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산문에 선 천휘가 주변을 살폈다.
아미파는 단 하루도 안 돼서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거의 반파된 복호사 내부. 그리고 주변에 쌓인 주검들.
그로 인한 피비린내가 아미산 전역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참혹한 전쟁의 결말.
그 참상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어.”
주위를 둘러보던 천휘가 중얼거렸다.
아미성전으로 인한 아미파의 손해가 극심했다. 아니, 극심하다는 표현조차 아득히 넘어선 수준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보던 중 천휘는 복호사의 중앙에 홀로 서서 뒷수습을 지휘하는 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치료를 우선으로 하거라! 아직 멀쩡한 이들은 사체들을 수습하고, 주변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라. 혹시 모른다. 사파 놈들이 음흉하게 숨어서 기회를 노릴지도 모르니.”
깔끔하게 베어진 부위를 붕대로 감은 소혜사태는 좌수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방에 명령을 내렸다.
그에 가장 바쁜 건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의약당(醫藥堂) 소속의 아미파 제자들이었다.
“부상자는 이쪽으로 데려오도록!”
“큭!”
“조금만 참으세요.”
“여기 금창약을 발라…….”
그들은 한시바삐 서둘러 움직이는 중이었다.
사방이 환자들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꾸물거릴 수 없었다.
“그나저나 그보다 더 심한 건…….”
그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천휘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아미파 장로들이 둘러싼 곳이었다.
사흑련의 군세가 물러난 당시에 기뻐하던 그녀들의 얼굴에는 심각함과 걱정이 짙게 얼룩져 있었다.
“장문인…….”
그들 가운데에 고이 누운 소운사태의 용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리해진 안색과 불안정한 기파.
소운사태의 맥을 유심히 짚던 의약당주가 깊은숨과 함께 손을 뗐다.
“자, 장문인은 괜찮은 건가?”
소정사태가 황급하게 묻자, 의약당주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제 안정되었습니다.”
“후우, 다행이구먼.”
“다행일세.”
소정사태를 비롯해 모여 있는 장로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할 때.
“하지만 내상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최소 삼사 년은 요양해야 합니다.”
의약당주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삼사 년이나 말인가?”
“……그 정도로 심각했던가.”
“내상을 입은 상태에 억지로 내공과 선천지기를 끌어올린 것 같습니다. 그 반동에 의해서…….”
의약당주가 뒷말을 흐렸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경지에 오른 자들. 의약당주가 차마 하지 못한 뒷말을 대략적이나마 알았다.
“……본 파의 정명단(正命丹)을 섭취한다면 나아질 것 같은가?”
소정사태가 아미파의 영약을 말했지만, 의약당주는 고개를 저었다.
“내상이 깊다 보니, 영약을 섭취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겁니다. 이대로 운기조식을 하고, 정양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모두가 침음성을 흘렸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사흑련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때, 소운사태의 힘은 그 무엇보다도 절실한 상황이었다.
한데 최소 삼사 년을 요양해야만 한다니.
그때 굳게 감겨 있던 소운사태의 눈꺼풀이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눈을 뜬 소운사태는 시야를 가득 채운 낯익은 이들에 입매를 올렸다.
흐릿한 미소였다.
이어서 그녀가 고이 눕혀졌던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큭.”
천천히 몸을 움직이던 그녀가 중간에 신음을 흘리며, 움찔했다.
지독한 내상에 의한 격통이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우,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그에 화들짝 놀란 주변 이들이 소운사태의 상반신을 받치려고 할 때.
스윽―
소운사태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괜찮다는 의미의 손짓이었다.
그에 모두가 뻗던 손을 멈추고 어정쩡하게 있을 때, 그녀는 숨을 고르더니 다시 상반신을 일으켰다.
짧은 움직임.
하나 내상이 깊은 상태로 움직여서인지, 그녀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의약당주가 황급히 말했다.
“섣불리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내상이 깊으니 안정을 취하셔야…….”
“……어찌 장문인이라고 하는 자가 이러한 상황에서 계속 누워 있을 수 있겠느냐.”
소운사태가 단호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싹둑 자르며, 숨을 크게 골랐다.
그러고는.
스윽.
옆에 놓인 윤회육환장을 집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자, 움직였다.
