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날이 밝았다.
천하에 짙게 드리워졌던 어둠이 층층이 겹쳐서 번지는 고아한 햇빛에 물러나며 세상이 점차 밝게 물들어 갔다.
신명(晨明)이었다.
신명의 아롱거리는 햇빛이 서천(曙天)에 드리워지고, 기나긴 잠에 빠져 있던 세상이 점차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귀주의 성도, 귀양도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려 준비 중이었다.
그리고 춘풍객잔의 이 층에 있는 방 안은 진작 하루를 연 상태였다.
“현 불사천교의 총단에는 십삼 사자 중 다섯이 존재하네.”
천력신도 육원이 말했다.
원형의 탁자 주변에 두루 앉은 네 명을 한 명씩 바라보면서였다.
“음? 의외로 적네요.”
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불사천교주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측근이라고 들었다.
한데 겨우 다섯 명만 있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의아해하는 천휘를 보던 육원이 군사가 전달해 준 정보를 입에 담았다.
“십삼 사자의 다섯은 지부에 있고, 한 명은 임무에 나선 상태라네. 그리고 두 명의 사자는 불사천교주를 대신해서 사흑련에 머물고 있다더군.”
아, 그런 거였나.
천휘는 바로 납득했다.
알려진 바로 천하에 있는 불사천교의 교도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림잡아 최소한으로 가정해 십 수만 명.
그만큼 천하에 지부가 많이 있었고 그들을 다스릴 인물들도 필요했다.
그리고 불사천교주는 지부를 다스릴 자들로 측근이며 가장 믿을 만한 고수인 십삼 사자를 보냈을 터였다.
‘거기다 자신이 교주라면 사흑련에 직접 가기보다는 수하를 보낼 테고.’
천휘는 교의 교주였던 자로서 불사천교주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이번 임무를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군요.”
관천일창 기중학이 손에 들고 있는 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래도 쉽지는 않겠지.”
고영낙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맞네.”
육원이 진지한 태도로 그 말에 동의했다.
아무리 십삼 사자 중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지만, 그들은 고수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고수인가.
몇 명은 대방파의 수장이라고 해도 충분한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남은 십삼 사자가 다섯 명뿐이라지만 불사주교의 수는 그대로네. 아마 적게 잡아도 이백은 헤아릴걸세. 거기다 불사천교의 본단에 머무는 교도들의 수가 압도적이니…….”
육원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 수부터 압도적이긴 했으나, 불사천교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익힌 사공도, 그들의 숫자도 아니었다.
바로 맹목적인 믿음.
그들은 불사천교의 교리라면 어떠한 짓을 행하든 주저함이 없었다.
그것이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목숨을 바칠 자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그것은 상당히 무서운 일이었다.
일단 그에 대한 생각을 미뤄 둔 육원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본대에서 시간을 끌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을 거네. 길어야 한 시진, 그 정도가 한계일 터.”
육원이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 싸움으로 가는 건 그들에게 불리한 일이었다.
이곳은 사파의 영역인 강남.
그리고 불사천교가 터를 잡은 귀주의 한복판에서 벌어질 전쟁이었으니까.
최대한 짧은 시일에 끝마쳐야 했다.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겠군.”
“쉽지 않겠습니다.”
“너무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불사천교주의 목숨을 거둬야 하겠군요.”
셋이 침음성을 흘릴 무렵.
“잠시 이걸 보게.”
걱정을 끊어 내듯 육원이 말하며,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는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곧바로 탁자 위에 휙 하고 굴렸다.
단번에 펼쳐진 종이.
그 안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설마 불사천교의……?”
“언제 이런 것을…….”
“이렇게나 세세하다니.”
셋이 눈을 빛냈다.
천휘 또한 지도를 지그시 봤다.
‘꽤 세세한데?’
몇 개의 전각이 있는지, 각각의 방에는 누가 있는지 상당히 자세한 정보가 표시된 지도였다.
단번에 위치를 파악하기 쉬울 정도였다.
‘예전부터 파악해 뒀나?’
하루아침에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최소 몇 년은 공을 들여서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 그렇지. 평화는 무슨.’
천휘가 피식 웃었다.
겉으론 구주삼패세의 시대가 평화를 이끌었다지만, 역시나 수면 아래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흑련과 무림맹의 전쟁은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터질 화약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으로 갈 걸세.”
