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복호사의 주변.
사흑련의 군세와 아미파에 모인 무인들이 부딪친 충돌의 여파는 컸다.
오랜 역사를 자랑해 온 수많은 사찰과 암자는 온갖 곳에서 부딪치는 무인들의 격돌로 인해, 예스럽고 고풍스럽던 모습을 잃어 가고 있었다.
점점 폐허가 되는 광경.
쩌엉! 채앵!
충돌은 계속해서 이어져 갔다.
서로가 질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전세는 점점 아미파 쪽에 안 좋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이천과 칠백.
전력의 차이가 명백한 바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혈영대와 귀영대를 위시한 사흑련의 군세는 복호사를 중심으로 수성을 하는 아미파의 비구니들과 그들을 도우러 온 무인들을 압박해 갔다.
팽팽하게 이어지던 힘의 균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흑련의 군세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져 갈 즈음.
사흑련의 군세 후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언제 뒤를……!”
후미를 책임지고 있던 귀영대원들은 지금 벌어진 상황에 당황했다.
촤아악!
곳곳에서 피가 튀고 있었다.
“대체 저놈들은 누구기에……!”
귀영대원들은 갑자기 불쑥 나타난 정체불명의 무리를 노려봤다.
그때였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우두머리라도 되는 듯한 사내가 눈에 살기를 번들거리며, 대원들을 향해 속닥였다.
“끽해 봐야 적은 백 명도 안 된다.”
말과 달리 긴장을 한 그의 눈이 지금 날뛰고 있는 무리를 향했다.
여기저기 피가 묻은 새하얀 피풍의를 걸친 이들.
그리고 그런 그들보다 그의 시야를 사로잡는 것은 선두에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홀로 피풍의를 입지 않은 채였다.
대신 새까만 흑색의 도복에 붉은 매화 문양이 그려진 도복을 입고 있었다.
‘화산파가 왜 여기에…….’
그의 눈이 화산의 도복을 담으며 의문을 떠올린 순간.
불쑥!
갑자기 보고 있던 도복이 엄청나게 커졌다.
‘아니, 바로 코앞…….’
그것이 그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쿵!
“흠. 이제 일 할은 죽였나?”
순식간에 남자의 목숨을 거둔 천휘는 중얼거리면서, 벌레 쫓듯 화월을 대충 휘둘렀다.
“컥!”
머리 위의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려 기습하려던 사내의 목이 관통됐다.
피가 아래로 쏟아지는 그 찰나.
휘이이이―
매서운 살기가 피부를 간질였다.
사방에서 기회를 엿보던 이들이 이때다 싶어서, 동시에 달려든 것이다.
벼락과도 같은 속도였다.
정면에서 두 사내가, 측면의 여섯의 남녀가 제각기 무공을 펼치며 덤벼드는데 날이 선 경파가 상당했다.
그중 측면에서 달려들던 중년 남자 하나가 협검을 마치 화살 쏘듯이 앞으로 내질렀고, 옆의 두 남녀는 기다란 단창(單窓)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그뿐이랴.
다른 이들도 각자의 병기, 권과 장을 휘두르며 혼신의 일격을 펼쳤다.
우우웅―
체공 상태에서 이루어진 합공에, 사파 특유의 사기와 살기가 어우러지며 공기가 진동했다.
강한 내력을 담은 그들의 합공이 이윽고 천휘를 길길이 찢어 버리려고 할 때.
탓.
뒤늦게 천휘가 발을 놀렸다.
아주 늦은 움직임이었다.
그에 몇몇은 발버둥이라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곧 그들은 웃음을 그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입을 떡 벌렸다.
일순간 천휘의 형상이 여럿으로 분열하기 시작하며, 잔상만 남았기 때문이다.
환환미종보(幻環迷踪步).
화산파의 암향비동에만 남아 있던 소실된 무공이 수백 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이 아미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무슨!”
천휘를 상대하던 그들이 기겁할 때.
스윽―
화월이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아주 미세한 떨림.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움직였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떨림이 나타난 순간.
스으윽―
옅은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만이 흔들릴 작은 바람.
하지만 곧 그 바람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이어서 그들의 몸을 삼켰다.
그리고 광풍(狂風)이 휘몰아쳤다.
촤아아악!
동시에 그들의 전신에 혈흔이 가로 새겨지며, 사방에 피를 흩뿌렸다.
한순간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
천휘는 쓰러진 시체들에게는 눈길도 두지 않고, 멸절대를 바라봤다.
“뒤는 내게 맡겨!”
“중상이면 뒤로 빠져요!”
멸절대는 검은 무복의 무인들, 귀영대를 상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물론 우세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열세라고 할 수 있었다.
임하율을 비롯해 멸절대 중 무위가 하위인 대원들은 상처가 극심했다.
상대는 귀영대.
사흑련의 정예 부대였으니, 제아무리 각 문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들이라 해도 그 차이가 있었다.
물론 천휘가 끼어들면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당사자인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한 명, 한 명 챙겨 준다?
그건 대주의 역할이 아니었다.
‘죽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천휘는 그리 생각했다.