그 모습에 의약당주를 비롯한 장로들이 불안하게 그녀를 살폈다.
탁.
끝내 소운사태가 똑바로 일어섰다.
뒤이어서 허리를 꼿꼿이 편 그녀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복호사를 살펴보면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산 아래 수많은 주검들이 보였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안이 썼다.
“많은 이들이 명을 달리했구나.”
물기가 어린 슬픈 어조로 중얼거린 그녀는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착잡했던 감정을 털어 냈다.
“뒷수습은 어찌 되어 가고 있느냐. 피해가 어느 정도인 거지?”
그녀의 물음에 소정사태가 나섰다.
부상자 치료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외부 의방의 의원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발에 불나도록 달리고 있다는 것 등…….
소정사태는 소운사태가 기절하고 나서의 상황을 빠르게 설명했다. 그러다 마침내 차마 입으로 꺼내기 힘든 말을 조심스럽게 뱉었다.
“……명을 달리 한 자는 백을 헤아리고, 중경상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백 명…….”
소운사태의 눈 밑에 그늘이 졌다.
이미 예상하던 바였다.
상대는 사흑련, 그중에서도 귀영대와 혈영대로 이루어진 전력이지 않은가.
당연히 죽는 이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들이닥치니 마음이 요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운사태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사체들의 수습과 건물 복구는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 일단 부상자들의 치료를 최우선으로 하고, 휴식하게 돕는 데에 최선을 다하거라.”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소운사태가 복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다가, 발을 뗐다.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소정사태의 물음에 소운사태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달싹였다.
“감사를 표해야 하지 않겠느냐.”
말과 함께 그녀는 둘러싼 장로들을 지나쳐서, 거침없이 걸어갔다.
바로 산문 쪽이었다.
곧 산문에 도달한 그녀는 무료한 표정으로 서 있는 천휘 앞에 섰다.
“이제 조금은 괜찮아졌나 보네요?”
“소협 덕분에 편히 쉬었네.”
소운사태가 미소를 머금었다.
부드럽고도, 따스한 미소였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더니…….’
앳된 외형, 하지만 지니고 있는 무위는 천하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것이었다.
천하에 드문 천고의 기재였으니.
어쩌면 천하가 아니라 고금을 통틀어도 손에 꼽힐 만한 존재일지 몰랐다.
자신조차 가늠하기 힘드니.
‘이 혼란한 정세에 이런 인재가 나타나다니, 큰 홍복이로다.’
그녀는 천휘의 존재가 너무도 감사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자신은 농질의 손에 명을 달리했을 것이고, 아미파는 유린당했을 것이다.
생각하던 그녀가 고이 합장했다.
“아미타불.”
은은하게 불호를 읊은 그녀는 천휘를 바라보던 시선을 유지한 채, 말했다.
“고맙소이다. 소협.”
천휘는 합장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소운사태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입으로만 그러는 건 아니죠?”
“그럴 리 있겠는가. 이 은혜는 명을 다하는 날까지 잊지 않을 걸세.”
“그러면 됐어요.”
천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에게 말하는 것치고는 예의가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나 소운사태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다.
‘과한 예를 부끄러워하는구나.’
호감이 가득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천휘의 행동 하나하나에 호의를 느끼며, 좋을 대로 해석했다.
소운사태가 웃으며, 합장을 풀었다.
“언제든지 본 파의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주게나. 버선발로라도 곧바로 달려가겠네. 그럼 쉬다 가게나.”
그 말을 끝으로 소운사태는 발길을 돌려, 치료를 받는 제자들과 정파 무인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갔다.
“몸은 괜찮으냐. 다친 데는 더 없고?”
제자들을 향해 걱정하는 말을 내뱉던 소운사태는 상처 입은 정파 무인들에게는 합장과 함께 감사를 표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이 은혜는 내 절대 잊지 않겠소.”
일일이 한 명씩 찾아가 인사를 하는 소운사태를 보던 천휘는 이내 고개를 돌리면서, 한쪽을 바라봤다.
멸절대가 모인 곳이었다.
하나같이 성치 않은 모습이었다.
새하얀 피풍의는 넝마가 되었고 찢어진 무복 사이로 혈흔이 비쳤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멸절대에 사망자는 없어 보였다.
