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추계광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여러 척의 선박이 정박한 강가였다.
‘벌써 이렇게나 선박을 구했나?’
짧은 시간에 준비된 선박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중.
“음?”
천휘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불어오는 바람에 선박마다 꽂아 둔 깃발이 힘껏 나부끼고 있었는데, 거기에 적혀진 글자가 너무 익숙한 탓이다.
[천하상단(天下商團)]
무림맹이랑 손을 잡았다더니, 이러한 지원도 한 건가?
어쩐지 이렇게나 많은 인원을 급하게 소집하고도, 준비가 철저해 보여 의아한 마음이 들었는데, 깃발을 보니 단번에 이해가 갔다.
전쟁에 동원하는 인원이 많을수록 다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돈이었다.
물자와 식량은 필수이지 않은가.
거기에 강남과 강북으로 나뉘어 치러지는 이번 전쟁에서는 장강을 건너기 위한 선박이 특히나 많이 필요했다.
평소라면 결코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천하상단이 돕는다면 무엇보다 쉬워졌다.
돈이라면 넘쳐났고, 평소 장강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자들이다 보니 선박을 여러 척 소유하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갈았나 보네.’
선박마다 당당하게 상단의 이름을 달고 꽂혀 있는 깃발을 보던 천휘가 전에 보았던 천하상단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드러운 인상의 백발노인.
하지만 그 안에는 능구렁이와도 같은 냉철함과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를 가만히 놔둘 정도로 인자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저것이었다.
원래라면 ‘천하상단’이라 적힌 깃발을 달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었다.
무림맹의 무인들이 타고 움직일 선박이니.
하지만 천하상단은 숨기지 않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자신들이 무림맹을 지원한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이번 전쟁 결과에 따라 천하 상권의 판도도 많이 바뀌겠어.’
무림맹과 사흑련 간의 전쟁.
그 뒤편에서는 천하제일상단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천하상단과 대은상단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승리하면 취할 게 많겠어.’
천휘의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이번 전쟁의 결과에 따라 두 상단 중 하나는 몰락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천휘는 당연하게도 무림맹이 승리할 것이라 확신했다.
‘내가 있는 한 당연한 일이지.’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던 천휘의 입매가 더욱더 비틀어져 갈 무렵.
“도착했네.”
추계광이 멈춰 서며 말했다.
여러 척의 선박 중 유난히 큰 선박의 앞에서였다.
천휘는 하던 생각을 지우고 추계광이 바라보는 선박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게.”
말과 함께 추계광이 발을 굴렀다.
탓.
내디딘 발끝에서 퍼진 기파가 먼지를 일으키며, 그가 공중을 갈랐다.
단숨에 뱃머리로 훌쩍 올라선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순간 흠칫했다.
밑에 있어야 할 천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로 사라진…….’
놀란 그가 고개를 움직이려던 찰나.
“이제 저기로 가면 되죠?”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추계광이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바로 옆에 천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등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숨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건만,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움직인 것도, 옆에 있다는 기척마저도.
만약 천휘가 적이었다면 지금 그의 목은 이미 달아나고 없을 일이었다.
‘허어. 이런 무위를 지녔다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매화신협이 뛰어나다는 얘기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지만, 직접 무위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단번에 납득했다.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격이 다르군.’
그 순간 천휘가 발걸음을 뗐다.
추계광이 어디라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내디디는 걸음이 거침없었다.
‘여기 있다고 말하는 거 같네.’
천휘의 시선은 묘한 기세가 느껴지는 선박의 후미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럿의 기세가 경쟁하듯 요동치는 중이었다.
‘기 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천휘는 기세의 흐름을 부드럽게 흘려 내면서, 발걸음을 계속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곧 열 걸음을 내디뎠을 때.
우뚝.
천휘는 그가 목적한 후미에 도착했다.
장강의 물결에 흔들거리는 배의 후미에는 급조한 듯한 원형의 탁자와 일곱 개의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총 네 개의 의자에 남녀가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 존재감을 드러내던 이들은 천휘의 등장에 안광을 번뜩였다.
“음? 화산파……?”
“그렇다면 저 어린 아해가 매화신협인가?”
“아미파에서 바로 올 것이라 듣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왔군.”
“언젠가 한 번 보려고 했었는데 마침 잘됐구먼.”
그들이 천휘를 보며 한 마디씩 던지는 말이 끝나 갈 무렵.
