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07화 (307/391)

307화

급작스러운 천향의 등장이었다.

“오랜만이야!”

천향은 천휘를 보자마자 양팔을 활짝 벌리면서, 껴안듯이 달려들었다.

반가움을 표하는 모습이었으나, 천휘는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피했다.

“응?”

천향은 설마 피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등받이에 ‘쿵’하고 부딪혔다.

“윽!”

천향이 부딪힌 이마를 매만졌다.

살짝 혹이 나 있었다.

이마의 혹을 매만지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천휘를 보더니, 심술이 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사제?”

천향이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렇게나 예쁜 사저의 포옹을 피하다니.”

그녀가 샐쭉거리며 투덜거렸지만, 막상 당사자인 천휘는 그에 대해선 반응도 안 했다.

다른 것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왜 여기 있어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화산파에 있어야 할 그녀인데 무림맹에 있다니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었다.

밖에 있는 열아홉의 익숙한 기척.

바로 화령단이었다.

‘화산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화산파가 맹에 찾아오는 경우 대부분이 그러한 이유였지 않은가.

천휘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자.

“왜기는.”

천향이 새빨간 입술을 비틀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었다.

“당연히 사제와 힘을 합쳐서 무림맹을 도우러 왔지.”

“뭐라고요?”

순간 천휘가 귀를 후볐다.

그러곤 마치 이상한 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천휘가 그러거나 말거나 천향은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심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무림맹을 돕겠다고 화령단을 끌고 온 거예요?”

“화령단이 온 것은 어떻게…….”

“응. 맞아.”

“화산파나 복구하지, 뭔…….”

그녀를 보던 천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현재의 화산파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화산파의 복구였다.

녹림의 습격에 엉망이 되었으니.

그것을 복구하는 데만 해도 긴 세월이 걸릴 것이 분명한 피해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무림맹을 도우러 왔다고 하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괜한 짓 말고 다시 화산파로 돌아가죠?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천휘가 쫓아내듯 말하는 그때.

“그럴 순 없어.”

천향이 대번에 거부했다.

그에 천휘가 미간을 찌푸렸으나.

“장문인께서 내리신 명령이거든.”

천향이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장문인이요?”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문인의 명령이라고 하면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어졌다.

어쨌든 자신도 화산의 제자였으니.

천향은 말을 멈춘 천휘를 보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사제와 힘을 합쳐 위험에 처한 무림맹을 도우라고 하셨어.”

천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명령이었다.

“괜한 짓을 하네요.”

“괜한 짓이라니. 사제와 무림맹을 걱정하시는 게지.”

“그게 괜한 짓이죠.”

천휘가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할 게 따로 있지. 저를 걱정하다니. 그보다 화산파나 지키…….”

“사제.”

갑자기 천향이 천휘의 말을 끊으면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천휘의 바로 코앞까지였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화가 섞인 듯, 조금 상기된 상태였다.

“물론 사제가 대단한 건 장문인도, 나도. 아니, 화산의 제자라면 누구든지 다 알고 있어. 그렇지만 사제 또한 화산의 제자야. 천하의 어느 장문인이 제자를 걱정 안 하겠어?”

그녀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본 파는 걱정할 필요 없어. 이미 대부분은 정리가 된 상태니까. 사제는 우리 도움이나 받아.”

턱을 치켜들고 콧김을 뱉은 그녀가 가슴을 두드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을 믿으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별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천휘는 말 한마디로 그녀의 당당함을 단번에 꺾어 버렸다.

천향이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좀 그냥 믿어 주면 어디 덧나?”

“사실이니까요.”

“……쩝.”

입맛을 다신 천향이 머리를 긁적일 무렵,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기 좋군.”

대화하는 것을 처음부터 봐 온 육원이 천향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화산의 제자인가?”

“그렇습니다.”

천향이 방긋 웃었다.

더없이 환하고, 사람을 반기는 미소였다.

이내 그녀는 육원과 옆에 앉아 있는 협위대주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량수불. 화산의 천향입니다.”

인사하던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막내 사제를 만나 기뻐서 인사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그에 육원이 손사래를 쳤다.

