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복호사의 산문.
아직 제대로 복구되지 않아 엉망진창인 그곳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조심히 가십시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무를 위해 왔던 멸절대가 떠난다고 하자, 배웅하며 인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리고 단리관천은 그 한쪽에 청성파의 제자들과 있는 남천에게 갔다.
“사숙님께서는 아미파에 계속 머무르실 생각이십니까?”
“도우러 왔으면 끝까지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남천은 하얀 피풍의를 걸친 단리관천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사흑련이 도망쳤다고 한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놈들이다. 그러니 아미파가 안정을 취할 때까지 머물 생각이다.”
“그렇습니까?”
단리관천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미파를 돕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청성파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턱.
그러한 생각을 읽었는지 남천이 단리관천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그의 양어깨에 두 손을 살포시 올렸다.
“잡다한 걱정은 하지 말고, 너에게 주어진 일을 먼저 생각하거라.”
“하지만 본 파 또한 위험…….”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단리관천을 보던 남천이 곧바로 입을 달싹였다.
“예부터 장문 사형께서 무어라 했었느냐. 지닌바 정도(正道)를 지키고, 민초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청성의 도(道)이다.”
단리관천은 수백, 수천 번 들어 온 그 말을 자연스럽게 중얼거렸다.
남천이 그 말에 싱긋 웃었다.
“네가 해야 할 것은 본 파를 지키기 위해 마음 쓰는 것이 아니라, 정도를 위해서, 민초들을 위해서 사이한 이들을 몰아내는 것이니라.”
단리관천은 미소를 지은 남천의 자애로운 말에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불안함을 지운 채, 쾌청해진 눈빛을 띤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갔다 오거라.”
답을 들은 단리관천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다시 돌아보지 않는 것이 단단하게 결심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정도를 위해, 민초들을 위해.’
사부의 말을 다시 속으로 되새기면서 걸어가던 단리관천이 인사를 끝마친 멸절대가 모인 곳에 도착했다.
“이제 왔어? 늦었네.”
호광개가 그런 그를 보더니 음흉하게 웃으며, 단리관천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참으로 친밀해 보이는 태도.
아미파에 도착하기 전 단리관천이었다면 어깨에 팔이 올려지자마자 바로 쳐 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저 미간을 약간만 좁힐 뿐이었다.
아미성전에서 서로 목숨을 맡긴 채로 싸운 덕분에 믿음이 쌓이고, 친밀감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쩔 거야? 멸절대와 같이할 거야, 아니면 청성파로 갈 거야?”
호광개가 능글맞게 물었다.
거의 놀리는 듯한 어투였다.
“대주의 허락 없이 내 마음대로 청성파에 갈 수나 있겠소?”
“에이, 재미없게 말하기는.”
담담한 대답에 호광개는 어깨에 올렸던 팔을 거두었다.
그리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새하얀 비듬이 사방에 나부꼈다.
그에 단리관천이 조용히 물러나며 불쾌하다는 듯한 시선을 주었지만, 호광개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긁으며, 말했다.
“그런데 참 바쁘단 말이지. 나흘밖에 못 쉬고, 바로 다시 임무라니.”
한탄과 함께 호광개가 툴툴댔다.
오랜만에 쉬고 맹에 복귀하나 했더니, 또 다른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보통 임무가 아니었다.
불사천교를 쓰러트리기 위한 소집.
목숨이 오갔었던 아미성전보다도 위험할 수 있었다.
아미성전 때 있었던 혈투를 떠올리던 그는 절로 몸이 부르르 떨림을 느꼈다.
하지만 곧 피식 웃었다.
‘대주가 있다면야 안전하겠지만.’
그에게 지금 천휘는 남다른 존재였다.
일반적인 믿음을 넘어선 신뢰.
그는 천휘가 대주로 있는 한 멸절대가 임무에 실패할 일은 없다고 확신했다.
“일단 준비나 하자고. 저 협위대에서 말을 준비했다고 하더라고.”
호광개가 멸절대원들을 보며, 말했다.
“자자, 서둘러! 늦으면 대주가 어떻게 할지 눈에 보이잖아?”
호광개가 멸절대원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갈 무렵.
“아미타불.”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조심히 가길 빌겠소이다.”
천휘는 곱게 합장하며 인사하는 장문인과 장로들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다음에 필요하면 연락하죠.”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많은 이들이 천휘를 보고 있었다.
