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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천마-285화 (285/391)

285화

파바밧!

멸절대가 일제히 땅을 박찼다.

내리는 눈발 사이로 움직이기 시작한 새하얀 인영들은 사방으로 나뉘며, 한껏 경직되어 있는 이들에게 돌진했다.

그들이 발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땅 위에 쌓였던 눈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일순간에 피어난 새하얀 눈보라.

그 속에서 멸절대는 각자 공력을 전신에 휘감으며, 기세를 펼쳐 냈다.

눈보라 속 빠른 움직임의 새하얀 인영들.

설화 속 설귀(雪鬼)처럼 매서운 기운을 동반한 그 모습에 몇몇 사파 무인들이 순간 주춤거렸다.

“이, 이게 뭔……?!”

쾌속한 그들의 돌진에 십오 장 정도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치 그물처럼 포위하는 형세를 취한 멸절대가 거센 진각을 밟았다.

쿠웅!

같은 순간에 펼쳐진 공력의 방출에 땅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멸절대는 공력의 파동을 일으키며, 영역 안에 있는 이들에게로 쇄도했다.

자신들이 포위한 사파 무인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을 속셈이었다.

“……개 같은 놈들이!”

“젠장할!”

절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사파 무인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멸절대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그제야 그들은 다급히 각자의 기문병기들을 꼬나 쥐고서는, 눈에 힘을 줬다.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행동.

그들은 곧 닥쳐올 충돌을 대비하며 공력을 끌어올렸고, 얼마 가지 않아 멸절대와 부딪쳤다.

퍼억! 서걱! 콰직!

“커헉!”

“우에엑!”

온갖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살이 베이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

비명 소리와 구토하는 소리 등 수많은 소리가 합쳐져, 일대는 혼란해져 갔다.

멸절대는 사파 무인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눈앞의 상대는 사흑련의 정예인 귀영대도, 혈영대도 아니었다.

군소 방파에서 데려온 일개 무인들.

그에 반해서 어리다고는 하지만 멸절대는 각 문파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들, 그 격부터가 달랐다.

“이런 개 같은 새끼들이!”

“여기서 내가 죽을 것 같냐!”

사파 무인들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답답함에서 나온 발악이었다.

사십이 명의 멸절대가 흩어져서 거세게 쏟아 내는 공격에 사파 무인들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막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반격도 있었다.

스걱!

연검을 휘둘러서 방심한 멸절대 대원의 피풍의를 잘라 낸 무인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달싹였다.

“이대로 당할 것만 같으냐?”

승기를 잡은 것처럼 말한 무인이 다시 연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푹!

복부에서 검신이 튀어나왔다.

“커, 컥. 뒤, 뒤를…….”

무인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송대극은 피풍의가 잘리고 뺨에 한 줄기 피를 흘리며, 쓰러진 무인 뒤로 보이는 인물을 놀란 듯 봤다.

“부대주?”

무인의 등에 검을 찔러 넣었던 단리관천이 송대극을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은가 보군.”

“그럼. 이 정도는 상처도 아니지.”

송대극은 뺨에 흐른 피를 피풍의로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한편 반대쪽도 치열한 전투 중이었다.

“흡!”

숨을 삼킨 임하율이 휘둘러진 괴상한 낫을 고개 숙여 피한 뒤, 무릎을 들어서 상대의 복부를 강타했다.

진무관에서 배움을 받았던 권각술의 일종이었다.

짧게 끊어 친 공격에 낫을 휘둘렀던 무인은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임하율은 그렇게 드러난 빈틈을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진무장(眞武掌)!’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활짝 펼친 그녀는 고개를 숙인 무인의 등을 거칠게 내려찍었다.

콰앙!

무인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제대로 꽂힌 일장은 무인의 속을 크게 뒤흔들었다.

“커헉!”

한차례 피와 내장 조각을 토해 낸 무인이 충격에 전신을 꿈틀거렸다.

“드디어 하나…….”

임하율의 전신에서 땀이 흘렀다.

일격, 일격에 살이 떨렸다.

주변 멸절대 대원들은 수월하게 사파 무인들을 쓰러트리고 있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멸절대 최하위의 실력.

지금 눈앞에 있는 사파 무인들보다 강하다고 확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아.’

