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멸절대가 혈우검가를 섬멸하고 그 주변, 서림 일대의 사파 세력을 소탕 중이라 합니다.”
천휘와 멸절대가 해낸 임무 수행의 결과가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부군사, 설검의 입에서였다.
“현재까지 소탕한 사파는 혈우검가와 근방에 위치한 사두방과 흑방회, 귀소보(鬼笑堡)…….”
그의 입에서 사파의 문파명이 계속해 나오자, 좌중의 눈빛이 변했다.
멸절대는 급조된 별동대였다.
후기지수들이 명성을 쌓을 기회라고 여기긴 했으나, 기존 부대처럼 활약하리란 기대는 없었다.
한데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니, 어찌 감탄이 나오지 않으랴.
그렇게 얼마간 말을 이어 갔을까.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몇몇 문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멸절대의 손 아래 소탕되었습니다.”
마침내 설검이 말을 끝마쳤다.
“허허, 대단하군. 열흘 만에 서림 일대를 완전히 토벌하다니.”
“믿기 힘들 지경이구려.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 많은 문파를 토벌하고, 정리하다니. 대체 어떻게…….”
그제야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이들이 꾹 닫고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감탄과 경악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누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한곳으로 향했다.
바로 화산의 현도였다.
만면에 뿌듯함이 가득한 그의 모습은 약간 콧대가 올라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였다.
“혹 부상자는 없는가?”
누군가가 다급히 물었다.
곤륜의 장로, 고영진인이었다.
설검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멸절대에 곤륜의 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혈우검가가 어떤 곳인가.
이백 년 넘게 서림을 지배하던 가문으로 그 힘이 비록 대문파에 달하진 못한다고 해도, 바로 그 아래 수준은 되었다.
군소문파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인 것이다.
예상보다 뛰어난 성과긴 하나, 매화신협이 같이 갔기에 성공할 것이라는 예측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상처도 없이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염려를 하는 것은 고영진인뿐만이 아니었다.
멸절대에 제자들이 있는 문파 인물들이 걱정의 눈빛으로 설검을 바라봤다.
설검은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주름진 얼굴에 드리워진 감정을 읽고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모두 무사하다고 합니다.”
“허허, 그런가.”
고영진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후우, 다행이구려.”
옆에서 숨죽이고 있던 청성의 장로, 도양흔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쉴 무렵.
“그리고 또 하나. 중히 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검이 굳은 얼굴로 다시금 입을 뗐다.
“혈우검가에 흑야차가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도 무정도객과 성휘나찰사를 대동하고 말입니다.”
순간 좌중의 표정에 날이 섰다.
‘흑야차’란 별호가 가진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사흑련주의 막내 제자.
그 위치 하나만으로도 흑야차라는 존재는 사파의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우위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무정도객과 성휘나찰사란 고수가 함께 나타난 것이니.
어찌 반응을 안 하겠는가.
하나 그것도 잠시 의문이 일었다.
방금 전, 설검은 분명 멸절대가 혈우검가를 섬멸하고 근처의 사파까지 소탕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혈우검가에 흑야차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흑야차도 소탕한 것인지요?”
협위대주 추계광이 나직이 물었다.
모두가 품은 의문이었다.
설검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쉽게도 흑야차를 거의 다 잡은 상황에서, 아깝게 놓쳤다고 했습니다.”
“아쉽군.”
“놓쳤다는 건가.”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흑야차는 훗날 무림맹의 정적이 될 확률이 높은 자였다.
이왕지사 삭초제근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한데 결국 놓쳐 버렸으니 그들의 입장상 아쉬울 따름이었다.
한편 현도와 용주개는 설검의 대답을 듣고는, 속으로 고갤 갸웃했다.
‘휘가 흑야차를 놓쳤단 말인가?’
‘비천무영신법(飛天無影身法)을 꿰뚫어 본 놈이다. 그런데 놓쳐? 흑야차가 소문보다 강한 건가? 아니면 무언가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들이 아는 천휘의 무위는 제아무리 흑야차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를 상대하려면 최소 오황문의 문주급은 돼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휘가 상대해 이긴 자들이 백사신과 녹림대제였기에.
둘이 천휘가 왜 흑야차를 놓친 것인지에 대해서 추측할 무렵.
“상대가 상대이지 않습니까?”
설검은 아쉬워하며 탄식을 내뱉는 이들을 향해서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모두가 납득했단 표정을 하곤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였다.
따지고 보면, 상대가 쉽지 않았다.
분위기가 조금 풀린 좌중을 훑던 설검이 이때다 싶어, 말을 덧붙였다.
