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소혜사태를 따라서 길을 걷는 멸절대원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걸어가는 멸절대를 보며,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저 정도의 지원이라고?”
“무림맹이 우리를 버렸어.”
아미파의 제자들은 멸절대를 보고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연배가 있는 비구니들은 애써 담담한 모습이었지만, 젊은 제자들은 실망감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씁쓸한걸.”
호광개가 중얼거렸다.
그에 다른 멸절대원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심스레 불만을 드러냈다.
“우리도 목숨을 걸고 온 것인데…….”
“아무리 실망스러운 전력이라도 저렇게 대놓고 말할 필요까지 있나.”
대원 몇몇이 입술을 삐죽 내밀 때.
“반대로 생각해 보시오.”
무홍이 나지막이 말했다.
“만약 본인들의 문파가 위험해 처했는데, 새파랗게 어린 후기지수들로만 이루어진 대대가 오면 어떻겠소? 그것도 급조된 별동대가 말이오.”
“…….”
멸절대 모두가 침묵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니 그들의 심정이 곧장 이해됐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갈!”
쩌렁쩌렁한 호통이 터졌다.
바로 그들의 앞에서였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소혜사태가 주변에서 수군대는 제자들을 보며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본 파를 도우러 온 은인들을 반기지는 못할망정, 무슨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제자들이 목을 움츠렸다.
동시에 창피함이 몰려왔는지 그들은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숙이더니, 뒤로 물러났다.
제자들을 노려보던 소혜사태는 몸을 돌리더니, 합장하며 멸절대에게 사과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미안하네.”
사과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멸절대원들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소혜사태가 고개를 흔들었다.
“도움을 주러 온 이들의 고마움을 알지 못하는 건 분명한 잘못일세.”
소혜사태는 힘을 주어서 말했다.
그녀는 지금 제자들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물론 지금의 상황에 무림맹의 지원이 이토록 적은 것이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그 일은 이들과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도우러 온 자들인데, 대놓고 수군거리다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할 정도였다.
“이번 잘못에 대해서는 제자들을 꾸짖도록 하겠네.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더 걸음세.”
말하며, 그녀가 다시 걸어갔다.
동시에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발걸음 소리만이 들리기를 잠시.
탁.
소혜사태가 발을 멈췄다.
고풍스러운 전각에 멈춰 선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이곳에서 짐을 풀고, 쉬시게나.”
합장과 함께 그녀가 물러났다.
잠시 뒤 멸절대만이 남고.
“……짐을 풀도록 하지.”
호광개가 정적을 깨트리며, 말했다.
“대주가 오기 전에 쉬자고. 드문 일이잖나.”
일부러 기분을 끌어올려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때.
“나는 자리를 비우겠네.”
단리관천이 휙 하고, 몸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일에 호광개는 놀랐으나, 곧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단숨에 이해했다.
“청성파에 가려는 건가?”
“…….”
대답은 없었다.
하나 호광개는 바로 알아봤다.
“대주가 가만 안 둘 거네.”
“알고 있어.”
단리관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미파가 사흑련의 목적이라지만, 그는 청성파가 걱정됐다.
“하지만 돌아가야 하네. 청성이 위험해 처했는데, 어찌 제자로서 가만히 있겠…….”
“그건 안 되는데.”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놀란 단리관천이 뒤를 봤다.
그곳에는 천휘가 휘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주…….”
“제 허락을 받지 않는 이상 멸절대에서 못 빠져나간다 했을 텐데요?”
단리관천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그러기를 잠시.
“부탁하오. 대주.”
그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자존심이 강한 그가 대번에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멸절대의 모두가 놀랐다.
하지만 천휘는 달랐다.
“제가 왜요?”
단리관천이 고개를 숙이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전에 나갈 기회를 두 번이나 줬는데 자기가 남겠다고 한 거면서.”
단리관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대로였다.
멸절대를 나갈 기회를 두 번이나 줬건만, 뭐든 수용하겠다며 남겠다고 결정한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본 파가 위험하오.”
그는 절실하게 말했다.
현재는 멸절대의 소속이라지만, 그에게는 청성파가 더욱 소중했다.
기억도 없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가 살고 자란 곳.
그의 고향이자, 터였으니.
하지만 천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청성파보다 아미파가 더 위험하다고 정보를 받았을 텐데요?”
사천에서 받았던 연통의 정보였다.
사흑련의 진로를 보았을 때, 청성파로 가기에는 아미파가 중간에 있어서, 빙 돌아가지 않는 한 청성파가 먼저 위험에 빠질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물론 돌아간다 해도 아미파에 먼저 정보가 들어올 테니, 늦을 리도 없었다.
