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흥미로운 무공이었어.”
천휘는 발아래 놓인 농질의 바짝 메마른 사체를 응시하며, 속닥였다.
상당히 이질적인 무공이었다.
그녀가 죽자마자, 땅 아래로 귀천한 기운은 사기(死氣)였다.
‘사기는 천마신교에서도 꺼렸던 기운인데, 그걸 담으려고 하다니.’
사자(死者)의 기운을 생자(生者)가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죽어 버린 그녀는 그 일을 해냈다.
물론 반 광인이 되었다지만, 그녀는 분명 사기를 다루었고 사용해 냈다.
아마 그녀가 익힌 무공, 사천절예가 사기의 광기를 억누른 것이리라.
“흠, 사황전의 무공이라…….”
중얼거리던 천휘가 화월을 뽑았다
농질의 심장에 정확히 박혀 있던 검신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푸석한 목내이 꼴이 된 농질의 가슴팍에서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화월이 꽂혔던 자국만이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사기를 담은 대가겠지.’
이내 천휘가 그 메마른 시체에서 시선을 거두는 찰나.
“고맙…… 네.”
당장에 숨이 끊어질 것 같은 희미한 음성이 귀를 두드렸다.
천휘는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봤다.
반쯤 무너진 암자의 벽에 등을 기댄 소운사태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새하얀 승복은 흙먼지와 피가 뭉쳐져 더러워져 있었고, 곳곳에 상처가 가득해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산 것이 용해 보일 정도의 치명상이 사방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거의 산송장인 상태였다.
소운사태를 보던 천휘는 화월을 납검하며, 입을 달싹였다.
“정신 차리셨네요.”
“덕분에…… 목숨은 부지했……네.”
내상이 깊은 탓일까.
불규칙적으로 내뱉는 호흡과 더불어서 나오는 말은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
“말하지 마시죠. 지금 내상이 심각한 것 같은데.”
“아직…… 중, 요한 것이 남았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운사태는 고개를 흔들며, 연이어 입술을 달싹였다.
“불고…… 염치하네만…… 쿨럭!”
말을 하던 그녀가 내상 때문인지, 기침과 함께 피를 울컥 뱉었다.
승복에 점점이 번지는 핏물과 더불어 그녀의 안색이 파리해져 갔다.
아무리 봐도 심각한 상태.
하지만 그녀는 하던 말을 잇기 위해서 피로 물든 입술을 다시 뗐다.
“소승을 도와…… 줄 수 있겠나?”
그녀의 반쯤 감긴 눈꺼풀이 들썩거리며, 두 눈동자가 천휘를 담았다.
피를 잔뜩 토하며 흐릿해진 동공.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천휘에게 선명하게 전해질 정도였다.
천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인지, 일단 들어 보고 정하죠.”
* * *
아미산 곳곳에서 싸우던 이들이 순간 손속을 멈추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기감이 발달한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싸움을 멈추고, 산문을 바라봤다.
그들의 안색은 살짝 굳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경천동지할 경파를 흩뿌리던 산문이 고요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아미산을 아예 뒤덮듯 잠식해 가던 기운이 어느새인가, 씻은 듯 잠잠해져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조용해졌어.”
“결판이 난 건가?”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들어찼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기서 승리한 자가 누구냐에 따라 현재 벌어지는 전쟁의 향방이 바뀔 수도 있었다.
“누가 이긴 거지?”
“모르겠군.”
“아무런 기운도 안 느껴져.”
산문을 조용히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에 기대와 불안감이 깃들 무렵.
짤랑―
불현듯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탁.
소운사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그녀는 성치 않은 모습이었다. 승복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녀의 몸 곳곳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금 그녀가 등장했다는 것이 중했다.
“장문인……!”
“아미타불!”
“소운사태께서 승리하셨구나.”
“말도 안 되는!”
“이럴 수가!”
삽시간에 아미파 쪽 무인들과 사흑련 군세의 분위기가 상반되게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미파의 비구니들은 환해진 얼굴로 합장을 하고, 정파의 무인들은 속으로 환호했다.
그 반면.
“설마 농질께서…….”
“당했다고?”
사흑련의 군세는 숨을 삼켰다.
전쟁의 판도가 완전히 기울었다.
스윽―
소운사태의 반쯤 감겨 있던 눈꺼풀이 위로 들리며 그 아래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 나타났다.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사흑련의 군세가 굳었다.
신묘한 법력이 담긴 금안(金眼)이 모습을 드러내자, 압도당한 것이다.
그때 산신(山神)과도 같이 사흑련의 군세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윤회육환장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쿵!
힘차게 내려찍었다.
화아아악!
윤회육환장에서부터 시작된 강렬한 원형의 경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흡!”
사흑련의 군세가 주춤거렸다.
무위가 약한 몇몇은 몰아치는 경파에 휩쓸려서 뒤로 나뒹굴 정도였다.
대정신공을 담은 법력의 현신.
강렬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소운사태의 입술이 열렸다.
“농질은 쓰러졌느니라!”
항마후가 곳곳에 퍼졌다.
“…….”
확정되어 버린 사실에 사흑련의 군세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와아아!”
“역시……!”
정파 무인들은 그제야 마음껏 환호를 내질렀다.
한편 소운사태는 순간 속에서 올라오려는 토혈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조금만 더 버티면…….’
내상을 입은 채 펼친 항마후로 인해 크나큰 격통과 함께 단전이 흔들렸다.
이대로는 큰 내상이 되리라.
하지만 그녀는 선천지기를 끌어올리면서까지, 격통을 참아 냈다.
그리고 다시 항마후를 터트렸다.
“매화신협의 손에 말일세!”
“……!”
“매화신협?!”
“누, 누구라고?”
