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귀영대주님이…….”
“이, 이게 무슨…….”
쉴 새 없이 아미파의 여승들을 몰아붙이던 사흑련 군세가 주춤했다.
단 한 명에 의해서.
그만큼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귀영대주가 힘없이 쓰러지며 핏물과 혈향만이 남은 공간에는 오직 단 한 명의 청년이 오연히 서 있었다.
흑·적색의 도복을 입은 청년 도사.
일검에 귀영대주를 베어 내 명줄을 끊었다고 생각하기 힘든 어린 외모.
하지만 기도가, 존재감이 남달랐다.
“저자가…… 매화신협…….”
노인, 혈영대주가 침음성을 흘렸다.
화산파의, 아니. 강호의 신성.
현 강호에서 그 누구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
혈영대주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그는 강호에 파다하게 퍼진 매화신협의 소문을 그다지 믿지 않았었다.
이제 갓 약관을 넘은 나이의 청년이 십 년 전 천무지경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녹림대제를 패퇴시켰다니.
세상 어느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당장에 직접 보지 않았는가.
귀영대주가 단 일검에 죽는 모습을.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세상에 이런 괴물이…….’
흰 수염이 가득한 턱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아래로 떨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위험이 닥쳤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상하좌우로 움직여, 수하들과 귀영대를 훑었다.
그들의 모습도 영 좋지 않았다.
마치 공황에 빠진 자들처럼 동공이 풀려 있었고, 긴장한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반면 아미파 쪽은 달랐다.
“소협!”
“아미타불. 도와주러 오셨군요.”
아미파 제자들은 천휘의 극적인 등장에 안도와 기쁨이 공존한 상태였다.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제자들의 반절가량이 부상을 입어 싸움을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아미파의 고수, 소혜사태마저 팔 하나를 잃은 상황이었지 않은가.
최악으로 치닫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이때 천휘가 나타났다.
지금 그는 복호사에 모인 정파 무인들에게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사흑련 쪽으로 기울던 전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해 갔다.
강호는 강자지존의 세계.
매화신협이란 고수의 충격적인 등장은 우세를 점하던 사흑련 군세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직도 잡것들이 많아.”
천휘가 주변을 훑으며, 혼잣말하듯 얘기했다.
무인의 자존심을 긁는 오만한 말.
하나 혈영대주를 포함해 사흑련의 무인들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저벅.
천휘의 가죽신이 땅을 밟았다.
작게 울린 소리.
하지만 그 소리는 이곳에 있는 모두의 귀에 아주 선명하게 박혔다.
천휘는 계속 걸어갔다.
눈앞을 가득 차지한 사흑련의 군세로.
일 대 수백.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마치 범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행태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적은 한 명이다.”
혈영대주가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말했다.
그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도망? 불가했다.
혈영대의 대주인 이상. 아니, 사흑련에 속한 이상 임무를 포기하고 도망친다는 것은 죽음과 직결했다.
그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저 매화신협을 죽이는 것.
“죽여라!”
그의 발작적인 외침과 함께 혈영대와 귀영대가 사방으로 분분히 흩어졌다.
천휘는 고요히 주변에 퍼진 이들을 봤다.
괜히 사흑련의 대대가 아닌지, 조직적이고 날카로운 움직임이었다.
암기, 도법, 부법, 검법 등…….
각양각색의 무공이 펼쳐졌다.
통일되지 않은 무공들의 향연.
그러면서도 그들의 움직임은 하나로 통일이 된 것처럼 같은 느낌이었다.
천휘를 죽이는 것.
바로 그,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살기와 사기가 동반된 그들의 무공이 천휘를 바짝 옥죄여 왔다.
사방에서 자신을 덮쳐 오는 이들을 바라보던 천휘가 닫았던 입을 뗐다.
“알아서 명을 재촉하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울리고.
화아악!
천휘의 몸에서 기세가 피어났다.
무채색의 기운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중천에 뜬 햇빛을 반사했다.
절세경지에 이른 고수의 신위.
경지에 오른 고수는 홀로 군단이나 다름없는 전력을 감당한다고 했던가.
그가 풍기는 기세는 몰아치는 군세의 기운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앞선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스윽―
천휘가 늘어트렸던 화월을 들었다.
햇빛에 반사된 은은한 적빛의 검신이 달려드는 적들을 가리켰다.
이어서 천휘가 고개를 들었다.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지척까지 도달해서 휘두르기 시작한 적의 병기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를 않았다.
새까만 어둠이 드리워졌다.
살기와 사기만이 가득한 어둠이.
그 속에서 천휘는 안광을 빛냈다.
백회혈이 활짝 열렸다.
그 순간 삼단전이 일통(一統)하며, 주변의 시간이 아주 느릿해져 갔다.