결국 아미파에 있는 것이 맞건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소?”
단리관천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아미파는 안중에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청성파만이 가득했다.
“어라? 지금 이건 반항하는 거죠?”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 뒤틀린 미소를 본 멸절대 대원들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는 그 순간.
“……지금 그게 무슨 말이더냐?”
불현듯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이 아닌,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바로 단리관천이었다.
“이 목소리는 설마……?”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이내 저 멀리서 청성파의 도복을 입은 중년 도사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나, 남천 사숙님!”
단리관천이 바로 땅을 박찼다.
남천은 바짝 다가온 단리관천을 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주어진 임무를 거부하고 본 파에 돌아간다고 한 것이더냐.”
단리관천이 난생처음 듣는 남천의 차가운 목소리에 놀라며, 대답했다.
“본 파가 위험하니, 돕기 위해…….”
“본 파가 위험하다고 누가 그러더냐?”
남천이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단리관천을 꾸중했다.
“지금 위험한 것은 본 파가 아니라, 아미파다. 그런데 너는 지금 아미파를 못 본 척하려 하는구나.”
“그건…….”
단리관천이 우물쭈물했다.
그 말대로였다.
지금 청성파로 간다는 것은 아미파의 어려움을 무시하고 돕지 않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본 파가 너를 잘못 가르쳤다.”
남천은 거의 화를 내고 있었다.
“무재가 뛰어나 무공을 가르치는 데 힘을 썼더니 도사로서의, 정파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구나.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잊었으니 잘못 가르친 우리의 잘못이겠지.”
“전 본 파를 돕기 위해…….”
“시끄럽다!”
변명하려는 단리관천을 향해 남천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위험한 것은 본 파가 아니라, 아미파다. 그리고 너의 도움이 없다고 본 파가 무너질 것 같으냐!”
호통에 단리관천이 움찔했다.
여태껏 청성파 내에서는 이렇게 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던 단리관천이다.
그런 단리관천을 노려보던 남천이 홱 몸을 돌렸다.
“미안하네.”
그는 차분해진 태도로 천휘에게 사과를 전했다.
아무리 청성파의 제자라도 지금 그는 멸절대의 일개 대원이었다.
그런데 대주의 명을 거부했으니, 이는 큰 잘못이었다.
“본 파에서 잘못 가르쳤구먼.”
천휘가 별 대꾸 없이 턱을 쓰다듬었다.
‘청성파가 원래 이런 곳이었나?’
전생에 그가 알던 청성파는 무공에 미친 도가 놈들이 사는 곳이었다.
한데 이렇게 정파다운 모습이라니.
그때 남천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내 제대로 교육하겠네.”
그때.
“아니요.”
천휘가 손을 흔들었다.
“제가 하죠.”
“자네가 말인가?”
생각지 못했다는 듯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남천은 이내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였다.
지금 단리관천은 멸절대의 대원.
그를 꾸중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대주인 천휘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끼어들 곳이 아니었군.”
남천이 뒤로 물러나고.
뚜두둑―
천휘가 가볍게 목을 풀었다.
시선은 단리관천을 향한 채였다.
“검 뽑아요.”
단리관천의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예전이라면 이 대련에 기뻐 마지않았을 것이나.
지금은 무언가가 달랐다.
“머리에, 아니. 몸에 새겨 줄게요.”
말하던 천휘가 검집을 들었다.
“대주인 제 명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죠.”
* * *
사천성 의빈(宜賓).
나루터에 거적때기를 걸친 중년의 거지가 장강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렇게 멀리 펼쳐진 장강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저렇게 오는 건가……!”
어느 순간 거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광활한 장강에 대략 수십 척에 달하는 배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수십 척의 배 위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올라타 있었다.
개방의 사천지부 분타주, 연정개(煙艇丐)는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장관에 조용하게 침을 삼켰다.
“살벌…… 하군.”
주륵―
이마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그는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로 사흑련의 정예 부대.
그들은 전례가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었다.
보통 이 정도의 인원을 움직이려면 돈과 식량의 문제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는 데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건만,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모두 배의 깃발에 적힌 이름, 대은상단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비용을 대은상단이 감당하고, 식량도 지나가는 곳곳에 있는 지부에서 보충해 주었던 것이다.
깃발에 적혀 있는 대은이라는 글자를 보던 연정개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대로면 알려진 것보다 더욱 빠르게 도착하겠어.”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사흑련이란 호랑이에 대은상단이라는 거대한 날개가 달렸고, 그로 인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결과가 나왔다.