그녀는 숨을 천천히 골랐다.

상대는 강했지만, 왜인지 그렇게까지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대주님에 비하면…….’

천휘와의 대련들을 떠올리니, 눈앞에 있는 상대들은 할 만해 보였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내공을 끌어 올렸다.

진무공(眞武功).

뛰어난 심법은 결코 아니었다.

문파가 되지 못한 무관의 심법.

고작 그 정도였기에.

하지만 그녀가 짧은 평생을 익혀 온 무공이었다. 그 진무공의 내공이 절로 그녀의 의지를 따르며, 천천히 검을 감싸 갔다.

은은하게 흐르는 내공.

곧 아지랑이와도 같은 옅은 검기가 검을 감싸며, 그 위용을 보였다.

임하율은 기문병기를 든 사파 무인들을 보며, 발가락 끝에 힘을 줬다.

가죽신의 끝부분이 눈을 짓밟았다.

딱딱한 흙의 감촉이 느껴진다 싶을 때, 임하율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한줄기의 빛살과도 같이.

임하율과 마찬가지로, 다른 멸절대 대원들 역시 침착하게 움직였다.

예전이었다면 이 전쟁의 열기에 휩쓸렸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들은 냉정했다.

그리고.

서걱!

살수에 망설임이 없었다.

두 번뿐인 임무였으나, 그사이 경험까지 쌓인 멸절대는 사파 무인들을 완전히 압도했다.

그리고 그런 이 전장의 끝 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홍양문주와 그 밑의 수하들.

더불어 그들과 마찬가지로 힘을 아끼고 있던 자들이었다.

“개방과 곤륜, 그리고 청성…….”

노인이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댔다.

주름진 얼굴과 굽어진 허리를 보아하니, 연배가 상당한 듯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절강귀수(浙江鬼手).

절강성 내에서 악독한 수법으로 악명을 떨친 전대 고수로, 지금 이곳에 모인 자들 중 손에 꼽히는 무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 온 놈들인가?”

노인은 양 끝에 길게 자라난 새하얀 수염을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혼잣말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였다.

사박, 사박.

붉은빛이 감도는 검을 뽑은 천휘가 눈 위로 사뿐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산책하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져 오는 천휘를 보는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나온 눈에 발자국이 없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

“답설무흔(踏雪無痕)?!”

일순간 군위방(群威房)의 방주, 악심군(惡心君)이 기함성을 터트렸다.

그만이 아니었다.

일대에 있던 사파의 고수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매화신협의 무위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때.

“뭐 해? 너희들의 간격이잖아.”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장 거리.

그 거리를 두고 잠시 멈춰 선 천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선수가 싫다면, 내가 가지.”

천휘가 화월을 가슴께까지 들었다.

그저 검을 드는 행위.

그뿐이건만, 곧이어서 나타나는 광경에 사파 무인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검신에 무색의 아지랑이가 피었다.

마치 신기루와 같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아지랑이는 이내 하나로 뭉치며, 꽃으로 화했다.

눈 내리는 겨울 속 피어난 꽃.

사파 무인들은 일순간 식겁했다.

저 붉은 꽃의 정체는 딱 하나였다.

화산파의 정수, 검화였다.

“매화검법……?!”

그 순간 매화가 맨 앞에 있던 대략 열 명의 무인들에게 가라앉았고.

푸슈슉!

핏물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검에서 피어난 매화보다 더욱 붉은 혈화(血華)가 마치 봄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이라도 된 것처럼, 눈과 섞여 흩날렸다.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운 광경.

이내 열 명의 무인이 신음도 내뱉지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둔탁한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사방에 칼 부딪치는 소리와 소음이 가득한데도, 유난히 더욱 크게 들리는 듯했다.

뒤늦게 피가 떨어지고, 천휘가 붉게 물든 눈을 밟으며 고갤 들었다.

무심한 안광이 그들을 담았다.

침묵을 자아내는 광경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검이 휘둘러지는 것도, 어떤 무공을 사용한 것인지도.

그저 검이 들렸다 싶은 순간.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좀 얕았나.”

천휘는 쓰러진 시체들을 흘낏 보더니, 다시금 화월을 치켜들었다.

