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한창 격전이 펼쳐지고 있을 때.
그 소란에 기척을 숨긴 채 불사천교 본단의 동남쪽에서 허공을 유영하듯 움직이는 인영들이 있었다.
천휘와 일행이었다.
“소가 놈과 추가 놈이 최소 십삼 사자 셋은 불렀군.”
고영낙이 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저릿저릿한 기파의 충돌을 보며 속닥였다.
“덕분에 수월해지겠습니다.”
기중학이 눈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내딛는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저 격전에서부터 울린 것이었다.
“모든 준비는 끝마쳤으니, 이제 우리만 할 것을 해내면 되네.”
육원이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파마대주와 협위대주가 해 줄 것은 다 해 준 상황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의 일뿐.
“서두르지.”
이내 그들은 발을 서둘렀다.
날붙이들이 부딪치며 내는 요란한 소리와 투기 속에 은밀히 움직인 그들은 이내 높은 담벼락에 당도했다.
사박.
그들은 그 앞에서 깃털과도 같이 착지했다.
여전히 기척을 죽인 채였다.
육원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이곳을 넘을 거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약 삼 장에 달하는 높이의 담벼락에서는 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끈적하고, 불쾌함이 느껴지는…….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기운이었다.
‘혈기(血氣)처럼 독특한 기운이네.’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매화신공의 내력이 실린 눈은 담벼락, 아니. 이 불사천교 본단 전체에 퍼져진 진법을 꿰뚫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눈엔 혼란스러운 기운이 마치 반구형의 모습으로 본단을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본단을 전반적으로 보호하는 형태였다.
‘흠, 꽤 괜찮은 진법인데.’
진법은 단단하게 짜여 있었다.
그가 아는 많은 진법 중에서도 수위에 속한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뭐, 그래 봤자 결국 그뿐이지만.’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절고의 진법이니, 뭐니 해도 결국에는 진법일 뿐이었다.
생문이 있고, 사문이 있는.
그리고 그 문과 길들은 지금 천휘의 눈에 아주 선명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그럼 날 따라오게.”
육원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로선 최대한 만전의 상태로 불사천교주를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 앞에 존재하는 불멸영생진을 수월하게 지나가야만 했다.
그가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 내력이 흘러나오더니, 바짓단이 세차게 요동쳤다.
“단번에 갈 걸세.”
말을 마친 그가 발을 구르더니.
휙!
질풍과도 같이 위로 솟구쳤다.
곧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랐다.
신속하고,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봉화시가 올라가는 것만 같은 엄청난 속도로 보신경을 펼친 이들은 곧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었다.
* * *
무림맹의 습격에 불사천교의 본단에 있는 이들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불사천교의 교도들은 교를 노리는 적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고, 불사주교들은 그런 그들을 통솔하기 바빴다.
하나 그토록 시끄럽게 움직이는 본단 내에서도 고요한 곳이 있었다.
천통각(天通閣).
드넓은 불사천교의 장원에서도 한눈에 보일 만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전각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천통각의 꼭대기 층에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색의 의복을 입은 수십의 사람들이 마치 길을 만들 듯 약간의 폭을 둔 채 두 줄로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였다.
“…….”
동시에 그곳은 섬뜩할 정도로 고요했다.
뚫린 사방에서 한겨울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약간의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숨소리도 지극히 잔잔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길의 끝에 한 사내가 뒷짐을 지고 있었다.
이제 갓 이립을 넘었을까 싶은 젊은 사내는 또렷한 이목구비와 얇은 턱선을 지닌 절세의 미남이었다.
휘이이―
한겨울의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로 인해서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의 머리카락이 크게 나부꼈는데.
오직 그가 선 곳만은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의복은 물론이고, 머리카락도 차분하게 내려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 때문에 마치 그만이 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선 사내는 흑백이 선명하게 나뉜 눈을 움직여 시선을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저 앞, 전황을 향해서였다.
새까만 동공에 불사천교의 교도들과 무림맹 무인들 사이의 격전을 담던 그가 피처럼 새빨간 입술을 움직였다.
“산 제물이 제 발로 왔구나.”
목소리가 그의 달싹이는 입이 아니라, 온 방위 곳곳에서 들려왔다.
육합전성(六合傳聲)이었다.
뒤이어 목소리에 담긴 반투명한 기파가 물결처럼 온 방위로 퍼져 나갔고, 그로 인해 천통각이 진동했다.
실로 초월적인 광경.
하지만 무릎을 꿇은 이들은 이러한 광경에 놀라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일을 맞이한 듯했다.
아니, 당연했다.
사내가 누구인가.
그들이 모시는 신, 불사천교주였다.
“실로 재미있도다. 그렇지 않으냐.”
다시 또 펼쳐진 고절한 육합전성이 뒤편에 꿇어앉은 불사주교들의 귀가 아닌 뇌리에 직통으로 꽂혔다.
“그렇사옵니다.”
무릎을 꿇은 이들, 불사주교들이 대답과 함께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 모습이 실로 성스러울 정도였다.
하나 불사천교주는 오체투지를 한 그들에게 눈길도 두지 않았다.
그저 전황을 바라보며, 흥얼거릴 뿐이었다.
“아름다운 감정의 폭발이도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황의 뜨거운 분위기가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투기와 열정, 혈향과 사기.
그리고 죽음을 직면한 자들의 슬픔과 공포심까지.
온갖 기운과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혼돈(混沌)이었다.
불사천교주는 여러 갈래로 뒤엉켜 흩날리는 감정선의 실타래들을 보면서, 새하얀 이를 천천히 드러냈다.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미소였다.
하지만 절세의 미남인 그의 입가에 지어지니,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그때.
“교주님.”
