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아미파에 도착한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침상에서 일어난 천휘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사 층에 있는 방이어서일까.
시야가 확 트였다.
조금씩 내리는 눈발을 훑어보던 천휘는 밑에서 들려오는 힘찬 기합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하압!”
“흡!”
멸절대 대원들이 수련에 박차를 가하며, 한껏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꽤 한참 전부터 수련한 듯 그들의 의복은 땀으로 적셔져 있었다.
순간 천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긴장했네, 긴장했어.”
딱 봐도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자의 병기 혹은 권각을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긴장감이 몸을 위축시킨 것이다.
제아무리 적호채와 혈우검가를 무너트리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다지만, 이제 곧 벌어질 전쟁은 그 궤를 달리했다.
총 이천 명이나 되는 사흑련의 정예들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은 법.
“그것보다 이제 올라올 때가 됐는데…….”
그때 천휘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하얀색의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그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화시(烽火矢).
아미산 곳곳에 퍼져 대기하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보낸 신호였다.
“왔네.”
천휘의 눈초리가 휘어졌다.
이제 움직일 때였다.
몸을 돌린 천휘는 한쪽에 걸어 두었던 두 자루의 검을 챙기며, 발을 놀렸다.
단숨에 전각에서 내려온 천휘는 넋을 놓고 봉화시를 바라보는 멸절대를 향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 준비됐죠?”
그 물음에 멸절대는 모두가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이내 힘차게 대답했다.
“준비됐습니다!”
“네!”
대답과 함께 그들은 한쪽에 놔두었던 새하얀 피풍의를 걸쳤다.
호쾌하고, 빠른 준비였다.
이어서 천휘 앞에 도열한 그들이 뒷짐을 지면서, 명령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천휘가 씩 웃었다.
단리관천을 시작으로 한 명씩 조금 손을 봐 준 덕분일까.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
이제야 좀 부대답네.
지었던 웃음을 지운 천휘가 그들을 한 명씩 훑기를 잠시,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어제 말한 임무 다들 기억하죠?”
그의 물음에 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휘가 단리관천을 두들겨 패면서 설명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고개를 끄덕이는 대원들을 본 천휘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입을 뗐다.
“자, 그럼 가죠. 임무를 하러.”
천휘가 발을 옮기며 앞으로 나아가자 멸절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 시각.
천휘와 마찬가지로 봉화시를 본 이들이 복호사의 산문에 모여들었다.
그 수가 약 칠백.
대피시킨 어린 제자들과 함께 빠져나간 몇몇 인원이 적다고 해도, 꽤 많은 수였다.
청성파의 도사들과 주변 정파 그리고 무림맹의 사천지부에 있는 무인들이 도와주러 온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꽤나 많은 수가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산 아래로 보이는 광경에 식은땀을 흘렸다.
을씨년스러운 산길에는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무인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붉은 무복을 입은 자들과 검은 무복을 입은 자들의 이동은 마치 붉은 물결과 검은 물결이 동시에 파도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아미타불.”
“이 정도일 줄이야.”
“저렇게나 많다니…….”
지켜보던 이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열심히 긁어모은 그 수조차 지금 산길을 올라오는 사흑련의 무인들을 보자니, 단번에 빛이 바랠 정도였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아미파의 제자 중 한 명이 탄식을 내뱉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전례가 없는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아미산은 아미파의 권역.
그 때문에 사파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흑도의 왈패나 파락호들조차 감히 발을 못 들이는 곳이었다.
한데 그런 곳에 지금 사파인들이 몰렸다.
심지어 광활한 아미산의 산길을 충분히 막고도 남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그것도 그냥 사파인들인가?
아미산에 내려앉은 살기와 사기.
운 좋게 사파의 무공이나 익힌 흑도의 파락호들과는 그 격이 달랐다.
“……이길 수 있을까?”
“위험하군.”
불안의 싹이 트기 시작할 때.
소운사태가 손에 든 윤회육환장을 들더니, 가볍게 땅에 내려찍었다.
짤랑.
방울 소리가 사방에 퍼져 나갔다.
은은하게 울리는 방울 소리는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이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을 담아 그들을 감쌌다.
격하게 흔들리던 이들을 단번에 안정시킨 소운사태가 입술을 뗐다.