천휘가 바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대주님!”
“대주! 큭!”
상처를 치료하던 이들이 천휘의 등장에 반가워하다가, 신음을 흘렸다.
천휘가 그런 그들을 보며, 입을 뗐다.
“그래도 다들 괜찮게 버텼네요.”
호광개가 피와 땀으로 기름진 머리카락을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대주가 명령했던 대로 위험할 것 같으면 도망치면서 견뎠지.”
그 말에 다른 멸절대원들의 얼굴에도 멋쩍은 웃음이 하나둘 감돌았다.
천휘가 그런 대원들을 빠르게 훑었다.
매화신공의 내력이 실리며, 천휘의 눈동자가 은은한 무채색의 빛을 발했다.
“…….”
그 시선을 마주한 멸절대원들은 순간적으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희미한 적빛이 감도는 안광을 마주한 순간 발가벗겨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쉬는 게 낫겠어.’
그들을 샅샅이 훑어본 천휘는 멸절대원들의 상세를 빠르게 파악했다.
겉으로 볼 때 심각해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리 문제가 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글피 정도 운기조식을 취하고, 휴식하면 충분히 나을 정도였다.
“당분간은 요양해야겠네요.”
그 말에 시선을 마주한 멸절대원들 모두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파에서 나흘 정도만 쉬죠.”
* * *
쪼르르―
찻잔에 차가 따라졌다.
그윽한 다향이 협소한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따스한 온기를 뿜어냈다.
스윽―
용주개는 눈앞에 내밀어진 찻잔을 힐끗 바라본 뒤, 받자마자 단번에 들이켰다.
막 우려낸 뜨거운 차임에도 거침이 없었다.
“윽, 쓰구만, 써.”
용주개는 못 먹을 것을 먹은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구시렁대더니 앞의 상대에게 말했다.
“왜 불렀냐?”
일견 귀찮다는 듯 내뱉은 질문에 맞은편에 앉은 제갈공이 손에 든 찻잔을 입가에 대고 한 번 홀짝인 뒤, 입을 열었다.
“파악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파악?”
용주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그러냐?”
“이것입니다.”
제갈공이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금빛이 감도는 끈으로 감싼 두루마리는 얼핏 봐도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지체 없이 용주개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읽어 내린 순간.
“……!”
두 눈을 부릅떴다.
두루마리에는 무림맹 내부에 꽤 알려진 자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명망이 드높은 자들이었다. 구파일방의 장로는 물론이고, 무림맹의 고위직을 차지한 자들까지.
그중에는 개방도도 존재했다.
“……의심되는 자들이냐?”
용주개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렇습니다.”
제갈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알아본 것이냐?”
“전쟁이 선포된 이후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자들을 추린 겁니다.”
용주개는 바로 의도를 파악했다.
“……즉 나보고 이놈들의 최근 행적을 파악하란 거군.”
“그렇습니다.”
“쯧, 오래 걸리겠어.”
용주개는 수십 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두루마리를 품에 넣으며 투덜거렸다.
“그럼 이제 용무는 끝난 것이냐?”
툴툴거리는 용주개의 물음에 제갈공이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쿵! 쿵!
갑자기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뭐냐?”
용주개가 미간을 좁힐 무렵.
“구, 군사님!”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그, 급보가 왔습니다.”
제갈공은 용주개를 힐끗 보다가 닫힌 문을 향해서, 입을 달싹였다.
“들어오게.”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문 너머에는 혼란에 빠진 얼굴의 청년이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는 용주개를 보았음에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바로 제갈공에게 달려왔다.
그러고는 품 안에 있던 여러 개의 연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처, 철혈단과 신룡대 그리고 사신대에서 보낸 급보입니다!”
“뭐? 철혈단이?”
용주개가 놀란 눈으로 봤다.
철혈단이 급보를 보낸 경우는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급보를 보낼 정도라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임이 분명했다.
용주개가 놀란 눈으로 바라볼 때, 군사는 무심히 연통을 집었다.
그리고 연통을 꺼내서 그 내용을 확인했다.
“…….”
일순간 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안에 적힌 내용은 그조차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철혈단 패퇴.]
[신룡대 일개 대대 몰살.]
[임무 실패. 천검장(千劍莊) 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