급가속한 사고에 의식 속 시간만이 빨라졌다.
천휘는 거의 멈춘 듯 느릿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향만천지무(香滿天地舞).’
동시에 하나의 초식을 떠올렸다.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劒) 이초식.
그가 익힌 무공들 중 광역으로 펼치기에 적절한 무공이었다.
곧 어둠 속에 궤적이 그려졌다.
향만천지무의 검로(劍路)였다.
스윽―
화월이 이어서 움직였다.
의념을 따라서 내공이 발하고, 화월이 순식간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쾌속을 넘어, 섬전과도 같은 속도.
하나의 궤적을 그렸던 화월은 곧이어 수십, 수백으로 나뉘어 갔다.
그러다 이윽고.
번쩍!
화월의 검격이 빛으로 화했다.
쩌어엉! 촤아아악!
빛이 그들을 덮치며 서늘한 적빛의 검기가 사파 무인들을 난도질했다.
“으아아악!”
“커헉!”
달려들던 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사무치는 고통이 몰아쳤다.
온 전신이 난도질당하는 격통.
향만천지무는 그들의 의복은 물론이고, 병기와 전신까지 갈라 버렸다.
이윽고 사방에서 피가 튀었다.
수십의 사파 무인들은 그대로 목숨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참상이었다.
핏물이 천천히 차올랐다.
어느새 차오른 피 웅덩이에 사체들이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정적이 짙게 드리워졌다.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건 아미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저벅.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천휘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피는 한 방울도 묻지 않은 채였다.
“…….”
천휘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사파 무인들을 무심한 눈으로 훑었다.
감정이라곤 어떤 것도 없는, 일견 귀찮다는 듯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 시선에 혈영대주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이길 수 없어.’
사고가 정지했다.
마치 사흑련주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같았다.
숨이 턱 막힌 그가, 사흑련주를 떠올리던 그때.
사박.
그가 걸음을 내디뎠다.
단 한걸음에 십 장이 좁혀지며, 천휘의 모습이 갑자기 크게 확대됐다.
축지를 한 듯 놀라운 보법이었다.
“……사, 살려…….”
공포에 질린 혈영대주가 검을 손에서 놓으며, 두 손을 모으려 할 때.
스윽―
시야에 붉은 궤적이 나타났다.
마치 황혼이 인 것처럼 황홀하기까지 한 궤적을 멍하니 보던 그의 시야가 이번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의식은 사라졌다.
촤아아악!
사방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검격은 혈영대주와 그의 뒤에 도열해 있던 사파 무인들을 베어 냈다.
단 이합.
그 이합 만에 복호사를 포위한 혈영대와 귀영대 일백가량이 죽었다.
정파의 무인들은 숨을 삼켰다.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었으나, 천휘의 손속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천휘에게 다가갔다.
“아미타불.”
불호를 읊은 소혜사태가 천휘의 앞에 다가가더니, 한 손으로 합장했다.
“도움에 감사하네.”
어느새 베어진 부위를 천으로 감싼 그녀가 천휘에게 고갤 숙였다.
천휘는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손 하나를 잃었네요.”
“허허,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이렇게 목숨을 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을…….”
소혜사태가 웃었다.
파리해진 안색 속에 피어난 미소.
그것은 얼핏 힘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서인지 다정해 보이기도 했다.
“흠, 그것도 그렇긴 하죠.”
그녀를 보던 천휘가 고갤 돌렸다.
이곳은 지나가는 와중에 들른 곳이었다.
지금 천휘의 목적은 저곳.
그의 시선 끝이 산문을 담았다.
금빛의 광채와 거무튀튀한 사기를 휘감은 경력이 허공에서 요동치고.
쩌저저정!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의 지각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울리는 중이었다.
두 절대 고수의 충돌.
그 여파가 여기까지 전해진 것이다.
천휘가 입을 달싹였다.
“뒷정리는 알아서 할 수 있죠?”
물음을 내뱉는 그의 시선은 산문에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소혜사태가 그런 천휘를 지그시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가시게나.”
그녀의 대답이 들려온 그 즉시.
훅!
천휘의 신형이 마치 호롱불이 꺼지듯이 사라졌다.
순식간이었다.
* * *
내리쬐는 중천 아래.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봤다.
농질과 소운사태.
두 절세고수는 각자의 공력을 끌어올리면서,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휙―
불현듯 농질이 소매를 흔들었다.
조금 전 일합을 나눈 것 때문일까.
그녀의 소매는 대부분이 갈기갈기 찢어발겨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매 사이.
스으으―
곰방대가 차마 흘려 내지 못한 기파를 사방으로 흘리고 있었다.
“내게 이토록 강렬한 충격을 준 이는 근 십 년 동안 네가 유일해. 련주가 대정신공의 법력은 소림과 비견해도 모자람이 전혀 없다더니, 정말 그럴 줄은 몰랐는걸.”