“떠나실 분은 지금이라도 떠나시구려.”
부드러운 권고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죽음을 불사하고 도우러 온 몸입니다.”
“무량수불. 장문인께서는 그 말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무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여기 모인 모두가 목숨을 걸고, 아미파를 돕기 위해 온 이들이었다.
무인들의 반응에 잠시 침묵한 소운사태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이다.”
“장문인!”
아미파의 제자들이 식겁했다.
그녀들만이 아니었다.
도우러 온 무인들 역시 아미파의 장문인이 고개를 숙인다는 파격적인 행동을 함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그러나 소운사태는 그러한 소란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제 목숨을 걸고, 다른 문파를 돕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도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진심이 담긴 인사에 도우러 온 무인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소운사태는 그런 그들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은인들이었다.
‘잊으면 안 되는 자들이다.’
그들의 면면을 머릿속에 담으며 바라보던 중 그녀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멸절대가 없었다.
‘먼저 움직였구나.’
하지만 이내 그녀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멸절대에게 부탁한 것은 어린 제자들의 보호와 대피였다.
지금에 와서도 안 온 것을 보아하니, 아마 빠져나갈 때 함께 움직인 것이리라.
안도감이 감돌았다.
곧 마음이 차분해진 소운사태는 윤회육환장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살계(殺戒)를 열어라!”
우렁차게 소리를 내질렀다.
법력이 실린 사자후가 복호사의 산문을 크게 휘청거리게 했다.
아미파를 존속을 건 전쟁.
아미성전(峨嵋聖戰)의 시작이었다.
* * *
“봉화인가?”
“주변에 쥐새끼가 날렸나 보군.”
“멍청한 놈들.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기는.”
하늘 향해 쏘아진 봉화시는 사흑련의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덤덤하게 넘겼다.
정확히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애초에 이천 명이라는 인원을 이끌고 가는 데 들키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한편 이천 명의 군세 중 가장 왼편에 조금 떨어진 채로 가던 이들은 봉화시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 다른 이들의 반응에 따라 잠잠해졌다.
그들의 행색은 독특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무복을 입은 자가 있는가 하면, 전신에 치렁치렁한 장식을 달고 있는 자까지.
거기다 지닌 병기조차 제각기 달랐다.
아무것도 없는 것부터 수투갑, 들기조차 벅차 보이는 도끼, 날이 뒤틀린 곡도, 연검을 찬 이도 있었다.
그 모습이 한눈에 봐도 현재 모인 사흑련의 정예들, 붉은 무복의 혈영대와 검은 무복의 귀영대와는 차별화된 상태였다.
당연했다.
그들은 사흑련 소속의 무인들로 이번 임무에서 명성을 쌓고자 뒤따라서 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장관이로군.”
그들 사이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마에 기나긴 검흔이 새겨져 있는 야비하게 생긴 사내의 입에서였다.
홍양문주(紅陽門主) 추건(秋乾).
사흑련에 소속된 수많은 군소 방파 중 한 곳의 문주인 자였다.
문도 오십 명을 데리고 이번 전쟁에 참전한 그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실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아미산의 산길이 사람으로 빼곡했다. 게다가 길을 채운 인원은 하나같이 살기와 사기를 품은 채였다.
진정 어마어마한 군세였다.
그의 입매에 호선이 그려졌다.
“이러면 질 수가 없지.”
그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무력이 아니었다.
사흑련의 정예 이천 명이 아미파를 멸문시키기 위해 모였다.
그것도 그 이름이 자자한 혈영대와 귀영대를 위시해서.
제아무리 구파일방인 아미파라도 절대로 질 수가 없는 전력이었다.
주변을 보는 것만으로 그의 입매에 머무는 미소가 더욱더 짙어져 갈 무렵.
휘익.
불현듯 한 미청년이 공중에 나타나, 그들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치 꿈결과도 같은 일이었다.
“……무슨?”
“뭐가?”
추건을 비롯해 주변의 모두가 갑자기 나타난 미청년에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볼 때.
“매, 매화?!”
“화산파다!”
몇몇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미청년의 소매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 경악했다.
매화.
현 강호에서 그 어느 곳보다 소문이 널리 퍼진 화산파의 문양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머리로 한 인물의 별호가 번쩍하고,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처럼 화산파의 소문이 널리 퍼지는 데 일조한 도사의 별호였다.
