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290화 (290/391)

290화

벼락같이 이루어진 찰나의 출수.

화월이 세상을 반으로 나눌 것처럼 강렬한 기세를 담고, 하늘에서부터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화월 특유의 적광이 명멸했다.

중간 과정이 끊긴 것만 같은 쾌속.

그 안에 조용하게 움튼 내력의 검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올곧게 내리그어진 화월이 농질의 정수리, 백회혈에 맞닿는 순간.

휙!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움직였다.

곰방대였다.

농질이 바로 등 뒤에서 예기를 느끼자마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행동.

곰방대를 잡은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움직이며, 곡선을 그렸다.

비단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은 유려하고,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마치 무희(舞姬)의 춤사위 같았다.

사천절예 파천유혼(派天幽昏).

급작스럽게 이뤄진 출수였다.

일개 무인이라면 제대로 내력도 싣지 못한 채 무너져 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농질은, 강호에 널린 일반적인 무인들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천무지경이라고 하는 지고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자연스럽게 움직임에 경력을 실으며 그 기세를 발휘했다.

생각이 곧 무공으로 화한 것이다.

허공을 유영하던 곰방대에 거무튀튀한 기운이 스며들며, 견고해졌다.

사(邪)이자, 사(死).

오직 사천절예만이 담아낼 수 있는 기운의 경파가 공기 중에 휘날렸다.

곧이어서 사기를 단단하게 감싼 곰방대가 화월과 맞닿았고.

쩌어어엉!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농질이 신음을 흘렸다.

곰방대를 쥔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대의 지닌바 내력이 그만큼 뛰어나단 뜻이었다.

대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녀의 발바닥이 점점 땅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그극!

결국 두 공력의 충돌에 의해 그녀가 서 있는 주변 삼 장가량의 흙바닥이 움푹 내려앉았다.

‘……공력 싸움은 애매해.’

그녀의 동공이 길게 찢어졌다.

순간 사이한 뱀과 같은 동공을 드러낸 그녀는 화월과 맞서던 곰방대에 힘을 뺀 뒤 상체를 크게 뒤로 젖혔다.

그대로 뒤로 눕는 듯한 형상이었다.

뒤이어서 농질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어 땅을 짚은 뒤 몸을 한 바퀴 회전했다.

유연하고,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영역에서 벗어났고, 그 때문에 대상을 잃은 화월은 그대로 땅에 꽂혔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먼지가 일었다.

‘어쭈, 이것 봐라?’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월이 움푹 파인 땅에 박혔다.

검흔을 깊숙이 남긴 채였다.

그때였다.

“내가 알던 것과는 달라.”

먼지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란스러움과 살기, 광기, 경계심.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온갖 감정들이 뒤엉켜 섞인 목소리였다.

“화산에 이토록 강렬한 패검(覇劍)이 있었나? 예전부터 화산의 검법은 환검(幻劍)과 변검(變劍) 위주라 들었는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람이 휘몰아치며, 먼지를 모조리 걷어 냈다.

농질이 십 장 너머에서 서 있었다.

곰방대를 들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 있던 여유가 사라진 상태였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 있을 뿐이었다.

휘이이―

그녀의 전신에서 기파가 몰아쳤다.

아무래도 지금 먼지를 몰아낸 것은 그녀의 기운인 듯했다.

반투명한 검은 기운이 격랑이 몰아치듯 격렬하게 일렁거렸고, 그 주변에 매서운 바람을 일으켰다.

다 타 버린 듯한 잿빛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고, 이제는 제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진 궁장이 몰아친 기파에 하늘거렸다.

그 속에서 그녀는 눈을 반개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화월을 들어 올리는 천휘를 담고 있었다.

경계하고, 반격을 준비하는 태도였다.

언제, 어떤 때든 전심전력으로 출수할 수 있도록.

“흠, 그런 식으로 펼치는 무공이란 말이지?”

그때 천휘가 발을 내디뎠다.

거침없는 걸음이었다.

농질이 십 장이란 거리를 벌리며 펼쳐 놓은 권역이었다.

그런데 그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이걸 그냥 들어온다고?’