기분 좋은 듯 그녀가 웃었다.
한껏 휘어진 눈썹은 마치 초승달처럼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그에 반해 소운사태는 무표정했다.
하나 그녀의 전신에서 풍기는 법력은 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소운사태가 농질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윤회육환장을 들었다.
짤랑―
방울 소리가 울리며, 그녀의 전신에서 강렬한 법력이 물결처럼 퍼졌다.
육중한 기의 파동이었다.
“좋은 기세야.”
그 기세에 답하듯 입을 연 농질 또한 공력을 끌어 올렸다.
사천절예(邪天絶藝).
그녀가 과거 목숨과 바꿀 각오로 익힌 사황전의 절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끄무레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유형화된 사기가 불꽃처럼 이글거리면서,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그그극―
소운사태가 퍼트렸던 기의 파동과 부딪치며, 대기에 진동을 일으켰다.
지닌 무위가 하늘에 닿은 자…….
천무지경의 고수 둘이 퍼트린 기의 충돌에 대기가 겁을 먹은 듯,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공간이 갈래갈래 찢겼다.
어떠한 출수도 하지 않은 공력의 공방일 뿐이었음에도 공간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에 우레와 같은 기파가 내리칠 즈음.
콰아앙!
돌연 강렬한 폭발음이 터졌다.
농질이 귀신과도 같은 신법을 펼치며, 단숨에 공간을 축지한 것이다.
그녀가 거리를 좁히며 좌수를 쭉 뻗었다.
소매가 펄럭이는 모습이 소운사태의 두 눈에 확연히 아로새겨졌다.
소운사태도 마주 좌수를 뻗었다.
복호장법(伏虎掌法)의 한 수였다.
두 좌수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단숨에 그들은 각자의 무공을 펼치며, 서로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쩌저저정! 콰앙! 쩌엉!
천무지경에 도달한 두 고수의 충돌은 아미산에 폭음을 울리며, 매서운 폭풍의 용오름을 일으켰다.
콰아앙! 쾅! 쩌엉!
뒤늦은 폭발성이 따랐다.
강렬한 충격파가 복호사의 산문을 넘어서, 아미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둘 사이 공간이 진동했다.
두 절세고수의 일격, 일격은 전장의 그 어디보다 빠르고 강렬하게 부딪쳤다.
순식간에 펼쳐진 수십 합.
대정신공을 담은 불광보조의 초식.
사천절예를 담은 사파의 무공들.
상반된 금빛의 광채와 희끄무레한 사기가 서로를 물어뜯던 어느 순간.
화아아악!
불현듯 농질의 기세가 변했다.
그녀가 우수에 쥔 곰방대에서 유형의 강기가 실타래처럼 엮여 갔다.
견고하고, 날이 선 사기.
인세에 있어선 안 될 것처럼 느껴지는 지독한 사기가 하나로 응축되어 갔다.
“이런 요사한……!”
합을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평정을 유지하던 소운사태마저 곰방대에 얽혀 가는 기운에 놀란 듯 숨을 삼켰다.
“미쳤도다! 그런 기운을 인간의 몸에 품으려고 하다니!”
소운사태의 격양된 외침에 농질은 광소(狂笑)를 터트렸다.
“하하하핫! 그래, 미쳤지! 미쳤고말고! 그런데 그거 알아?”
농질이 광망을 번뜩였다.
이어서 그녀는 자욱한 살기를 퍼트리며 광기가 담긴 목소리를 나직이 흘렸다.
“미쳐야지만 강해질 수 있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아아아앙!
그녀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사기가 퍼지며, 그 주변을 침식해 갔다.
곧 그녀의 곰방대가 움직이고.
“아미타불!”
소운사태가 불호를 외웠다.
동시에 전신에서 피어난 대정신공을 윤회육환장에 모두 실어 냈다.
전과 비할 수 없는 강렬한 금광.
마치 보현보살의 재림이라도 된 것처럼 강한 법력이었다. 그렇게 지닌바 모든 법력을 끌어올린 소운사태가 윤회육환장을 뻗었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정정(正定).
아미파 절세신공이 현현했다.
금광으로 물든 윤회육환장이 하늘과 그녀를 잇듯이 관통하는 순간.
“하하하핫! 좋아!”
면사가 흔들릴 정도로 피안대소를 터트리던 농질이 안광을 폭사했다.
마치 하나의 검처럼 변해 버린 곰방대를 쥔 그녀가 움직였다.
우우우우―
삽시간에 공기가 울음을 토했다.
몰아치는 어마어마한 압력.
그러다 이윽고 둘이 맞닿았고.
콰아아아아아!
강렬한 폭음과 충격파가 복호사 산문에서부터 산 전체에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