“아닐세. 천휘 소협 같은 사제를 보면 누구라도 반가울 일이지. 안 그런가?”

그가 슬쩍 협위대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추계광은 그 말에 쓱 웃더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 또한 천휘 소협 같은 사제가 있다면 소저처럼 다른 이는 눈에도 안 들어왔을 겁니다.”

“내 마음과 똑같군.”

육원과 협위대주가 읍을 취한 천향을 보며 미미한 미소를 내비쳤다.

그때 천향이 고개를 들고 육원을 보며 물었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대협의 존성대명을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어이구, 나도 실수했군.”

육원이 포권을 취했다.

“나는 육원이라네.”

“천력신도 대협?”

육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챈 천향이 눈을 반짝였다.

“과분한 별호일세.”

“아닙니다. 어쩐지 딱 볼 때부터 예사 인물이 아니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허허,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군.”

그를 보던 천향이 웃음을 유지한 채 협위대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이네.”

화산파에서 이미 안면을 텄던 둘은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이내 천향이 옆으로 고갤 돌렸다.

천휘의 옆에는 현재의 상황에 긴장한 듯 목을 움츠린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임하율이었다.

그녀는 천향과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놀랐으나, 곧바로 포권을 취했다.

“임하율이라 합니다.”

“반가워요.”

천향은 임하율과 눈을 맞추더니 능글맞은 미소를 내비치며, 속닥였다.

“사제와는 무슨 관계예요?”

“네, 네?”

“옆에 앉은 것을 보아하니 꽤나 깊은 관계인 것 같은데…….”

“헉! 마, 말도 안 됩니다.”

임하율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많이 당황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어긋나며, 솟구쳐 올라갔다.

“대, 대주님과 저는 대주와 대원의 관계일 뿐입니다.”

“흠, 사제가 매력이 없나요?”

“아, 아닙니다.”

임하율이 말을 더듬으며 뺨을 붉혔다.

매력이 없을 리가 있나.

화산파의 제자, 거기에 천하제일기재라 불리고 있으며 이번에 불사천교주를 쓰러트린 강호의 신성이 바로 천휘였다.

매력이 없기는커녕, 넘쳐흐르는 게 당연했다.

그 모습에 천향이 씩 웃었다.

‘이거 사매가 알면 난리 치겠는걸?’

그녀는 천휘에 대해서라면 거의 광신도라도 된 것처럼 날뛰는 사매 단목린을 떠올리며 임하율을 봤다.

만약 둘이 붙어 있는 지금 상황을 단목린이 봤다면 한바탕 난리를 쳤으리라.

그때 임하율이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대주님은 도사지 않습니까?”

그녀가 정론을 뱉었다.

확실히 천휘는 화산파의 도사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화산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에 착각하는 부분이었다.

“네? 그건 별로 상관없어요. 장문인이 되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속가제자가 돼서 결혼은 가능한데…… 본파의 속가 문파들 대부분이 그렇게 된 거라서.”

천향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화산파는 다른 도가 문파들보다 꽤나 자유로운 편에 속하는 곳이었다.

장문인이 되지 않는다면야, 속가제자가 되어 혼약도 가능했다.

임하율이 그 말에 당황할 무렵.

“저…… 대주님.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마차의 앞에 있는 마부석에서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향이 불쑥 들어왔을 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던 파마대원이 용기를 내서 말을 꺼낸 것이다.

“아! 죄송해요. 출발하세요!”

천향이 황급히 자리에 앉으며 외쳤다.

천휘의 바로 옆이었다.

파마대원은 곧장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윽고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천향은 천휘의 옆에 찰싹 붙어, 계속해 입을 달싹였다.

“아, 사제. 이번에 남다른 활약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이미 사제에 대한 소문이 화산까지 퍼졌어. 아미성전에서…….”

한창 시끄럽게 떠드는 천향을 시작으로 육원과 협위대주가 그 말에 끼어들더니, 이내 대화가 이어져 갔다.

대부분이 천휘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말 놀라운 소문이었지.”

