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어떤 상황에서도 불사천교주의 만면에 감돌던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신마벽이었다.
그것은 멸천신마공에 수십 년을 갈고닦은 사법을 덧대어서 그의 방식대로 결합해 창안한 무학의 결정체였다.
그가 직접 완성한 사도사학(邪道邪學)의 정수(淨水)로서 일반적인 호신강기와 그 결이 아예 달랐다.
공수가 동반된 절세의 호신강기.
층층이 겹쳐진 신마벽의 멸천신마기는 반탄력을 지니고 있어, 공격하는 이들이 되려 분쇄되기 마련이었다.
그로 인해 평범한 호신강기일 줄 알고 그를 공격하려다가 역으로 목숨을 잃은 자가 몇인가.
수백을 헤아려야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 또한 ‘그자’들을 제외하면 이 신마벽을 뚫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 왔거늘…….
처참히 무너졌다.
신마벽도, 그의 자존심도.
그가 꿈에서도 전혀 생각지 못한 상대의 손에 의해서.
그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눈앞의 이죽거리는 청년을 쳐다봤다.
매화신협, 천휘.
최근 강호에 크나큰 격동을 일으킨 화산의 어린 괴물은 신마벽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화산에 이렇게나 패도적인 수법이 존재했던가?’
순간 그가 의문을 떠올렸다.
화산파는 패도적인 무공보다는 환검과 변검을 앞세운 화려한 검공으로 유명한 문파이지 않은가.
그렇게 천휘를 응시하던 불사천교주가 순간 눈을 찡그렸다.
시야가 흔들리고 있었다.
신마벽이 무너진 반동에 내공을 끌어올리던 기혈이 뒤틀린 탓이었다.
그의 소매가 일순간 펄럭였다.
흔들리는 소매의 금빛 수실이 광채를 흩뿌린다 싶더니, 멸천신마기가 증폭되며 그의 기혈이 안정될 즈음.
저벅.
불현듯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휘였다.
한순간 불사천교주의 영역에 들어선 그가 좌수를 털었다.
콰아아앙!
땅바닥이 폭발하며, 깊게 파였다.
손아귀에 남아 있던 신마벽의 경파를 벌레 쫓듯이 가볍게 털어 낸 천휘의 가죽신이 땅을 눌렀다.
발바닥에 내공이 실렸다.
내디딘 발끝에서 경파가 동심원의 형태로 물결을 치며, 퍼져 나갔다.
그에 땅이 진동하는 그 순간.
휙!
돌연 천휘의 허리가 회전했다.
소매가 없는 팔의 근육이 크게 부풀면서, 사선으로 크게 휘둘러졌다.
전조도 없이 벌어진 출수.
뒤늦은 적광이 한 줄기 따르고.
그그극―
공간이 순간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끝에.
아름다운 혈화(血花)가 피어났다.
촤아악―
그 혈화를 피워 낸 불사천교주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가슴팍에는 사선으로 붉은 선이 생겨나, 핏물을 흘리고 있었다.
천휘가 펼쳐 낸 검로의 흔적이었다.
“피…… 인가.”
불사천교주의 눈이 얇아졌다.
뜨겁고, 따끔했다.
아주 오랜만에 생겨난 상처가 잊고 있었던 통각이라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스윽―
불사천교주가 좌수를 움직였다.
손가락 끝이 상처를 훑었다.
다행히 깊지는 않았다.
검이 휘둘러지는 것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반보 물러난 덕분이었다.
“반응은 빠른데. 그걸 피하다니.”
천휘가 짧게 말을 툭 내던졌다.
하수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러한 행태에 불사천교주는.
“후후후.”
웃었다.
가슴팍이 들썩거리고, 피가 더욱 뿜어지며 흘렀다.
하지만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더니, 어느 순간 상처를 훑던 좌수에 내력을 실었다.
우우우웅―
공기가 진동했다.
동시에 그의 소매에 있는 금빛 수실들이 흔들리며, 광채를 흩뿌렸다.
이윽고 상처를 짚고 있던 손을 떼자.
흐르던 피가 멈췄다.
신묘한 광경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로다.”
불사천교주가 중얼거리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순간 그의 존재감이 확 커졌다.
무심하게 뜬 그의 눈이 아래로 내리깔아지며, 스산한 기세를 흘렸다.
스르륵―
불사천교주의 전신에서 흑색의 강기가 흩어져 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하늘로 이어지는 흑색의 기둥.
압도적인 공력의 발현이었다.
경이로운 공력을 터트리던 불사천교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새까만 동공에 요요한 마성이 흐르며, 시야의 모든 공간을 온전히 담았다.
그가 소매를 흔들었다.
금빛 수실이 요요히 타올랐다.
그는 소매에 그려진 진법, 영생불멸진의 힘을 멸천신마공에 담아냈다.
그만의 사도절학이 드러난 것이다.