“거기다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정도객은 매화신협의 손에 의해 명을 달리했고, 성휘나찰사와 흑야차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채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무정도객을 쓰러트렸단 말인가?”
“거기에다가 성휘나찰사와 흑야차가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다고?”
순간 모두의 눈이 커졌다.
무정도객과 성휘나찰사는 강호에 그 명성을 크게 떨치는 자들로, 무극지경의 고수였다.
특히나 성휘나찰사는 그 경지가 천무지경을 엿봤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 실력이 뛰어난 고수였다.
거기다 흑야차 역시 내상을 입었다고 하니 설검의 말처럼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셋을 상대로 그 정도라니, 대단하구려.”
“후기지수들로만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는데, 그만한 성과라니.”
좌중들은 혀를 내둘렀다.
매화신협이 녹림대제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은연중에 녹림대제가 소문보다 약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게 아니라면 이제 약관을 넘은 아해가 천무지경에 도달했단 뜻이니.
“대단하군. 대단해.”
“결성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별동대로 그러한 성과를 이뤄 내다니, 놀랍구나.”
그때 천중검문의 장로, 철수비검이 현도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진인께서는 좋으시겠습니다.”
그가 부럽다는 눈빛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무위는 물론이고, 통솔력도 뛰어난 듯하니, 참으로 대단한 제자를 키우셨습니다.”
옆에서 다른 이들도 동조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참으로 부럽습니다.”
“무량수불. 화산파에 그토록 뛰어난 아해, 아니. 소협이 나오니, 천존께서 보우하셨나 봅니다.”
“맹의 큰 홍복입니다.”
연달아 나오는 극찬에 현도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허허, 과한 칭찬이십니다.”
겸양을 떨었지만, 정작 현도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짙어져만 갔다.
보는 누구나 현도가 기뻐하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동시에 그들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훗날 화산파가 이름을 크게 떨치겠구나.’
‘이번 전쟁이 끝나면 화산파가 무당을 위협할 수도…….’
‘화산과 손을 잡아야 하는가.’
지금이야 당장 직면한 전쟁이 우선이었지만, 그 훗날도 생각해야 했다.
이 전쟁으로 사흑련이 없어지고, 강호의 판도가 크게 바뀔 터이니.
그리고 그런 강호에서 천휘의 존재는 지금과 비교도 안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자리한 이들이 화산파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던 중.
“또 다른 정보가 있는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 가만히 있던 군사, 제갈공이었다.
충격적인 정보의 연속에도 평소처럼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제갈공을 힐끗 바라본 설검은 찰나지간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폈다.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무표정.
당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초조해진 설검은 소매 속에 있는 섭선을 만지작거리며, 살짝 갈라진 입술을 뗐다.
“이외에 없습니다.”
말과 함께 설검은 자리에 앉았다.
할 이야기는 끝났다는 뜻이었다.
군사는 그런 설검을 잠시 바라보다, 용주개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오황문은 어떻습니까?”
앞뒤도 없이 바로 물어 온 질문에 용주개의 콧잔등이 찌푸려졌으나, 그는 이내 그 답을 내놓았다.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좌중이 술렁거렸다.
“벌써 말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반복하던 패거리가 벌써부터 하나로 모이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나 같이 놀란 눈을 떴다.
아무리 사흑련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만들었다지만, 결국 그들은 사파.
그 습성은 버릴 수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에서도 마지막까지 서로 눈치를 보면서, 힘을 축적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건만…….
상황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때 용주개가 말을 덧붙였다.
“상황이 심각한 걸 느낀 거겠지.”
좌중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 제갈공은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그러면 서둘러 움직여야겠군요.”
그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정확히는 무림맹의 삼단과 사대를 이끄는 자들을 차례로 보는 것이었다.
“출정 준비는 되었습니까?”
유일한 불참자, 철혈단주를 제외한 남은 여섯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단 삼단, 사대를…….”
쿵!
군사는 말을 하던 중 갑자기 들려오는 커다란 문소리에 말을 끊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한 중년인이 서 있었다.
온통 땀범벅인 중년인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회, 회의를 방해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히 전할 말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좌중은 한창 회의 중 양해도 구하지 않고 갑자기 들어온 이에 처음에는 화를 내려 했다. 그러다 이내 그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은당주(非隱黨主)?”
그는 한시가 바빠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자로, 무림맹의 정보 조직, 비은당의 당주 위지복(魏志福)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군사가 위지복에게 물었다.
그에 위지복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나흘 전 사흑련에서 일련의 무리가 나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파악하기로, 그 수는 약 이천 명 이상…….”