매화신공의 내력이 들끓었다.

발 주변으로 일어난 공력에 주변의 눈발이 한순간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압도적인 기세의 발현이었다.

그 속에서 천휘가 사파 무인들을 한 명씩 훑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이번엔 확실히 명을 끊어 줄게.”

* * *

휙!

농질은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파에 눈썹을 찡그리며, 고갤 돌렸다.

대략 이백 여장의 거리.

상당히 먼 거리였음에도 확연히 느껴지는 기세에 그녀의 관심이 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절한 기세였다.

“음? 이 기운은 뭐지?”

사(邪)? 마(魔)? 도(道)? 불(佛)?

아니, 그 무엇도 아니었다.

저것은 투명했다.

마치 자연지기와도 같이.

하지만 그녀는 얼마 안 가서 바로 관심을 거둬야만 했다.

더 중요한 것이 앞에 있기 때문이었다.

스윽―

농질은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연기가 들어오며, 후각을 자극했다.

익숙한 향을 맡았기 때문일까.

들끓던 마음이 차분해진 그녀는 고개를 다시 돌려, 앞을 바라봤다.

복호사의 산문.

법력이 쏟아지는 현판 아래에 마치 신장처럼 굳건하게 똑바로 서서 산문을 지키고 있는 이가 있었다.

파르스름하게 깎은 머리의 중년 여인.

농질은 지금 그녀가 보이는 것보다 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당신이 소운사태인가 봐?”

농질의 짐작처럼 그녀는 아미의 장문인, 소운사태였다.

소운사태 역시 농질을 바라봤다.

치켜 올라간 눈썹, 살짝 풀린 눈.

입가를 가린 면사의 존재.

거기에 살갗이 드러나는 복장까지. 그런 그녀의 퇴폐적인 모습에는 사기가 실려 있었다.

“요선(妖仙)이 아니라 요물이구나.”

소운사태가 나직이 말하며, 윤회육환장을 번쩍 들어서 아래로 찍었다.

화아아악!

주변에 쌓여 있던 눈이 그녀가 발한 기의 폭풍에 한순간에 밀려 나갔다.

강렬한 법력이 실린 일수였다.

농질은 자신을 덮쳐 오는 눈 더미를 보면서, 가볍게 곰방대를 흔들었다.

사아악!

눈 폭풍과 법력이 반으로 잘렸다.

곧 그녀는 곰방대를 잡은 손에 남아도는 여력을 흔들어서, 털어 냈다.

“일각에선 아미산신(峨嵋山神)이라고 불린다더니, 법력이 대단한걸.”

소운사태를 응시하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길게 찢어진 그 눈이 마치 여우와도 같이 변모하며, 빛을 발했다.

섬뜩하고, 사이한 눈빛이었다.

“피 맛이 더 궁금해졌어.”

그 말과 함께 농질은 곰방대를 위에서 아래로 휙 하고 내리그었다.

일순간 한 줄기의 기파가 생겼다.

쐐애애애액!

그 기파는 빠르게 공기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소운사태가 그 기파에 윤회육환장을 들려고 하는 순간.

씨익―

농질의 눈초리가 크게 휘어졌다.

그와 동시에 기파는 단숨에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

화들짝 놀란 소운사태가 황급히 윤회육환장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기파는 그전에 위에 있던 현판과 부딪쳤고.

콰지직!

단숨에 그것을 박살 냈다.

산산이 부서진 현판의 잔재가 밑으로 ‘쿵’하고 떨어졌다.

소운사태는 자신의 발밑에 떨어진 현판 조각들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미파의 역사가 담긴 현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부서졌다.

소운사태의 전신에서 강렬한 법력이 차오르며, 승복이 하늘거렸다.

대정신공(大靜神功).

아미파 신공(神功)의 발현이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일어난 법력이 농질과 그 뒤에 있는 수많은 군세를 휩쓸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정예임에도 몇몇 무인들이 움찔할 정도였다.

농질 또한 몰아치는 법력의 강렬함에 내심 놀랄 무렵.

“……네놈!”

소운사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전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었고, 후에도 없을 분노였다.

그걸 본 농질은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곰방대를 흔들었다.

나지막한 명령을 동반하면서였다.

“아미파를 멸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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