화아악!
왼쪽에 있는 두 남자의 전신에서부터 불투명한 공력이 넘실거리며, 곧 장강의 물결과도 같이 천휘를 덮쳐 왔다.
어쭈, 이것 봐라?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세를 퍼트린 둘은 흥미로 반들거리는 눈을 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압박하려는 듯이, 아니. 시험하려는 태도와도 같았다.
“흠,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네요.”
피식 웃은 천휘가 우수를 들더니.
휙―
가볍게 휙 무언가를 털어 내는 듯 움직였다.
마치 나비를 쫓듯 유려한 손짓.
하나 그 손짓 한 번의 결과는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유려한 손짓에서 시작된 부드러운 공력이 단숨에 수백 가닥의 강기로 현현하며, 기파를 옥죄이더니.
스걱!
그들의 기파를 단숨에 끊어 버린 것이다.
단번에 흐름을 단절해 버리는 일수(一手).
경지에 이른 수법의 발현이었다.
“……!”
“흡!”
놀란 둘이 숨을 삼켰다.
경악한 건 그 둘만이 아니었다.
딱히 기세를 풍기지 않았던 반대편의 남녀도 지금의 상황에 눈이 흔들렸다.
단 일수 만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실로 경이롭기까지 한 압도적인 광경에 네 남녀의 여유가 무너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기세를 뿜은 두 인물이 누구인가.
파마대의 대주 단혼일기사(斷魂一技士) 소성적(蘇聲績)과 무림맹에서도 검수로는 손에 꼽히는 척사귀검(斥邪鬼劍) 고영낙(高潁濼)이었다.
각각 구파일방 장로급의 무위를 가진 이들로, 그 무위는 무극지경에서도 천무지경을 엿본 이들이었다.
한데 그런 둘의 기세가 단 일수에 무너졌으니, 그들이 혼란에 빠진 건 당연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는 넷을 보던 천휘가 씩 웃었다.
조소였다.
“어디 그쪽도 받아 보죠?”
말과 함께 천휘가 매화신공의 공력을 끌어올리며 한 발자국 내디뎠다.
저벅.
소리는 미약했다.
하나 그 순간 천휘의 존재감이 거인처럼 커지며, 엄청난 기세가 번져 갔다.
그의 등 뒤에서부터였다.
일순간 퍼진 형용할 수 없는 기세는 마치 꽃봉오리가 개화하는 것처럼 은은한 광채를 사방에 흩뿌렸다.
쿵!
그러며 그들을, 아니. 정확히는 소성적과 고영낙, 단둘만을 짓눌렀다.
“이런……!”
“……!”
짓누르는 기세의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둘의 안색이 파리해진 순간.
탁.
위에서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짙푸른 청염(靑炎)을 전신에 갑옷처럼 휘감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천휘의 기세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세를 거둬 줄 수 있겠는가?”
천휘가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시작한 건 저쪽인데요.”
“…….”
중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이어서 그는 뒤를 돌아본 뒤 모여 있던 이들을 향해서 물었다.
“소협의 말이 사실인가?”
“흠.”
“크흠.”
천휘에게 공력을 내뿜었던 둘이 헛기침하며, 그의 시선을 급히 피했다.
“……또 자네 둘인가.”
이러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중년인이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 뒤 천휘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군. 이 둘이 예전부터 강호에 명성이 드높은 자네를 계속 궁금해하더니, 흥미로움을 참지 못한 듯하네. 안 그런가?”
중년인이 마지막 즈음엔 둘을 노려보며, 말했다.
힘이 실린 어조와 치켜뜬 눈썹에 둘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구먼.”
“강호의 신성이라기에 무위가 어떤지 보고 싶어서 그랬네.”
고개까지 숙여 사과하는 그들의 모습에 천휘는 차올랐던 흥이 깨지는 걸 느꼈다.
“흠, 아쉽네요.”
말과 함께 천휘가 공력을 거두었다.
하던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에 지켜보던 이들이 식겁했다.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빠르더라도, 화하는 것은 빠르게 해내기 어려운 법이었다.
특히 끌어올린 공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천휘는 어떠했는가.
찰나였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즉 천휘의 기준에서 이 정도의 공력은 많이 끌어낸 것이 아니라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괴물이군.’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군. 이런 놈을 시험하려고 했다니.’
‘천하제일의 기재라더니…….’