말과 함께 육원이 검지를 뻗었다.
불사천교의 본단에서도 가장 개방되어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대협. 그곳으로 갔다가는 불사천교에 무조건 들키지 않겠습니까?”
기중학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구석진 다른 곳도 많았다.
그런데 굳이 개방된 곳이라니.
육원이 그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곳밖에 없네.”
“그게 무슨 말씀…….”
“이곳이 불사천교의 본단 주변에 펼쳐진 불멸영생진(不滅永生陣) 중 가장 취약한 곳이네.”
순간 반박하려던 기중학이 눈을 부릅뜨며, 경악을 드러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휘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취약한 곳이라고?”
“그걸 어떻게 알아내셨습니까?”
불멸영생진은 불사천교 본단을 백 년 동안 지켜 온 천고의 절진으로 사법과 진법의 총집약체라 불리었다.
몇몇은 불사천교가 귀주에 뿌리를 내린 것은 불멸영생진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불멸영생진의 취약점이라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그래서 양동작전이라 한 거네요.”
천휘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불멸영생진이니, 뭐니. 그딴 것은 잘 모르지만, 의도는 확실히 알았다.
“이렇게 드러난 곳으로 가야 하니까요. 불사천교의 이목을 모두 쏠리게 해야 잠입할 수 있는 거였어요.”
육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통로야말로 핵심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불사천교주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었으니까.
“뒤가 없군.”
“결국 불사천교주를 시간 안에 죽이냐, 아니면 죽느냐의 싸움이군요.”
“그냥 양동작전이 아니었네요.”
셋의 표정이 굳어졌다.
불사천교주의 뒤를 쳐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위험한 임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더했다.
단 한 번의 기회였다.
그 한 시진의 시간 내에 불사천교주의 명줄을 끊어 내야만 했다.
“만약 정보가 잘못되어 십삼 사자의 수가 다섯보다 많거나 하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기중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악의 가정이었다.
육원은 그 말에 쓰게 웃었다.
“뭐, 어쩌겠나. 운이 없는 거지.”
“…….”
“파마대주와 협위대주가 그들을 최대한 불러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말대로 방법은 더 없었다.
뒤가 없는 작전에 셋이 미간을 좁히면서, 복잡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간단하니, 마음에 드네요.”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휘의 입에서였다.
심드렁한 표정은 지운 채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그가 이어서 입을 달싹였다.
“즉 불사천교주만 죽이면 되는 거니.”
자신만만한 말에 넷은 넋을 놓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소협 말이 맞네.”
“그래, 그놈만 죽이면 되지.”
“그만 죽이면 끝날 일입니다.”
“맞네요.”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들이 침투할 곳은 불사천교의 본단이었으며, 죽여야 할 상대는 천하에서도 이름이 드높은 절대고수.
불사천교주였다.
하지만 계속 고민하고 머리를 싸매 봐야 무엇 하겠는가.
이미 임무를 받아들인 상황이었고, 작전은 시행되는 중이었다.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천휘처럼 간단히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그때였다.
“왔네요.”
천휘가 창밖을 바라봤다.
활짝 개방된 창문 밖으로 일천이 넘는 기척이 가까워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격랑과도 같은 거친 군세.
천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 군세를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의 병기를 들고서.
육원은 손에 든 도집을 허리춤 뒤에 단단히 묶으며, 눈을 번뜩였다.
“가세.”
* * *
드넓은 장원이 있는 불사천교.
귀주 전체를 장악한 사교 본단의 앞, 전신에서 정갈한 기운을 흩뿌리는 무인들이 정렬하며 섰다.
파마대와 협위대, 멸절대였다.
그 수가 천을 넘는 무인들의 기도는 강렬한 기세를 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끼익―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며 새하얀 의복을 걸친 이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중년인에게선 특별한 기세가 안 느껴졌다.
마치 어디서나 볼 법한 문사 같았다.
하지만 그를 보는 무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채, 도통 펴지지를 못했다.
중년인은 이만한 군세에도 태연하게 웃었다.
그뿐이랴.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가오더니, 이내 뒷짐을 지며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
“무림맹의 무인들께서 본 교에는 무슨 일인가?”
그는 시종 담담한 태도였다.