전원 생존이 목표긴 하지만, 죽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호는 생사를 바로 곁에 두고 살아가는 곳.
살기 위해선 강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알려 준 것도 있고.’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짧은 나날이었지만, 멸절대의 실력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월등히 강해진 상태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지고한 경지의 고수와 대련을 거듭하다 보면, 그 눈이 높아지는 법.
그 혜택을 톡톡히 본 것이다.
그것을 방증하듯 지금 멸절대는 실제로 사흑련의 정예 부대를 잘 상대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 그대로의 실력이었으면 이미 전멸당하고도 남았을 터다.
‘자신들이 잘 알겠지만.’
멸절대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을 내며 살아 있었다.
예전이라면 이 정도의 적들과 만난 것만으로 지레 겁에 질렸을 테지만, 지금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후우.”
임하율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왼팔에 중상을 입어 움직이기 힘들어 보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상대는 그녀보다 월등히 강했다.
하지만 그녀는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길 수 있어.”
중얼거린 그녀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지금 날아드는 귀영대원들의 공격은 분명 매섭고, 날카로웠지만 그녀에게는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압!”
그녀가 오른발을 크게 내뻗었다.
온 힘을 실어 진각을 밟은 그녀는 손에 들린 검을 사선으로 올려 쳤다.
흐릿한 검기가 실린 쾌속한 일검.
예전이라면 바람도 제대로 가르지 못했을 일검이 달려들던 귀영대원의 가슴팍을 완벽히 베었다.
촤아악!
임하율이 피를 뒤집어썼다.
황급히 그녀가 소매를 들어서 얼굴에 묻은 피를 털어 내려던 찰나.
“……!”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잠깐의 방심, 그 틈을 노린 귀영대원이 단창을 앞으로 뻗은 것이다.
임하율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회피하기에는 늦은 상황.
치명상이라도 피하기 위해 옆구리만 내줄 생각으로 움직이던 그때.
채앵!
날카로운 검광이 나타났다.
동시에 단창이 반으로 갈라지고 그것을 휘두르던 귀영대원의 몸이 무너졌다.
털썩―
“후우, 후우. 방심하지 마시오.”
임하율을 노리던 귀영대원을 베어 낸 단리관천이 숨을 크게 헐떡였다.
“부대주님. 감사…….”
“감사 인사는 나중에 받겠소.”
단리관천이 차갑게 말했다.
일견 쌀쌀해 보이는 태도와 말투였으나 임하율은 그의 말뜻을 단박에 이해하고 기감을 퍼트렸다.
나중에 보잔 말은 살아남으라는 뜻.
그녀는 앞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단리관천과 등을 맞대며, 검을 들었다.
말은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이뤄진 행동이었다.
천휘와의 대련을 통해서 익숙해진 방법이 지금 모습을 끌어낸 것이다.
곧 둘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곳은 전쟁터.
방심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들을 본 천휘가 눈을 반개했다.
임하율과 단리관천뿐만이 아니라, 멸절대 모두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알아서 하게 놔둬도 되겠어.”
멸절대의 임무는 단순했다.
각개격파라는 이름의 치고 빠지기.
사흑련의 군세를 흔들어 놓을 요량으로 꾀한 전투 방식은 지금까진 성공적이었다.
“목숨은 알아서 건사하겠지.”
이제부터는 그들의 몫이었다.
천휘는 멸절대를 보던 시선을 거두면서, 다시금 발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가죽신이 피 웅덩이를 밟았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매화신공의 내력이 절로 피 웅덩이 위 한 치가량을 띈 허공을 밟게 했기 때문이다.
지고한 경지에 이른 보신경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고절한 경지를 선보인 천휘는 정면을 주시했다.
수십, 수백을 넘어 이천에 달하는 자들.
사흑련의 군세를 지그시 보던 천휘는 바람에 불어오는 혈향을 맡으며, 입가에 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살기와 사기, 흥분과 혈향.
전생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그럼 난 내 일이나 마저 해 볼까.”
천휘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복호사의 산문 쪽.
그곳에서 퍼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의 충돌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탐스러운 것들이 있었다.
* * *
퍼엉!
마치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 뒤를 이어서 혈영대원이 바닥에 몇 번 튕기며 날아가다, 고꾸라졌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곳에는 소혜사태가 손바닥을 앞으로 뻗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돌진하던 혈영대원의 복부에 금정면장(金頂綿掌)을 정통으로 틀어박은 소혜사태가 항마후를 터트렸다.
“아미의 제자들은 저 악독한 무리가 복호사의 내부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라!”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금광이 흘러나오며, 웅혼한 법력이 솟구쳤다.
불혼패엽공(佛魂貝葉功).
이어 소혜사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번쩍!
법력이 실린 정광(晶光)이 두 눈에서 흘러나오며, 묵직한 기도를 발했다.
아미파 신공의 법력이 거친 폭풍과도 같이 휘몰아치자, 공격하며 들이닥치던 혈영대원들이 부지불식간에 움찔했다.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유형화된 법력은 압도적이었다.
무극지경에 오른 고수의 위용.