농질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지금 당장에 자신이 출수를 뻗는다면 그대로 닿을 수 있는 권역 내부였다.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무방비하게 걸어오는 듯한 천휘의 존재감이, 기세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전신에서 무형의 기운이 이글거리며 아지랑이처럼 일어나 공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탁.

불현듯 천휘가 걸음을 멈췄다.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삼 장.

하나 그 거리는 무용했다.

절세의 경지에 오른 둘에게 삼 장이라는 거리는 언제든지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지근거리나 다름이 없기에.

그 상태로 서로를 본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둘의 시선이 꽈리를 틀 듯 엮였다.

천휘는 길게 찢어진 뱀과 같은 농질의 동공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쐐애애액!

대뜸 화월을 휘둘렀다.

기수식도 없이 펼쳐진 검격은 단숨에 농질의 가슴팍까지 쏘아졌다.

하나 이미 온 신경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대비하고 있던 농질은 검이 휘둘러지자마자 곧장 왼발을 뗐다.

동시에 오른발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그와 더불어 사천절예의 기운을 품은 곰방대를 쾌속하게 휘둘렀다.

회전력을 가미한 반격이었다.

카앙!

옆면을 강타당한 검격이 옆으로 튕겨 날아가더니, 위태롭게 있던 복호사의 산문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천휘는 검격이 튕겨져 나갔지만 놀란다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여전히 태연하게 농질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천휘의 눈에서 광망이 터졌다.

이쯤 했으니, 그녀도 깨달았을 터였다.

지금 자신의 무공을 극한으로 펼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천휘의 생각을 방증하듯 그녀는 회전하던 그대로, 내공을 실어서 진각을 밟았다.

쿠웅!

처음으로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녀의 발밑 아래 공력이 폭발하며, 거센 강풍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그리고.

훅!

그녀의 상반신이 한순간에 커졌다.

농질이 거리를 좁혀 가까이 붙은 것이다.

천휘의 시야에 그녀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요사하게 번뜩이는 동공 아래 입가에 촘촘한 면사가 흔들렸다.

우우우웅―

그리고 그 밑에서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주먹을 쥔 그녀의 우수에는 강렬한 사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 주먹이 주변 대기를 짓뭉개면서 쏘아졌다.

맹렬하게 휘둘러지는 권이었다.

무시무시한 흡입력을 담아낸 일권이 단번에 천휘의 지근거리까지 도달했다.

그 순간.

스윽―

천휘가 좌수를 번쩍 들었다.

장심(掌心)에서 공력이 몰아쳤다.

묵직한 무형의 기운이 천휘의 장심에 머물며, 파문(波紋)을 일으켰다.

잔잔하면서도, 거센 파동이었다.

곧 파문을 일으키던 무형의 기운이 다섯 손가락에 하나씩 뭉쳐져 갔다.

그리고 그 직후.

화아악!

손이 다섯의 꽃잎을 펼쳐 냈다.

매화청심장(梅花淸心掌).

매화장법 이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쩌어어엉!

묵직한 충격파가 몰아쳤다.

매화청심장을 펼친 손바닥에서 충격파가 일어나면서 소맷자락이 순간적으로 크게 부풀었다.

그 여파로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천휘는 잿빛의 머리카락 사이로 사이한 안광을 터트리는 농질을 봤다.

‘재밌는 반응인걸?’

일순간 천휘의 입매가 비틀렸다.

맞부딪친 충격에 그녀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지만, 눈매는 크게 휘어져 있었다.

환희에 가득 찬 눈웃음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흐릿하게 일그러지며, 천휘의 측면에 나타났다.

사환보(邪幻步).

사황전의 많은 보법들 중 속도로는 한 손에 꼽힌다는 것이었다.

휙―

천휘의 측면에 선 그녀는 손에 든 곰방대를 거칠게 휘둘렀다.

사기가 실린 매서운 일격.

하지만 천휘는 무심한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더니, 바로 신행백변을 시전했다.

수십, 수백의 변화를 꾀하는 기기묘묘한 보법을 펼친 그는 눈앞에 휘둘러진 곰방대를 수월하게 피했다.