“아아, 참으로 슬프도다. 본좌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면 천하를 손에 쥘 자질이거늘.”
그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진심이었다.
눈앞의 상대는 천고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그들이라고 해도 이만한 재능을 지니지는 않았으리라.
“천하?”
천휘가 피식 웃으며, 턱을 들었다.
“그런 건 줘도 안 가져.”
그는 말과 함께 불사천교주를 쳐다보았다.
천하를 손에 쥔다?
웃기는 소리였다.
이미 전생에 언제든 가질 수 있었으나 그 스스로 거부한 것이 바로 천하지 않은가.
천휘가 조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귀찮은 건 질색이거든.”
불사천교주가 미간을 좁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귀찮아서 천하를 쥐고 싶지 않다?
어느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그리고 말은 제대로 해야지.”
천휘가 입을 떼며, 눈을 반개했다.
매화신공의 공력이 실린 눈이 신묘한 영령을 띄우며, 안광을 발했다.
순간 그의 존재감이 커졌다.
전생에 십만 마교도들을 이끌던 절대자의 위용이 절로 나타난 것이다.
“천하를 손에 쥐고 싶다면 네가 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내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네놈이 주제를 모르는구나.”
불사천교주가 드물게 분노했다.
수려한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지며, 강렬한 살기가 몰아쳤다.
후우우우―
그의 전신으로 어둠이 다시 드리워지고, 쌍수에 섬뜩한 강기가 실렸다.
이내 그의 손이 움직이려던 찰나.
파앗!
천휘의 신형이 일그러졌다.
극성의 비천행보가 펼쳐진 것이다.
보신경으로는 마도에서, 아니 천하에서 겨룰 자가 없던 비마의 보법을 펼친 천휘의 몸이 순간 흐릿해졌다.
삽시간에 불사천교주의 면전에 도달한 천휘의 손에서 화월이 무심하게 휘둘러졌다.
쐐애애액!
희미한 적빛의 검강을 실은 화월이 분분히 나뉘며, 그를 사방에서 감쌌다.
풍경이 짓뭉개졌다.
사방에서 덮쳐 오는 검격을 보던 불사천교주의 눈이 시퍼런 암뢰를 떨어트렸다.
상단전이 개방된 것이다.
천지인(天地人)이 하나로 일통됨으로써, 멸천신마기가 크게 요동쳤다.
곧이어 그의 소매가 펄럭였다.
“멸천인(滅天印).”
육합전성과 함께 불사천교주의 장심에서 개새적인 발경이 쏟아졌다.
쩌어어엉!
굉음이 주변을 휩쓸었다.
근방의 바닥이 대번에 갈라지며, 뒤집혔다.
둘의 격돌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말 그대로 천지개벽이었다.
천휘는 멸천인에 막힌 화월을 수습하며, 체공 상태에서 몸을 회전했다.
화월을 휘두르면서였다.
바로 이어지는 연격이었다.
무색의 강기에 휘감아진 화월이 공간을 격하며, 매서운 궤적을 그렸다.
불사천교주의 복부를 향해서였다.
절대의 영역에 들어선 그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쾌검이었다.
스걱!
화월이 불사천교주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핏물이 사방에 터져 나갔다.
불사천교주에게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상처가 깊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화월이 휘둘러지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에 신마벽을 일으킨 덕분이었다.
하지만 절대 고수들 간 생사결에서 이와 같은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쿵!
그러나 불사천교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내비치며, 진각을 밟았다.
디딘 땅이 출렁거렸다.
쩌저저적!
이전에 뒤집혔던 땅이 이번엔 움푹 파이고, 걸친 의복이 하늘을 향해서 위로 솟구쳤다.
천휘의 시야에 들어온 그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커졌다.
이형환위를 펼쳐서, 화월을 휘두르는 천휘의 품 안으로 파고든 것이다.
직후 그의 장심에 파문이 일었다.
멸천신마수였다.
삽시간에 이루어진 반격이었다.
‘노린 건가?’
천휘가 눈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몹시 빠른 반응이었다.
마치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려는 육참골단의 수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천휘가 서둘러 좌수를 뻗었다.
쩌어어엉!
손바닥에 충격이 타고, 흘렀다.
‘응?’
천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강렬한 공력의 여파가 마주한 손바닥을 타고 침투해, 혈맥을 뒤틀었다.
독특한 침투경이었다.
‘혈맥을 파괴하는 수법…… 인가?’
천휘는 혈맥을 파고든 내공 흐름을 읽으며, 곧바로 매화신공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침투한 경력을 한데 모아서는 곧바로 그대로 짓이겨 터트렸다.
퍼엉!
좌수의 소매마저 찢어발겨졌다.
매우 빠르게 공력을 해소했건만, 침투를 허용한 팔뚝이 아릿했다.
교묘하면서도, 음침한 수법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신마벽으로 전신을 감싼 불사천교주가 장심에 멸천신마기의 공력을 나선으로 휘감은 채, 다시 내뻗었다.