멸절대는 물론이고 소집령을 건네주러 온 동소강과 그의 휘하 협위대의 이대대가 정갈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들을 훑어보던 천휘는 문득 의아해졌다.
동소강과 같이 왔던 성예빈이라는 여인은 휘하 대원들과 이곳이 아닌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있는 산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응? 저 사람은 안 오나?”
“아미파를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지 않겠나? 성 소저와 파마대는 아미파에서 며칠간 머무르며 수습을 도울 거네.”
혼잣말에 대답이 앞에서 들려왔다.
동소강이었다.
“그쪽은 안 남아요?”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네만, 지금 사안이 사안이지 않은가. 한쪽만 남고 다른 한쪽은 자네와 같이 떠나기로 했네.”
말을 마친 동소강이 힐끗 성예빈을 바라봤다.
그녀는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동행하면서 그 표정 속에 불만이 있는 것을 눈치챈 그는 멋쩍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라면 같이 남는 것이 그들의 공통 임무였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떨어진 소집령에 의해 둘 중 하나는 멸절대와 같이 이번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여승들만 있는 아미파다 보니 이왕이면 여자인 성예빈이 이끄는 파마대를 남긴 것이다.
천휘는 멋쩍어하는 동소강을 보다가, 바로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관심이 가는 일은 아니었다.
“가죠.”
천휘가 간단하게 말을 끝내며, 하산했다.
지체 없는 발걸음에 멸절대는 재빠르게 달라붙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동소강과 협위대도 천휘와 멸절대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 * *
사천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관도.
평소에는 고요하기 짝이 없는 길을 수십 필의 말이 거칠게 달렸다.
그리고 그 말들의 행렬 정중앙.
마차 한 대가 말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내부.
그 안에는 네 명이 앉아 있었다.
천휘와 동소강 그리고 호광개와 단리관천이었다.
동소강은 맞은편에 앉은 천휘에게 고정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매화신협 천휘.
작금의 천하를 뒤흔들고 있는 인물은 상당히 앳된 모습의 청년이었다.
‘저렇게나 어린 나이에 그토록 경악스러운 일들을 모두 해낸 건가?’
헛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그에 대한 소문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것들뿐이었다.
녹림대제를 패퇴시킨 자.
그리고 농질의 목숨을 끊은 자.
천하에 그 명성과 무위를 크게 떨친 이들을 누른 자라기엔 너무나도 어려 보여서,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모두 현실인 게 사실이니.’
속으로 한숨을 내뱉은 동소강은 혀를 차며, 고개를 옅게 흔들었다.
소운사태가 직접 말해 주지 않았나.
농질은 저 어린 청년 도사, 매화신협의 검에 목숨을 달리했다고.
‘이런 어린 고수가 무림맹 소속이란 건 기뻐할 일이기는 한데…….’
그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무림맹에 천휘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은 홍복이나 다름없었고, 기뻐 마지않을 일이었지만…….
그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도 처음 강호 출도를 했었을 때에는 강호를 호령하고 천하제일인이 되리라고 꿈을 꾸던 무인이었다.
하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호가 어떠한 곳인가.
세상에는 고수들이 모래알처럼 많았고, 그보다 뛰어난 기재도 그만큼이나 많았기에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자부심은 있었다.
삼십오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지금의 경지와 직책에 올랐으니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만했다.
그런데 그 자부심마저 무너졌다.
눈앞의 청년 도사를 보면서였다.
자신이 포기해야만 했던 천하제일인이라는 꿈을 이룰 재능을 가진 이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마냥 기뻐할 수만 있겠는가.
질투가 났다.
속이 쓰리고, 입안이 텁텁했다.
‘부럽군. 내게도 저런 재능이 있었다면…….’
씁쓸하기 짝이 없는 고소를 삼키던 그의 눈빛이 가라앉으려는 찰나.
“불사천교에 대해 알고 싶은데.”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휘의 입에서였다.
그러자 호광개는 마치 그 말을 기다린 것처럼 바로 반응하며, 답했다.
“오황문 중 한 곳으로 백삼십 년전부터 두각을 드러낸 사교지.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귀주에 있는 대부분의 문파가 불사천교의 교리를 따른다는 말도 있을 정도야.”
호광개가 바로 대답했다.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꽤 세력이 강한가 보네요?”
“오황문 중에서도 세력은 홀로 월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지.”
대꾸하는 호광개의 이맛살이 접혔다.