그 이후 화월을 위로 올려 쳤다.

한 박자 빨리 이뤄진 반격이었다.

농질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는 휘둘러진 화월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신 입가에 착용하고 있었던 면사가 반으로 잘리고 말았다.

그를 보고 있던 천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것 때문에 면사를 쓴 건가?’

면사 속 숨겨져 있던 하관은 처참했다.

입술과 뺨이 강한 압력에 당한 것처럼 보기 흉하게 짓뭉개져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농질은 움직였다.

그녀는 사환보를 펼치며 사천절예의 온갖 절기를 이용해 천휘를 압박했다.

곰방대를 이용한 검술과 도술.

손과 발을 이용한 권장법과 각법.

그 하나하나가 뛰어난 무공이었다.

그런 초식들이 천휘를 사로잡듯이 사방에서 연계되어 펼쳐졌다.

쩌엉! 콰아앙! 스걱!

천휘는 미친 듯이 달려드는 그녀의 무공을 보면서, 화월을 휘둘렀다.

상하좌우, 사방을 비롯해 팔방까지 점령한 화월은 농질이 움직일 때마다 집요하게 그녀를 노리며 휘둘러졌다.

찰나의 순간 이루어진 삼십여 합.

반경 사십여 장의 흙이 뒤엎어지고, 그 사이로 여러 구멍이 생겨났다.

그러며 농질의 몸에는 혈흔이 늘어났다.

팔에서 시작된 상처는 다리와 얼굴 뺨까지 혈흔이 가로 새겨져 있었다.

순간, 순간이 생과 사를 갈랐다.

계속해서 충격파가 터지며 날카로운 공격이 이어져 피를 불러냈다.

그렇게 오십여 합을 넘어갈 즈음.

“하하하핫!”

불현듯 농질이 미친 듯이 크게 웃었다.

일그러진 입매가 비틀리며 더욱 흉한 꼴이 되어 갔지만, 그녀는 광소를 터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응?’

천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농질은 무언가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기질이 달라졌어.’

확실히 분위기가 변했다.

그녀의 사이한 동공이 혼탁해졌다.

짙은 광기의 소용돌이를 품은 눈동자였다.

그뿐이랴.

곧 그녀를 감싸고 있던 거무튀튀한 기운이 점차 옅어지더니, 이윽고 불투명한 잿빛의 기운으로 화했다.

심후한 공력이었다.

천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녀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떠올린 것이다.

‘주화입마……?’

뒤엉킨 기혈과 혼탁한 눈빛.

거기에 그녀는 현재 주변에 일렁거리는 공력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막 주화입마에 빠진 무인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때 농질의 오른손이 펴졌다.

그로 인해 손에 쥔 곰방대가 바닥에 ‘툭’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화아악!

새하얗고 가녀린 손가락에 불투명하고 칙칙한 기운이 담기더니, 이내 패도적인 기세로 치솟았다.

매의 발톱처럼 활짝 펼쳐진 다섯 손가락에 치솟은 일 장가량의 강기.

‘잠깐.’

그것을 본 천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가 익숙했다.

기수식에 담긴 내공 운용이, 기세가.

그 순간.

휘이이―

옅은 바람이 일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발한 공력의 파동이 수백 줄기의 바람으로 화한 그때.

쿠웅!

그녀가 도약했다.

크게 찍어 내린 발바닥을 따라서 지반이 거미줄처럼 쩍하고, 갈라졌다.

잿빛의 머리카락이 뒤로 휘날리고, 광기에 실린 눈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서 기나긴 궤적을 그렸다.

엄청난 속도의 돌진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우수를 들었다.

매의 발톱과도 같은 손가락마다 치솟은 불투명했던 기운이 강기에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촤아악!

다섯의 강기가 단번에 폭사하며 일순간 허공을 완전히 찢어발겼다.

잔백잔혈조(殘魄殘血爪).

사파의 절대수법이자 사로삼대수법(邪路三大手法) 중의 하나.

과거 강호를 공포에 벌벌 떨게 했었던 사혈황(死血皇)의 독문절기가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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