여기저기서 술렁거렸다.
사흑련의 군세는 물론이고, 아미파의 비구니들과 정파 무인들조차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때.
저벅. 저벅.
불현듯 허공에서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삽시간에 모두의 시선이 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올라갔다.
저 멀리 검은 점이 떠 있었다.
모두가 의아해하며 검은 점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순식간에 점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늘 아래 한 인영이 허공을 밟으면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저건 무슨…….”
“허공답보(虛空踏步)…….”
도저히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던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릴 때.
저벅.
다시 그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딱 한 걸음.
하지만 그는 그 한 걸음으로 단숨에 십여 장이나 되는 거리를 격하며, 나아갔다.
마치 공간을 합친 것 같은 걸음.
그 신묘하고도 영험한 광경을 목도한 모두는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걷고 있었다.
아니, 저것이 사람이기나 한 걸까.
몇몇이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하지만.
“…….”
보이는 광경은 그대로였다.
적막이 내리깔렸다.
숨을 강제로 막은 것만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허공에 뜬 인영은 마치 천신(天神)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심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저벅.
한 걸음, 한 걸음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그들을 압박해 왔다.
침묵을 강제하는 존재감의 현현.
누구도 더는 입을 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지금의 광경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를 따라 하늘이 점차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윽고 점만큼 작았던 그의 신형이 소운사태 옆에 내려섰고, 그제야 사람들의 눈에 그의 인상착의가 보였다.
흑적색의 도복을 입은 청년 도사.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 있는 흑색과 고동색의 검 두 자루가 유난히 그들의 눈에 밟힌다 싶은 순간.
모두의 뇌리에 하나의 별호가 떠올랐다.
‘매화신협!’
파격적인 등장을 마친 천휘는 무심한 표정으로 두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그리고 천천히 닫힌 입술을 뗐다.
“잡것들만 남았어.”
오연한 목소리가 전장을 휩쓸었다.
음성에서 묻어난 공력이 그들에게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적막만이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그 사이로 오직 천휘의 눈동자만이 선명한 안광을 발휘했다.
사흑련의 군세는 물론, 정파의 무인들조차 그 안광에 삼켜졌다.
개세적인 패기가 실린 안광.
스르릉―
곧 천휘가 화월을 뽑았다.
은은한 적빛이 감도는 검신이 내리쬐는 햇빛을 반사하는 순간.
흠칫!
사흑련의 군세가 재빨리 눈을 굴리더니, 서로가 눈짓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아미파 비구니들과 정파 무인들의 수를 빠르게 줄였으나, 그만큼 귀영대와 혈영대의 대원들 수도 많이 준 상태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농질이 죽고, 소운사태는 살아 있다는 것은 꽤 치명적이었다.
거기에 이토록 강한 기세를 풍기고 있는 천휘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이대로 가다 가는 필패(必敗)다.’
머리에 똑같은 결론이 떠올랐다.
곧 그들이 서로 눈짓하기를 잠시.
파바밧!
일대에 있던 그들이 동시에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수는 자신들이 많았으니, 이대로 투항하기보단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슨?!”
“어딜 도망가려고!”
근처에 있던 아미파 비구니들과 정파 무인들이 다급히 잡으려 할 때.
“놔두거라.”
소운사태가 나직이 말했다.
움직이려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소운 사태의 말에 흠칫했다.
그리고 그 작은 빈틈을 타서 사흑련의 군세는 서둘러서 도망쳤다.
“장문인……! 그들을 도망치게 놔두면 안 되는…… 자, 장문인!”
근처에서 이 놀라운 상황을 지켜보던 소정사태가 장문인에게 명을 번복해 달라 요청하려다, 식겁했다.
똑바로 서 있는 소운사태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입뿐이랴.
눈과 귀에서도 검은 피가 흘러나와서는 그녀의 승복에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보법을 펼치며, 소운사태에게 다가갔다.
“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물음에 나직이 대답한 소운사태는 고개를 꺾어, 천휘를 바라봤다.
“모두…… 도망을 갔는가?”
아주 희미한 목소리에 소정사태가 당황할 무렵, 천휘가 입을 달싹였다.
“지금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고 있네요. 보아하니 여기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어 보여요.”
“……다행이군.”
안도한 듯한 표정과 함께 힘껏 뜨고 있던 소운사태의 두 눈에 힘이 풀렸다.
스르륵 감기기 시작하는 눈꺼풀.
곧 그녀가 힘겹게 입을 달싹였다.
“이제…… 좀 쉴 수 있겠…….”
소운사태가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그대로 무너졌다.
“장문인!”
화들짝 놀란 소정사태가 무너지는 그녀를 한 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그녀는 기겁했다.
소운사태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있었으며, 숨도 약했다.
놀란 소정사태가 천휘를 바라봤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어찌 된 거긴요.”
천휘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아직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소정사태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다 끝난 거죠.”
천휘가 납검하며, 전장을 주시했다.
주변에 있던 놈들을 시작으로 사흑련의 군세는 씻은 듯 사라졌고, 놀란 아미파 제자들과 정파의 무인들만이 남아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놀람과 걱정, 그리고 당혹감.
그들은 지금의 전쟁에 이겼다는 것을 아직 실감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쩝, 아쉽긴 하네. 이왕이면 다 죽이는 것이 속 시원한데.’
천휘가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서는 사흑련의 무인들을 전부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려면 희생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사흑련의 군세는 많았기에.
그리고 소운사태는 더 이상의 희생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때마침 멍하니 있던 그들이 뒤늦게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사, 사흑련을 쫓아냈다!”
“이, 이겼다!”
“아미파를 습격한 악독한 무리를 쫓아냈도다!”
여기저기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오며, 아미성전이 종결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