“매화신협……?”
추건이 입술 사이로 말을 내뱉자.
“어라? 이제는 물어보지 않고 바로 알아보네.”
미청년, 천휘가 짧게 대꾸했다.
인정하는 그 대답에 순간적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매화신협이 여기에 왔다고?!”
“미친!”
그들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렸다.
매화신협의 소문이라면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녹림대제를 쓰러트린 절대고수.
그들의 실력으로는 절대 상대가 불가한 터무니없을 정도의 고수였다.
몇몇 이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려고 할 때였다.
“멍청한 놈이군.”
추건이 천휘를 보며, 입을 뗐다.
천휘의 등장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듯한 태도와 어투로.
“감히 이 군세에 홀로 쳐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지닌 무위에 비해 머리는 아예 없는 것인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추건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신랄하게 말을 덧붙였다.
매화신협이 아무리 강호에 널리 이름을 알린 고수라 하지만 지금 그들은 이천 명에 달하는 군세였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이 인원을 단신으로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말에 공포에 떨던 이들의 입가에 하나둘 미소가 돌기 시작했다.
“홍양문주의 말이 맞소.”
“끌끌, 매화신협의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무위에 비해 멍청한 놈이었군.”
“제 발로 범의 아가리에 들어오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놈일 줄이야.”
기세를 되찾은 그들이 병기를 꺼내 들었다.
온갖 기문 병기들이 날카롭게 들어 올려지며, 천휘를 정확히 가리켰다.
매서운 살기를 동반하면서였다.
“이거 또 색다른 경험인걸.”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웃기다는 듯, 천휘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스르릉―
그때 추건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매화신협을 죽일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요!”
그의 외침에 모두가 눈을 빛냈다.
아미파와의 전쟁에서 보일 활약도 활약이지만, 매화신협을 죽인다면?
그리고 그 명을 거둔 게 자신이라면?
명성은 순식간에 높아질 터였다.
그들의 눈빛에 욕심이 깃들기 시작하며, 한순간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 추건은 속으로 웃었다.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어.’
그의 목적은 천휘의 목.
괜히 처음으로 나설 필요 없었다.
천천히 그리고 진득하게.
기다리고, 기회를 엿볼 셈이었다.
‘내가 목숨만 끊으면 돼.’
추건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무인들을 바라보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의 발밑에서 바람이 일었다.
홍양기공(紅陽氣功)의 발현이었다.
극한으로 끌어올린 내력이 걸치고 있던 홍색의 장포를 크게 펄럭였다.
삼엄하고, 위협적인 기세였다.
그와 동시에 천휘를 노려본 순간.
“……!”
그는 그대로 굳었다.
어느새 미소는 사라진 채. 끝부분이 올라간 눈썹 아래 붉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가까이 달려든 무인들에게는 관심도 없는 듯한 무심한 태도.
짐짓 오만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때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내 한껏 비틀렸던 그의 붉은 입술이 아주 천천히 떼어졌다.
“멸절대.”
파바밧!
말이 떨어진 직후 그의 등 뒤에서 수십의 인영이 나타나, 달려들던 무인들을 향해서 화살처럼 쏘아졌다.
몹시 빠른 속도였다.
이내 쏘아진 그들은 달려들던 사파의 무인들과 부딪쳤고.
퍼억! 콰직! 서걱!
“컥!”
“크억!”
곧 처참한 소리가 사방에서 터졌다.
누군가는 속절없이 뒤로 날아갔고, 누구는 목이 베어 그대로 절명했으며, 또 누군가는 가슴이 함몰되었다.
일순간에 벌어진 결과.
길게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만큼 짧은 경합이었다.
천휘를 노리던 사파의 무인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무슨!”
“언제 지원을…….”
그들의 눈이 흔들렸다.
나타난 집단은 하나같이 새하얀 피풍의를 푹 눌러써 눈만 드러낸 채로 날카로운 기세를 풍겨 냈다.
일견 섬찟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천휘가 눈을 내리깔았다.
모두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빛.
너무나도 오연한 태도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러한 태도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응당 그러할 일을 한 것처럼 지금의 모습이 천휘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나직한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다 쓸어버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