‘다 처음 보는 무공이란 말이지.’
일순간 뇌리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동시에 사고가 빛살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범인들은 모르는 절대의 영역에 들어선 그의 시간이 느릿하게 흘렀다.
찰나가 길게 느껴졌다.
천휘는 장을 내지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불사천교주를 응시했다.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그 상태로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삼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세월은 그가 모르는 새로운 무공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것들을 마주하게 해 주었다.
그래, 이걸 원했어.
천휘의 눈이 휘황찬란하게 휘어지더니, 곧바로 발을 들어서 걷어찼다.
퍼억!
북편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불사천교주의 신마벽이 크게 흔들렸다.
잠깐의 흔들림.
하지만 불사천교주는 곧 중심을 잡더니, 다시 크게 진각을 밟았다.
땅이 쩍 갈라지며, 그가 쇄도했다.
그걸 본 천휘도 걷어찼던 발을 내려서는 거칠게 땅을 박찼다.
화살처럼 서로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한 둘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쩌엉! 콰아아앙!
대기가 묵직하게 터져 나갔다.
허공에서 둘은 서로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면서, 공방을 이어 갔다.
한 수, 한 수가 치명적인 절초.
매화가 피고, 암흑이 드리워졌다.
적빛의 궤적과 묵빛의 궤적이 서로 엉키고 뒤섞이며, 충돌을 일으켰다.
둘이 부딪친 경력의 여파가 주변을 휩쓸며, 폭발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경합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수십을 넘어, 수백.
찰나의 순간에 서로를 노리는 절초가 이어지며, 상처가 축적되어 갔다.
스걱! 촤아악!
둘의 의복은 이미 온전치 않았고, 선명한 혈흔을 짙게 흘리고 있었다.
공방이 절정에 이르러 갈 즈음.
“끝을 볼 때도다.”
불사천교주가 둥실 떠올랐다.
이 장가량 높이의 허공에 뜬 그는 아래에 있는 천휘를 내려다보며, 시리도록 새하얀 양손을 활짝 펼쳤다.
화아아악!
그의 등 뒤로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며, 아주 새까만 구를 생성해 냈다.
해가 빛이 아닌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사법으로 완성한 멸천신마공의 영역을 활짝 개방한 불사천교주가 눈을 내리깔며, 천휘를 바라본 순간.
우우우웅!
공기가 일그러지며, 진동이 일었다.
극성의 멸천신마기가 이 공간을 지배하에 두면서 요동친 탓이었다.
“네게 편안한 안식을 주마.”
육합전성이 공명하며 울렸다.
이내 그의 등 뒤에서 생겨난 구체에서 마성의 암뢰가 내리치더니.
콰과과과!
어둠의 구체가 아래로 떨어졌다.
천하를 멸하는 수법.
멸천신마수 마지막 절초.
멸천겁(滅天劫)의 발현이었다.
천휘를 중심으로 땅이 부서지며 흩어져 갔다. 멸천겁의 공력을 버티지 못하고, 아예 분쇄되어 버린 것이다.
“재밌는걸. 절세의 무공이 지고의 경지에 닿으면 마치 술법과도 같아 보인다고는 하는데, 아예 술법과 무공을 하나로 합쳐서 발휘할 줄이야.”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리던 천휘가 화월을 들었다.
불사천교주가 내뱉은 말처럼 이제는 이 싸움의 끝을 봐야 할 때였다.
화아아악!
그의 손에 쥐어진 화월에서 형용할 수 없는 흐름이 생겨나며, 아주 부드럽게 천휘와 주변을 감싸 안았다.
마치 모든 것을 포용하듯이.
이윽고 화월이 짓눌러 오는 멸천겁을 향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칠절매화검 칠초식.
영겁천하만리향(永劫天下萬里香).
콰아아아아앙!
귀가 먹먹한 폭음이 터졌다.
멸천겁을 향해 그어진 검격은 한 줄기의 검흔을 남기며, 사라진 상태였다.
환상과도 같았다.
매혹적인 매화 향이 휘몰아쳤다.
그 사이로 혈향도 묻어났다.
천휘는 핏방울이 멍울져서 떨어지고 있는 가슴팍을 바라봤다.
“이 정도의 상처는 오랜만인걸.”
쩍하고 갈라진 상처에서 선혈이 의복을 적시며,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때였다.
“컥.”
위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 있던 불사천교주의 몸이 크게 들썩거리더니, 점차 무너져 갔다.
신마벽은 산산이 부서지고, 전신을 감싸던 멸천신마기도 흩어졌다.
뒤늦게 허리춤에 혈흔이 새겨졌다.
영겁천하만리향이 그의 허리를 베어 넘긴 것이다.
이윽고 그가 속절없이 추락했다.
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주변에 드리워진 고요함 덕분인지, 그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