어찌 뒤로 빠질 수 있겠소이까.”
원종대사의 말이 가시처럼 돋쳤다.
완벽한 반박이었다.
하지만.
“그 말도 맞구려.”
맹주는 맥이 빠질 만큼 그 사실을 아주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원종대사의 공격을 흘려 버렸다.
그에 원종대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군.’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대로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슨 목적을 가진 것인지 파악이 불가했다.
곧 그가 맹주를 보며, 물었다.
“한데 무슨 일로 참석하셨소이까?”
“어불성설인 말을 내뱉는구려.”
맹주의 목소리가 짙게 내리깔렸다.
“맹주가 무림대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외까.”
“……예상외로구려.”
원종대사의 눈이 반개했다.
“빈도는 맹주가 군사에게 모든 권한을 맡긴 것을 보고, 아예 모습을 안 드러낼 줄 알았소만.”
그의 말이 쏘아지듯 뱉어졌다.
질책이었다.
사흑련과의 전쟁이 벌어졌거늘, 맹주이면서 군사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 놓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는 책망.
몇몇이 동조한다는 눈빛으로 상석에 앉은 맹주를 매섭게 노려봤다.
맹주가 나타나기를 바랐고, 막상 나타나니 그 위압감에 짓눌렸던 그들이지만, 시간이 지나자 여태껏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에 괘씸함이 들었다.
지금이 어디 평범한 때인가.
사흑련과의 전쟁 중이었다.
즉 무림맹의 존망이 걸린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무림맹을 책임져야 할 무림맹주란 작자가 이제야 나타났으니.
날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매서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맹주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일이 있어 늦었을 뿐이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못 나왔다는 말이오?”
원종대사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변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아직 밝힐 때가 아니구려.”
“그런 말도 안 되는…….”
원종대사가 무어라 더 말하려 할 때.
“지금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가?”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용주개였다.
맹주의 뜬금없는 등장에 역시나 놀랐던 그였으나, 지금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맹주가 나온 것이 중요하지.”
“…….”
입을 우물거린 원종대사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였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맹주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용주개는 원종대사를 슬쩍 보다 맹주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건넸다.
“이제 반 은거는 끝난 건가?”
“그러네.”
“좋군.”
대화는 짧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계속 쓸데없이 과거를 붙잡고 늘어지기에는 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소란이 가라앉은 순간.
“그럼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만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맹주가 주변을 보며, 말했다.
“군사. 일단 상황을 설명하게.”
아주 단도직입적이었다.
마치 돌진만 하는 자 같았다.
그리고 제갈공 또한 그에 맞춰 품속에서 준비한 자료들을 꺼내 놨다.
빠른 설명을 덧붙이면서.
“신룡대는…….”
아직 채 겨울이 가기도 전이었으나, 벌어진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룡대주의 치명상을 비롯해 철혈단의 임무 실패, 천검장의 멸문 등등.
술술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계속 설명을 이어 가던 제갈공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임무는 저들이 설명해 줄 겁니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육원과 협위대주, 파마대주가 있는 곳이었다.
셋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길 잠시.
“육원입니다.”
육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바로 설명에 들어갔다.
“이번 임무에서…….”
육원은 임무를 수행하며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특히나 그의 설명 중.
“천휘 소협의 무공은 불사천교주를 아무 힘도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천휘에 대한 것은 세세했다.
칭찬과 감탄이 담긴 자세한 설명.
듣는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것을 직접 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하던 육원은 불사천교주가 명을 달리한 순간을 설명하고, 전투의 피해와 복귀 인원을 짤막하게 보고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불사천교주를 혼자서 쓰러트리다니.”
“녹림대제와 농질을 쓰러트렸을 때부터 보통이 아니라 생각했거늘…….”
자리에 앉은 모두가 생생한 육원의 이야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꿈결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게다가 육원은 그러한 것을 과장하거나 거짓으로 보고할 자가 아니었다.
즉 그것이 모두 객관적인 사실이란 뜻이니.
모인 이들이 마른침을 삼킬 무렵.
“놀랍군.”
육원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맹주가 놀란 표정으로 미염을 쓰다듬었다.
그가 불현듯 시선을 움직였다.
매화신협이란 별호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뿌듯한 표정을 내비치고 있는 자를 향해서였다.
“화산이 대단한 제자를 키웠구려.”
현도는 갑자기 훅 들어온 맹주의 칭찬에 놀랐으나, 곧 미소를 지었다.
“본 파가 우리 천휘에게 해 준 것은 별거 없습니다. 모두 우리 천휘가 뛰어나서 해낸 것일 뿐이지요.”
“겸양이 과하구려.”
맹주 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맹주님.”
제갈공이 맹주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임무를 수행하고 온 그들에게 공을 치하했으면 합니다. 안 그래도 최근 계속된 전쟁으로 맹 내부가 침울합니다. 이럴 때야말로 공을 치하함으로써 그들의 꺾인 사기를 북돋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몇몇이 눈을 빛냈다.