“중원 곳곳에 있는 지부만 이십여 개에다 그 교도들의 수만 해도 십 수만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하니.”
호광개의 말에 천휘가 순간 입꼬리를 비틀었다.
‘교도 수가 십 수만을 넘는다고?’
천마신교가 가장 왕성할 당시에도 교도들의 수는 십만이 최대였다.
한데 그보다 많다고 하는 것이니.
“불사천교는 불사를 추앙하며, 그들의 교주는…….”
그 와중에도 호광개는 침을 튀겨 가며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마치 물 만난 고기와도 같았다.
호광개는 마차가 멈출 때까지 아는 정보를 침이 마르도록 뱉어 냈다.
* * *
닷새의 시간이 흘렀다.
끊임없이 내달린 덕분일까.
멸절대와 협위대는 소집 기한보다 하루 더 일찍 장소에 도착했다.
소집령을 통해 모이기로 한 곳은 사천성 의빈이었다.
멸절대와 협위대는 관도를 빠져나와서, 곧 하나의 길로 들어섰다.
관도는 아니지만, 넓은 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그들은 광활한 장강의 출렁임이 한눈에 보이는 나루터에 도착했다.
그 순간.
“멸절대……?”
“이번에 아미성전을 도왔다는 별동대인가 보구먼. 허, 근데 저렇게 어린 후기지수들로 구성됐을 줄이야.”
“그것보다 저 마차 안에 그 매화신협이 있는 건가?”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휘는 창문으로 밖을 바라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끓었다.
하나같이 무복을 입은 자들로 그들은 마차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이번 불사천교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모인 무림맹의 무인들이리라.
그때 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석에 있던 협위대원 중 한 명이 도착을 알리자, 동소강이 먼저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 보겠네.”
말과 함께 그가 곧장 마차에서 내렸다.
“대주께서 먼저 내리겠소?”
단리관천의 물음에 먼저 나가려고 하던 호광개가 어정쩡하게 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천휘를 봤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였다.
먼저 내리려 한 것에 뭐라고 할까 봐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천휘는 그런 건 전혀 신경도 안 썼다.
“아니, 먼저 내리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말과 함께 천휘는 자연스럽게 옆에 놔두었던 검 두 자루를 챙겼다.
그러고는 그의 말에 먼저 내린 단리관천과 호광개를 따라서 마차에서 내렸다.
“……흠.”
“저 소도장이…….”
주변에서 여러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사방에서 시선들이 마치 바늘처럼 그를 찔러 왔다.
나루터에 모인 수백의 인원.
그들의 이목이 집중된 탓이었다.
하나 천휘는 심드렁했다.
이미 전생에 십만 교도들을 이끌었던 그에게 이 정도 시선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드럽게 많이 모아 놨네.
천휘가 무표정하게 장강을 가리는 수많은 인파를 보던 중.
“대주님?!”
“길을 터라.”
정면에서 소란이 일었다.
멀리서 들리던 소란은 점점 가까워지면서, 인파가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인영이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내디딘 발에서부터 퍼진 원형의 기파가 단숨에 공간을 사로잡았다.
경지에 오른 자가 풍기는 기세.
주변의 무인들은 그가 풍기는 기도에 압도되어서, 뒤로 물러났다.
일순간에 천휘와 그를 중심으로 반경 오 장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천휘의 바로 앞에 멈춘 그가 시선을 맞추더니, 밝게 웃었다.
반가움의 미소였다.
천휘도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가온 이는 낯익은 자였다.
소요검 추계광.
이전에 화산파에 찾아와 무림맹까지 안내해 줬었던 자기 때문이다.
협위대주인 그가 웃음을 만면에 머금은 채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오랜만이군. 천휘 소도장.”
“오랜만에 보네요.”
“하하, 농질을 쓰러트렸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네.”
웃던 협위대주가 웃음을 멈췄다.
“사실인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요.”
“하하하, 참 믿음직스럽군.”
협위대주가 만족스러워했다.
위아래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천휘를 지그시 보며, 입을 뗐다.
“한데 때마침 잘 왔군. 안 그래도 불사천교의 습격에 대해 수뇌부끼리 회의를 진행하려고 했는데…….”
“회의요?”
“상대는 불사천교. 그냥 무작정 돌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음, 그런가?
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냥 적이라 판명되면 돌진한 게 자신이었다.
그때 협위대주가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나를 따라오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