눈앞의 군세가 두렵지 않은 듯이.
“본 교에 입교를 하고 싶은 겐가?”
그가 말과 함께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앞에 늘어선 무림맹의 무인들을 아래로 보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오랜만이군.”
나직한 말이 울리며, 아무도 없었던 중년인의 앞에 파마대주가 돌연 나타났다.
신묘한 보법이었다.
중년인은 파마대주가 불쑥 나타났음에도 태연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파마대주.”
그가 유들거리며, 말했다.
“본 교에 입교하려고 온 건가?”
“이 내가 그런 사교에 들어갈 것 같나?”
“허허,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지.”
중년인이 눈꼬리가 크게 휘어졌다.
그리고 묘한 일이 벌어졌다.
그를 보던 자들은 순간 이 세상이 정지한 것만 같은 환각을 경험한 것이다.
요요한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새까만 동공 속 희미한 암뢰(暗雷)가 번쩍이더니, 곧 세상에 그 힘을 떨쳤다.
“흡!”
“헉!”
파마대주 뒤에 있던 몇몇 무인들은 순간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움켜쥐려고 했다.
그러던 그때.
화아아악!
파마대주의 전신에서 가공할 공력이 솟구치며, 그의 장포가 펄럭였다.
“어디서 사술을 펼치려고 하나.”
파마대주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은은한 공력이 실린 채였다.
“……휘천패력기(輝天覇力氣).”
그의 전신에서부터 퍼진 기파에 미간을 찌푸린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휘천패력공(輝天覇力功).
척마척사(斥魔斥邪)의 힘으로는 소림의 무공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는 정순한 심공의 공력이 사방에 퍼졌다.
“광명사자(光明死者).”
휘천패력기를 전신에 휘감은 파마대주가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었다.
중년인의 직책을 부르면서였다.
“말이 짧군.”
불사천교의 사사자(四死者), 광명사자가 그 부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본 파마대주가 검을 뽑았다.
검이 은은하게 내리쬐는 신명을 반사하며 아름다운 광채를 발했다.
“오늘 불사천교란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말과 함께 그가 공력을 폭사했다.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나뉜 공력의 파동이 광명사자를 덮쳤다.
씨익―
광명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뒷짐을 풀며 팔을 벌렸다.
환희에 가득 젖은 광소와 함께.
“하하하!”
웃던 그가 눈을 천천히 반개했다.
반들거리는 눈 속에 비친 암전이 내리친다 싶더니, 기세가 급격히 퍼지며 근방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찰나였다.
우우웅―
그의 전신에서 울림이 퍼져 나왔다.
저릿저릿한 기파와 함께였다.
콰지직!
동시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파마대주가 펼친 공력의 파동이 그의 기세를 갈기갈기 찢은 것이다.
암뢰천굉공(暗雷天轟功).
불사천교의 사이한 사공을 끌어올린 광명사자는 그 상황에도 입술을 비틀었다.
입가에 지어진 새하얀 미소에서 흐르는 마력이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몇몇은 아연실색할 정도였다.
사람의 혼을 움켜쥐고 마음을 멸하는 사법(邪法), 섭혼멸심소(攝魂滅心笑)를 머금은 그가 나직이 말했다.
“헛된 희망을 품는구나.”
공력의 울림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파마대주 뒤에 있던 몇몇 파마대원들이 주춤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무슨……!”
“저런 기세를 숨겼던 건가?”
방금 전까지 아무런 기세도 없던 이와 동일 인물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고, 웅혼한 공력이었다.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지.”
파마대주는 광명사자가 했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며, 검을 높게 들었다.
광명사자가 웃음을 뚝 그쳤다.
대신 싸늘한 표정이 얼굴을 차지했다.
파마대주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곧 붉게 물든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은은한 공력을 실으면서.
“교도들이여, 본 교를 무시하는 저 잡것들을 징벌하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바밧!
본단에서 온통 새하얀 의복을 입은 광기의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이었다.
파마대주는 쏟아져 나오는 불사천교의 교도들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계획대로 되는 중이었다.
곧 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가슴이 한껏 부푼 순간, 그는 힘껏 참았던 숨을 토하며 버럭 소리쳤다.
“천하에 혼란을 야기하는 사교도들을 모두 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