“그보다 천휘 소협은 예전에…….”

* * *

“차 맛이 좋구먼.”

부드러운 눈매의 중년인이 차를 음미했다.

그렇게 몇 번 차를 홀짝이던 그는 손에 든 찻잔을 다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내 그가 정면을 주시했다.

그 맞은편에는 현 무림맹에서 가장 강한 권한을 가진 제갈공이 앉아 있었다.

제갈공은 중년인을 마주 바라봤다.

무림맹주 심의검협.

그것이 중년인의 정체였다.

그렇게 한참 무림맹주를 보고만 있던 제갈공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매화신협의 손에 불사천교 본단이 무너지고, 불사천교주가 목숨을 달리했습니다.”

순간 맹주의 움직임이 굳었다.

“그 노괴가 죽었단 건가? 매화신협이라는 아해의 손에?”

“그렇습니다.”

“허허.”

맹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하군. 겨우 스물 초반에 녹림대제와 농질에 이어서 불사천교주, 그 노괴까지 쓰러트리다니. 아마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네.”

그답지 않게 맹주가 칭찬을 뱉었다.

그만큼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덕분에 맹에 숨어든 세작도 몇 명 골라낼 수 있었습니다.”

제갈공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천휘의 활약은 세작을 골라내던 그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서너 명은 걸러 냈으니.’

무림맹의 비밀조직 흑오대(黑烏隊)가 알아낸 세작들을 떠올리던 제갈공이 차가운 눈빛을 발하던 그때.

“자네가 본 매화신협은 어떻던가?”

불현듯 맹주가 물어 왔다.

“고금제일의 기재입니다. 제가 일평생 봐 온 어떤 이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리라 사료…….”

“군사.”

맹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뒤이어 그는 길게 자라난 미염(美髥)을 한차례 쓸며, 눈을 반개했다.

“내가 지금 그걸 묻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가?”

맹주가 제갈공을 지그시 바라봤다.

무심하고, 싸늘한 눈빛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화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얼음장처럼 싸늘한 공기가 다탁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다탁 위에 놓인 두 찻잔의 찻물이 약한 파문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공간이 그의 의념하에 놓인 것이다.

마치 둘이 앉아 있는 다탁만이 세상에서 단절된 것 같은 기묘한 광경이 벌어진다 싶은 그때.

“모르겠습니다.”

제갈공이 나직이 말했다.

“모른다?”

맹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평가였다.

“자네가 파악을 못 했단 건가?”

제갈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닌 무위 때문인지, 오만한 모습을 보이기에 처음에는 어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멸절대를 다루는 모습과 임무를 수행하며 보인 모습은 결코 어리지 않았다.

오히려 완벽할 정도였다.

“오호라. 재미있는 말이로군.”

맹주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흥미가 가득한 미소였다.

“군사가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라…….”

한순간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찰나였다.

한 호흡도 안 되어 내공을 갈무리하는 놀라운 무위를 선보인 맹주는 찻잔을 다시 들어서, 홀짝였다.

“그렇다면 내 직접 만나서 판단해야 하겠구먼.”

찻물을 다 들이켠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에 처음으로 제갈공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선명한 놀라움이었다.

“밖으로 나설 생각이십니까?”

“허허. 그렇네.”

“하지만…….”

“군사 혼자 맹을 다스리는 것도 이제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는가.”

“…….”

제갈공이 침묵했다.

그 말대로였다.

사흑련과의 전쟁이 점점 치열하게 가속화될수록 맹주의 부재로 인한 문제도 커졌다.

몇몇 맹의 무인들은 맹주가 안 나오니 불안해했고, 그에 따라서 구파일방과 다른 문파에서 맹주가 언제 나올 것이냐고 압박해 올 정도니.

맹주는 입을 다무는 제갈공을 보고는, 나지막한 음성을 흘렸다.

“계획보다 조금 이르지만…….”

말을 흐린 그가 턱을 치켜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을 응시하던 그의 눈초리가 크게 휘어졌다.

싸늘한 눈웃음이었다.

“이제 내가 직접 나서야 할 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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