그것은 일개 혈영대원들이 받아칠 수 있을 만한 기도와 존재감이 아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의 제자들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합장했다.
그리고.
화아악!
아미파가 자랑하는 맑은 기운이 그녀들의 전신에서 찬란히 피어났다.
소청신공(小淸神功).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군세에 점차 전세가 기울었고, 이에 입술을 잘근 깨물던 아미파의 비구니들은 소혜사태의 외침에 자극받아 각자의 내공을 모두 끌어 올렸다.
그 덕분일까.
그녀들이 펼치던 항마복룡진에 금광이 더해지며, 법력이 휘몰아쳤다.
지금 그녀들의 기세는 사방에서 포위해 오는 사흑련의 군세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때.
푹!
소혜사태의 바로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피륙을 꿰뚫는 소리였다.
놀란 소혜사태가 휙 고갤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보이는 광경에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과 분노에 물들었다.
“서령아……!”
아미파 제자 중 하나인 위서령의 복부에 검신이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면치 못할 치명상이었다.
“커, 커헉. 사, 사고님…….”
위서령이 피를 토하며, 말할 무렵.
“명이 끈질기군.”
위서령의 복부에 검을 꽂은 사내가 무심하게 말하며, 튀어나온 검을 옆으로 그었다.
촤아악!
피가 튀고, 위서령이 쓰러졌다.
극히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광경.
“사매!”
“사저!”
뒤늦게 다른 아미파 제자들 또한 상황을 파악하고는 검을 휘둘렀다.
난피풍검법(亂披風劍法).
쾌속하고, 표홀한 검법이 위서령의 복부에 칼을 꽂았던 이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처럼 휘둘러졌다.
하지만.
번쩍!
사내가 더욱 강한 검격을 펼쳤다.
비교가 불가한 검격이었다.
찰나 지간 휘둘러진 다섯 번의 검격이 흑색의 경파를 흩뿌리면서, 아미파 제자들의 검에 부딪치는 순간.
쩌어엉!
아미파 제자들은 패퇴하고 말았다.
검은 산산조각이 나며 검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몇몇 제자들은 내상을 입은 듯 가슴을 움켜쥐며 물러났다.
사내는 그런 그녀들을 힐끗 보더니, 검격을 휘둘렀던 검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바로 옆으로 그었다.
스걱! 스걱!
물러난 아미파 제자들의 목에 가느다란 붉은 선이 그어졌다.
뒤이어 목이 아래로 떨어졌다.
유형화된 흑색의 검기, 경파가 그녀들의 목숨을 단번에 앗아 간 것이다.
어느새 사내의 주변에 있던 여섯의 아미파 제자들은 사체로 변모해 있었다.
극히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학살.
“이노오옴!”
소혜사태가 땅을 박찼다.
짙은 분노가 실린 불혼패엽공의 내력이 발바닥에서 퍼지며, 폭사했다.
신법, 영활신변(影滑神變)의 발현.
돌연 그녀의 신형이 축지라도 한 것처럼 일순간에 사라지며, 사내에게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십 장, 오 장, 일 장…….
삽시간에 바로 코앞이었다.
소혜사태는 우수를 활짝 펼치며 그곳에 불혼패엽공의 내력을 온전히 담았다.
우우웅.
손바닥에서 웅혼한 법력이 실렸다.
무아신장(無我神掌).
그녀의 장이 곧게 나아가는 순간.
“방심했군.”
그녀의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스걱!
그녀의 오른손이 하늘로 솟구쳤다.
“사고님!”
“사, 사저!”
지켜보던 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소혜사태의 뒤에는 붉은 무복을 걸친 노인이 낫을 들고 나타나 있었다.
노인은 흑의 무복을 입은 사내를 보면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좋은 도발이었네. 귀영대주.”
귀영대주라 불린 사내는 노인을 보며 마주 웃었다.
“후후, 설마 이 정도로 이렇게나 빈틈을 보일지는 몰랐어.”
“제자를 향한 사랑이 극심해 그런 것 아니겠나?”
비웃음이 담긴 대화에 소혜사태가 두 눈을 부릅뜨며, 왼손을 뻗었다.
하지만.
탓!
노인은 가볍게 뒤로 뛰어 피했다.
“이성은 항시 차갑게 유지해야 하는 법이거늘, 아직도 이해를 못 했군.”
노인의 말에 소혜사태가 이를 악물며, 일단 출혈을 막기 위해 혈을 짚으려 할 때.
“어디를!”
귀영대주가 달려들었다.
소혜사태의 목을 향해 휘둘러진 검이 지척까지 도달해 막 닿으려는 순간.
스으으―
귀영대주가 흠칫했다.
갑자기 매화향이 코를 간질인 탓이다.
‘서, 설마……?’
그가 두 눈을 부릅뜬 순간.
촤아악!
그의 어깻죽지에서부터 허리춤까지 사선으로 혈흔이 길게 새겨졌다.
핏물이 마치 꽃잎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그 뒤.
한 청년이 검을 늘어트린 채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소혜사태와 비구니들이 눈을 부릅떴다.
“매화신협!”
“소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