흥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서 그의 옆쪽으로 순백의 의복을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사천교의 이사자(二死者).
망혼사자(亡魂死者)였다.
불사천교주는 불현듯 나타난 망혼사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뗐다.
“무슨 일이더냐?”
“영생불멸진이 뚫렸습니다.”
불사천교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곧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새까만 동공에 형용할 수 없는 서늘한 살기가 차올랐다.
“누가 한 짓이냐?”
“아직 제대로 파악이…… 컥!”
망혼사자가 신음을 흘렸다.
투명한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움켜쥔 채로 들어 올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를 바라보던 불사천교주의 눈동자가 아래에서 위로 들리고.
둥실―
망혼사자의 몸이 한 치가량 떠올랐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누군가 손을 댄 것도, 그가 공력을 일으켜서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내공 운용을 극한까지 단련한 자만이 다룰 수 있는 초능의 경지였으니, 실로 인간을 넘어선 능력이었다.
“모른다는 것이로구나.”
불사천교주가 나지막이 속닥였다.
망혼사자와 눈을 마주치면서였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 떠 있던 망혼사자의 몸이 불사천교주의 앞으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거의 코앞까지 도착했을 때.
흑백이 선명한 불사천교주의 마성이 깃든 두 눈동자를 마주한 망혼사자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숨이 막힌 탓이다.
한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망혼사자의 눈에는 오히려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아아, 교주님께서 벽을 뚫고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셨도다.’
그는 지금 교주가 경지에 오름을 기뻐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알아내겠습니다.”
“좋다. 일각을 주마. 그 안에 어떤 놈들인지, 그리고 어떻게 영생불멸진을 통과한 것인지 알아내라.”
불사천교주가 나직이 명령했다.
은은한 목소리.
그것을 들은 망혼사자는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다는 듯 경외의 표정으로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살기가 짙게 어린 미소였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불사천교주가 힘을 풀었다.
턱.
이내 망혼사자의 발이 땅에 닿았고, 그 즉시 그가 섬전처럼 검을 뽑았다.
찰나지간이었다.
흐릿한 경력이 실린 검은 그가 서 있는 바로 아래의 바닥에 꽂혔다.
콰아아아앙!
바닥이 부서지며 무너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휙!
네 인영이 밑에서 위로 솟구쳤다.
그 와중에 줄기줄기 뻗어진 경력을 피하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망혼사자는 자신의 검을 피한 이들이 공중에 뜬 것을 보며, 아래에 꽂았던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어디서나 볼 법한 중단세의 자세.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경력의 공명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우우웅―
공기가 울기 시작했다.
망혼사자가 쥔 검에서 나온 기파에 주변 대기가 겁에 질린 것만 같았다.
“이런!”
“피해야 합니다!”
“서둘러!”
“위험해요!”
아직 공중에 떠 있던 네 명.
육원과 일행이 서둘러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그보다 먼저.
후웅!
망혼사자의 검이 그어졌다.
좌에서 우로 그어지는 검격에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기세도,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허리춤으로부터 시작된 움직임에 사방이 아주 단순하게 잘려 버렸다.
그 범위가 상당했다.
기둥은 물론이고 심지어 꼭대기 층에 있던 전각의 구조물조차 그 검격을 피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정도였다.
그그극―
결국 통천각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한 상황에 불사천교 본단에 있던 이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서 싸우던 이들이 놀라며 순간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그러길 잠시.
후우웅!
돌연 위에서 바람이 몰아쳤다.
척사귀검 고영낙이었다.
무너지는 전각의 구조물을 밟으며 달린 그는 불사천교주에게 붙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검을 뽑아서,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선 그의 정수리를 노렸다.
척첩일검(陟疊一劍).
매서운 경력을 흩뿌리는 검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아래로 그어졌다.
허를 노린 매서운 일격이었다.
‘방심했군!’
고영낙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할 무렵.
스윽―
불사천교주가 턱을 치켜들어서, 머리를 향해 내리쳐지는 검신을 봤다.
아주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쩌어어엉!
둘 사이의 공간이 크게 울렸다.
“무슨!”
고영낙이 당황했다.
그의 주변에 생겨난 불투명한 기운에 막히며, 검이 틀어박히지 않았다.
‘호신강기?!’
그가 놀라며 흠칫할 때.
“그것이 네 전부인 것이냐.”
불사천교주가 뒷짐을 풀었다.
그리고 고영낙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
고영낙은 의식이 멀어져 감을 느꼈다.
새까만 동공, 그 안에 피어난 암전이 그의 의식을 집어삼킨 것이다.
“참으로 시시하도다.”
신령스러운 육합전성을 펼친 불사천교주가 오른손을 천천히 뻗었다.
느릿느릿한 손짓.
하지만 고영낙은 피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의식이 불사천교주의 눈동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턱.
이내 불사천교주는 고영낙의 머리를 잡더니, 천천히 공력을 일으켰다.
은은한 자줏빛의 기운이었다.
그 직후.
화아아악!
고영낙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곧 떨림이 잦아들더니 그가 칠공에서 거무죽죽한 피를 한 사발 쏟아 냈다.
즉사였다.
“재미없구나.”
불사천교주는 즉사한 고영낙을 슬쩍 보더니, 뒤로 휙 내던졌다.
고영낙의 시체가 아래로 추락했다.
잠시 뒤, 밑에서 짓이겨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
침묵이 드리워졌다.
육원과 남은 일행은 불사천교주의 압도적인 신위에 순간 말을 잃었다.
굳어 있는 이들을 보던 불사천교주가 다시 뒷짐을 지며, 입을 열었다.
“이사자를 돕도록 해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러한 상황에서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불사주교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일어났다.
광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하면서였다.
“신의 뜻을 따르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