그들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제자들을 둔 이들이었다.
“흐음, 공을 치하한다라…….”
맹주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자.
“좋은 생각이오.”
“군사의 말이 맞습니다.”
“계속된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지쳐 있는 지금, 활기를 줘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들이 바로 말을 꺼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맹주가 공을 치하한다면 그 명성이 아주 드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내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그럼 일단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제 후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갈공은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런 것으로 시간을 잡아먹기에는 상황이 촉박했다.
이어서 그는 대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맹주와 함께 미리 정리해 둔 의견을 하나둘 내뱉기 시작했다.
“이번에 치명상을 입은 신룡대주를 대신해 부대주가…….”
* * *
팔 년 동안 두문불출하던 맹주의 복귀는 맹 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맹주님께서 나오셨구나!”
“드디어…….”
맹주의 등장으로 맹의 지변에 깔려 있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불안은 사라지고, 사기가 차올랐다.
맹주란 존재가 그러했다.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였으니.
그리고 그날 저녁.
그런 소란과 무관하게 태평히 있던 천휘가 전각을 빠져나왔다.
조용함 속 잠에 빠져든 이들이 꿈에도 모르게 발을 움직인 천휘는 어둠을 뚫고 나아갔다.
푸른 달빛이 부스스하게 떨어진 거리를 지나가는 천휘의 모습은 마치 귀신과도 같이 빠르고 은밀했다.
그렇게 지붕을 밟으며 한참 나아가기를 잠시.
탓.
천휘의 발이 멈췄다.
이름 모를 전각의 장원에서였다.
곧 천휘가 눈앞을 바라봤다.
잔잔한 호수 가운데 노란빛의 등롱이 흔들거리는 누각이 존재했다.
그리고 누각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군사 제갈공이었으니.
그러나 다른 한 명은 처음이었다.
‘어쭈구리?’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만히 뒷짐을 진 채, 호수를 내려다보는 그의 기도가 심상치 않았다.
고요함 속 태풍과도 같은 존재.
아무런 기세를 풍기고 있지 않았지만, 천휘의 육감은 느끼고 있었다.
고수다.
그것도 그냥 고수가 아니라…….
‘절대고수.’
천휘가 계속 바라보고 있을 때.
스윽―
호수를 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등롱 빛이 내리쬐는 중년인의 얼굴은 참으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갸름한 턱과 높은 콧대.
그뿐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려한 눈매는 젊었을 적 천하에 알려진 미남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만들 정도였다.
휘이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깔끔하게 위로 튼 머리카락이 관 사이로 흘러내리며 중년인의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 그래도 남다른 그의 분위기를 더욱 증폭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닫힌 입술이 떼어졌다.
“자네가 매화신협이로군.”
짙게 깔린 음성이 드리워졌다.
눈앞의 호수처럼 잔잔한 목소리였다.
이어서 새하얀 이를 드러낸 그는 상쾌한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소문대로. 아니, 소문보다 더욱 뛰어난 실력이로군. 눈앞에 있으면서도, 이렇게나 존재가 흐릿하다니. 마치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야.”
그가 감탄의 목소리를 흘렸다.
마치 놀라운 절경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그는 천휘를 감상하고 있었다.
“천무(天武)를 넘어서 신(神)의 경지에 발을 들인 것인가.”
이어지는 그의 말에 옆에 서서 보좌하던 제갈공이 두 눈을 부릅떴다.
‘신의 경지라고?’
충격적인 말이었다.
신의 경지, 무신지경!
오직 팔무신만이 오른 경지였다.
그런데 저렇게나 어린 아해가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니, 자연스레 충격에 머리가 멍해질 정도였다.
그때 천휘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순간 그의 신형이 명멸하며 단숨에 호수를 넘어, 누각 위에 올라왔다.
꿈만 같은 고절한 보법이었다.
중년인의 앞에 선 천휘는 눈동자를 굴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노란빛의 등롱이 두 시선 사이를 부유하며, 달빛과 섞여 아스라이 흩어졌다.
마치 둘의 존재감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소리 하나 없는 잠깐의 눈 맞춤.
하나 이미 아득한 경지에 이른 둘은 단숨에 서로를 파악해 나갔다.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천휘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하하하핫!”
중년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과연 재미있군. 재미있어.”
한참을 웃던 그가 입을 달싹였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아나?”
그 말에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앞의 중년인은 처음 보는 자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와 마주한 순간에 누구인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거의 확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이 시간에 군사인 제갈공과 함께 있는 자라면 지금 무림맹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인물밖에 없지 않겠는가?
“무림맹주잖아요?”
순간 맹주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바짝 날이 선 곡도(曲刀)와도 같이 매섭고 날카로운 눈웃음이었다.
“맞네. 내가 무림맹주 주천극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