“무슨!”
“이천 명?!”
위지복의 말에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천 명이라고 함은 군소 방파 중에서도 상당히 규모가 큰 곳과 비견될 만한 전력이었다.
특히나 사흑련에서 보낸 이들이라면, 그 전력은 보통 이천 명과 궤를 달리할 터였다.
그렇게 모두가 놀란 와중에도 위지복은 계속해서 알아낸 정보를 읊어 갔다.
“……그 구성은 사흑련의 혈영대(血影隊)와 귀영대(鬼影隊)로 그들의 무위는 최소 일류 이상입니다.”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마치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이 멍해졌다.
그때 멍해 있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겨우 눈썹을 찌푸리기만 한 군사가 그를 보며, 물었다.
“그러한 것보다 목적지는 어딘가?”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
그는 냉정하게 그들이 향하는 곳을 파악해 움직일 생각에 물어본 것이었고, 이내 침을 삼킨 비은당주가 입을 달싹였다.
“……사천입니다.”
“뭣이라?! 사천이라고?!”
“사천?!”
사천에 적을 둔 청성파와 아미파의 장로들이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들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이천 명의 사파 무인들이 습격해 온다고 한다.
그것도 사흑련에서 악랄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혈영대와 귀영대가 함께 이루어진 병력으로.
사천이 피로 물들 것이 보였다.
“가, 가 봐야겠소!”
“소승 또한…….”
둘이 뛰쳐나가려 할 때.
“잠시 기다리십시오.”
군사가 나직이 말했다.
“지금 서둘러 봤자, 소용없을 겁니다. 차라리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가까운 이들이라면……?”
“사천 근처에 임무를 하러 간 대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 모두의 뇌리에 조금 전 회의의 주제였던 대대가 떠올랐다.
* * *
혈우검가의 정리는 운학수사의 합류로 인해서, 급물살을 탄 상태였다.
먼저 사파인들 대부분 단전을 폐했다. 이후 그들은 뇌옥에 갇히거나, 장원을 수복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런 소란 속.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호광개는 정리를 도와준 운학수사와 일행을 보면서 감사를 표했다.
서림의 사파인은 그 수가 많았다.
지금 혈우검가에 포박되어 있거나 일을 하는 수만 해도 물경 오백 명.
겨우 사십 남짓한 멸절대로 그들을 모두 통제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운학수사와 그 일행의 도움은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다.
“아닐세.”
호광개의 인사에 운학수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자네들이 쓰러트린 사파인들을 포박하고, 뒷정리만 도운 것일 뿐이거늘.”
그가 말하며, 고소를 머금었다.
그 말대로 정말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광개는 고개를 내저으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것이 저희에게 큰 도움입니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저희만 있었더라면 뒷정리를 하느라 지금도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허허, 그런가.”
그 웃음에 운학수사도 마주 웃기를 잠시, 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적색과 흑색이 어우러진 도복을 입은 채 의자에 앉은 미청년.
척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외모에, 그 기도조차 뛰어나 보이는 자.
바로 매화신협, 천휘였다.
‘대단하도다. 서림의 사파들을 고작 보름 만에 모두 소탕하다니.’
경외감이 절로 떠올랐다.
나이가 어렸음에도 그가 해낸 공은 이 서림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난다더니…….’
한편 그가 바라보는 천휘는 무림맹에서 보내온 연통을 읽는 중이었다.
[사흑련의 혈영대와 귀영대 북상중. 수는 최소 이천 명. 목적지는 사천. 그들을 통솔하는 자는…….]
짧고, 간결하게 응축된 정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침 잘됐는걸. 이제 근처에 사파도 없는 것 같았는데.”
희미한 미소를 지은 천휘는 연통을 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머무는 것도 이제 끝이었다.
천휘는 의자 뒤에 놔둔 새하얀 피풍의를 어깨 위에 걸쳤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발을 뗐다.
옆구리의 검 두 자루가 움직였다.
화월과 마검.
이제는 수족처럼 느껴지는 두 자루의 검을 느낀 그는 곧 발을 멈췄다.
장원의 앞이었다.
“어? 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장원을 수복하는 데 열심이던 멸절대원들이 다가온 천휘를 보며, 입을 뗐다.
요 며칠간 휴식만 취하던 천휘가 다가오자, 살짝 긴장한 채였다.
천휘가 그런 그들을 스윽 훑기를 잠시.
“일각 주죠. 떠날 준비해 둬요.”
일방적인 통보를 내렸다.
한쪽 입매를 비틀면서였다.
“이제 다음 임무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