‘정파의 큰 홍복이야.’
천휘를 시험하려던 둘은 혀를 내둘렀고, 남은 둘은 감탄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육 대협도 오셨군요.”
마침 협위대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중년인을 보더니 환한 표정으로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중년인은 현 강호에서도 그 이름이 드높은 자였다.
천력신도(天力新刀) 육원(朒源).
구파일방의 장문인들도 인정하는 고수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일세. 추 대협.”
육원은 협위대주의 등장에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돌려 입을 달싹였다.
“그럼 이제 다들 모인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해 봄세.”
잠시 뒤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천력신도 육원.
협위대주, 소요검 추계광.
파마대주, 단혼일기사 소성적.
척사귀검 고영낙.
산수무영(散手無影) 은설설.
관천일창(貫穿一槍) 기중학.
그리고 매화신협 천휘까지.
한 명, 한 명이 무림맹에서 큰 축과 명성을 차지하는 자들이었다.
육원은 의자에 앉은 여섯 명을 훑더니,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모두가 알다시피 이 인원으로 불사천교의 교도들을 전부 쓰러트리기는 무리일세.”
처음부터 부정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말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무림맹에서 인원을 모았고, 그 수가 천을 헤아린다지만 불사천교의 교도 수는 십수 만이었다.
전부 쓰러트리려면 긴 세월이 걸리는 일이었다.
“해서, 양동작전을 벌일 생각이라네.”
“양동작전이라면?”
“소수의 인원으로 뒤를 쳐서 불사천교의 교주를 처리하는 걸세. 교도들을 이끄는 교주가 죽게 된다면 제아무리 불사천교라도 혼란에 빠지게 되지 않겠나.”
모두가 숨을 죽였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방법인 게 사실이었다.
아무리 기습해 뒤를 친다고 해도 불사천교주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이 험난할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불사천교의 교주가 어디 보통 고수인가.
수십 년 전부터 이미 강호에 그 이름을 떨치는 천무지경의 고수였다.
“그것이 가능하겠소?”
관천일창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도 모르네. 하나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에 육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방법밖에 없으니 말일세.”
“…….”
관천일창이 침묵할 무렵.
“어느 정도의 인원이 가는 거지?”
콧잔등을 찌푸리고 있었던 척사귀검이 물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열 명 이하로 꾸릴 생각이네.”
“열 명 이하라고?”
“……위험하군.”
“가능하겠습니까?”
“너무 적은 거 아닌가?”
“…….”
심드렁하게 있는 천휘를 제외한 다섯 명의 미간이 점차 좁혀졌다.
너무 소수의 인원이었다.
불안감을 드러내는 다섯의 표정을 보던 육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불사천교를 정면에서 공격하는데, 고수들이 적다면 이상함을 눈치채지 않겠는가? 그리고 인원이 많으면 움직이는 데 제약이 있네. 차라리 적은 수의 고수로 가는 것이 더욱 위협적이지.”
“…….”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육원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파마대와 협위대 소속의 무인들은 이 임무에서 빠질 걸세.”
말하던 육원이 약간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 협위대주와 파마대주를 보며,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대신 두 사람은 앞장서서 대원들을 움직여 정면에 맞서 불사천교를 흔들어 주게. 양동작전이 벌어지는 것을 모르게 말일세. 그리고 이왕이면 불사천교의 고수들, 십삼사자(十三死者)와 불사주교(不死主敎)들의 이목을 끌어 주게나. 불사천교주가 혼자 남아야 이 작전의 성공 확률이 높아질 테니.”
이어지는 육원의 설명에 둘은 긴장감이 감도는 눈빛을 한 채 고개를 위아래로 천천히 주억였다.
불사천교주를 죽이는 것만큼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납득한 듯한 둘을 보던 육원은 이내 남은 넷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남은 넷은 나와 같이 움직여 주면 되네.”
그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천휘를 제외한 셋의 표정 역시 진중하게 가라앉을 무렵, 육원이 숨을 크게 들이켠 뒤 말을 내뱉었다.
“불사천교주, 그를 죽이기 위해서 말일세.”
* * *
회의가 끝나고, 무림맹의 무인들은 선박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총 천 명을 넘는 인원을 태운 열 척의 선박이 장강을 가로질러 갔다.
저 끝에 보이는 장강의 맞은편.
불사천교가 있는 귀주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