스윽―
연정개는 소매를 들어, 땀을 훔쳤다. 그리고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바로 맨 선두에 있는 배를 향해서였다.
다른 배들보다 더 화려하고 커다란 배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는 겨우 열 명이나 될법한 인원만 보였다.
적은 인원. 하지만 그 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다른 모든 배를 합쳐도 압도적일 정도였다.
“저들이 모두 도착하면 사천은 곧 지옥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작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그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뱃머리를 향한 채였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뱃머리에는 젊은 여인이 넉 자가량이나 되는 곰방대를 한 손에 든 채 앉아 있었다.
‘저 여인은…….’
연정개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인의 행색은 독특했다.
코에서부터 내려온 면사를 걸친 그녀는 눈만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마치 여우와도 같이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다.
그리고 의복은 어떠한가.
이토록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어깨를 드러낸 화려한 궁장을 입고 있었다.
남자라면 한순간 눈을 빼앗길 만큼 고혹적인 차림과 눈빛을 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연정개는 공포를 느꼈다.
그녀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었다.
혈루열왕 농질.
사흑련주의 직속 수하들인 칠요선 중 한 명이 그녀였다.
“불혹은 훨씬 넘은 나이라 들었는데, 저렇게나 젊어 보이는 모습이라니…….”
주먹을 쥔 손이 땀으로 흥건했다.
겉으로는 이제 약관을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제아무리 주안술을 펼쳤다고 해도 저렇게 어린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놀라운 공력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곧 저들이 도착한다는 정보를 전해야…….”
세세히 상황을 파악한 연정개가 몸을 돌리려던 그때.
‘응?’
그는 농질과 두 눈이 마주쳤다.
등골에 소름이 올라왔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백여 장.
지금 연정개는 개방의 특수한 무공인 천안법(天眼法)을 펼쳐서 먼 거리의 인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똑바로 보고 있다는 것은…….
‘들켰……!’
그 순간 농질의 눈이 휘어졌다.
서늘하고, 섬뜩한 눈웃음에 연정개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은 순간.
‘헙! 설마?!’
농질이 지체 없이 배에서 뛰어내리더니, 물 위에 가볍게 몸을 세웠다.
‘수, 수상비(水上飛)!’
물 위에 선 농질을 보던 연정개는 다급하게 굳은 몸을 돌리며, 발을 뻗었다.
파앗!
그러곤 재빠르게 극성의 선풍신법(旋風身法)을 펼치며, 숲으로 몸을 던졌다.
‘도…… 도망가야 해!’
그가 황급하게 나뭇가지를 짓밟으며 일각 정도 뛰쳐나갔을까.
“헉!”
계속 내달리던 연정개는 순간 선풍신법을 멈추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 언제!?”
내디디려던 나뭇가지에 한 인영이 곰방대를 든 채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친 순간.
“후우.”
인영, 농질이 숨을 뱉음과 함께 입가를 가린 면사 사이로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를 잠시.
툭.
그녀가 곰방대를 밑으로 털어 냈다.
다 탄 재가 밑으로 떨어졌다.
한차례 재를 모두 털어 낸 농질은 곰방대를 든 손으로 턱을 괴며, 고갤 들었다.
“개방도는 오랜만에 보는걸.”
양 끝이 치솟은 날카로운 눈매가 연정개를 훑더니, 이내 시선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삼 결이라면…… 분타주인가.”
연정개의 옆구리에 있는 매듭을 파악한 그녀의 눈이 마치 초승달처럼 얇게 휘어졌다.
“첫 희생양으로 쓸 만하겠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곰방대가 횡으로 움직이며, 긴 궤적을 그렸다.
그 순간.
스으으―
눈을 부릅뜬 연정개의 목에 실금이 그어지더니, 그대로 머리가 분리되며 아래로 속절없이 떨어졌다.
솟구치는 피 분수.
그 순간 농질은 기막을 펼쳐,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핏물들을 막아 냈다.
놀라운 기예의 향연.
잠시간 투명한 막에 흘러내리는 핏물을 보던 그녀는 다시 곰방대에 잎을 채워 넣고 불을 붙였다.
곧 연기가 뿜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그녀의 두 눈동자가 사이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피를 보니 흥분되는걸.”
흥분이 섞인 목소리를 흘린 그녀의 사이한 안광이 구르듯 움직였다.
그러다 이윽고 한 곳에서 멈췄다.
그녀가 향하는 목적지.
아미산을 담은 채.
“오랜만에 비구니들의 피 맛을 다시 맛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