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혈우검가와의 전쟁이 끝났다.
가주인 패혈검은 천휘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혈우검가의 무인들은 모두 포박되어 뇌옥에 갇혔다.
완벽한 임무 완수.
하지만 임무를 완수한 멸절대의 표정은 울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인인 그들이 천휘의 명령하에 담벼락과 전각을 수복하느라 바쁘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이러려고 멸절대 온 게 아닌데.”
누군가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자신들은 무인이지, 전각이나 수복하는 일꾼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멸절대 중 이 일에 반항할 배짱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일을 시킨 인물이 대주인 천휘였기 때문이다.
“자자, 얼른 움직이죠?”
전각에서 푹신한 의자를 갖고 와 장원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앉은 천휘가 멸절대원들을 재촉했다.
“거기 뭐 해요? 내공도 쓰고, 팍팍 옮겨요. 그쪽은 벽돌 제대로 맞춰서 자르고…….”
천휘가 훈수를 두듯 말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멸절대와 달리 여유롭고, 태평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멸절대원들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입은 꾹 다문 채 성실히 일했다.
어찌 불만을 터트리랴.
조금 전에 그토록 놀랍기 짝이 없는 무위를 직접 보지 않았는가.
그저 속으로만 한탄을 터트릴 뿐이었다.
‘자기는 저렇게 쉬면서…….’
‘에라이! 존경은 무슨!’
천휘는 부서진 벽돌을 옮기고, 새로운 벽돌을 나르는 멸절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입술 삐죽 나온 것 봐라.’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티가 났다.
특히나 구파일방 소속의 대원들은 지금 이러한 일을 하는 게 부끄럽기라도 한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들을 본 천휘가 입을 뗐다.
“이게 다 수련이에요. 수련.”
그는 말과 함께 등받이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팔베개를 하면서 일하는 멸절대를 슥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바위를 정확하게 자르려면 내공의 수발이 일정해야 하고, 그것을 옮기는 데 기본 근력이 필요하죠.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 체력과 내공 수발이에요. 그런데 이것도 제대로 못 하면 실력이 늘기나 하겠어요?”
멸절대가 순간 움찔했다.
맞는 말 같았다.
그때 바위를 들고 와 일정한 모양으로 자르던 단리관천이 입을 열었다.
“이걸 하면 대주처럼 강해질 수 있소?”
“저처럼요?”
단리관천의 질문에 천휘가 피식 웃으며, 손사래 쳤다.
“에이, 그건 불가능하죠. 뭐, 그래도 계속 바위를 일정하게 자르다 보면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을걸요.”
“확실하오?”
“제가 거짓말을 해서 뭐 하게요.”
순간 단리관천의 눈빛이 변했다.
이어서 그는 검을 제대로 고쳐 쥐면서, 눈앞의 바위를 마치 앙숙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갑게 노려봤다.
그만이 아니었다.
다른 멸절대원 또한 은은한 현기가 묻어 나오는 말에 혹해 손에 들린 것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정말 이게 수련인가?’
‘강해질 수 있다고?’
의심이 들긴 했다.
하지만 절대의 신위를 보여 준 천휘가 하는 말이다 보니, 점차 믿는 것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이내 그들의 움직임이 변해 갔다.
어쩔 수 없이 행하던 마음가짐이 적극적으로 변하자, 행동으로도 나타난 것이다.
약간 어물쩍했던 일들이 점점 빠릿해져 가자, 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괜찮은걸.”
변한 대원들의 모습에 그가 만족스러워할 무렵.
“대주. 정말 그 말이 맞는가?”
호광개가 다가왔다.
그의 만면에는 미심쩍은 표정이 가득했다.
“아무리 봐도 보통 수련보다 나을 바는 없어 보이는데.”
그는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죠.”
천휘는 선선하게 말했다.
그에 당황한 건 호광개였다.
“그런데 방금 전엔…….”
“수련하면 전보다 조금이나마 강해지긴 하잖아요. 그거랑 같죠.”
말하던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제가 뭐 수련을 할 때보다 더 빠르게 강해진다고 했나요?”
뻔뻔한 대답에 호광개가 어이없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대주는 생각보다 사람을 아주 잘 다루는군.”
그 말에 천휘가 피식 웃었다.
웃기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과거 천마신교의 교주였던 그에게 사람을 아주 잘 다룬다니.
마치 검수에게 검을 잘 다룬다는 말을 한 것처럼 아주 당연한 말이었다.
웃던 천휘가 호광개를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보다 맡긴 일은 끝났나요?”
“명대로 전하기는 했지.”
호광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우검가를 수복하느라 바쁜 멸절대의 다른 대원들과 다르게 호광개에게는 따로 임무를 하달했던 천휘였다.
“내일 아침이면 혈우검가가 무너졌단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터니.”
“개방이라 그런지 빠르네요.”
“하하! 괜히 십만 방도를 이끄는 방파가 아니지 않겠나.”
호광개가 호쾌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랑스러움이 묻어 나는 미소였다.
그러기를 잠시.
“한데 이러는 이유가 있나?”
호광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휘는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호광개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뭐가요?”
“이곳에서 계속 머물 필요가 있냐는 말이지. 혈우검가도 무너트렸으니 이만 떠나면 될 것 같은데.”
그의 의견은 타당했다.
멸절대에 내려진 임무는 혈우검가의 멸문이었다.
그리고 멸절대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으니, 무림맹에 복귀하면 될 일이었다.
“부대주.”
천휘가 호광개를 나직이 불렀다.
고저 없는 목소리.
하나 그것을 듣는 호광개는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임무가 뭐였죠?”
“혈우검가를 무너트리는…….”
“아니. 그거 말고, 멸절대의 임무요.”
천휘가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멸절대의 임무?
눈살을 찌푸리던 호광개가 머리를 굴리더니, 이내 말을 뱉었다.
“사파의 멸절……?”
“뭐야, 잘 아시면서.”
천휘가 그 말에 씩 웃었다.
“맞아요. 우리의 임무는 사파의 멸절이에요. 그런데 고작 혈우검가를 무너트리는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해요?”
말을 한 천휘의 안광이 번뜩였다.
차갑고도, 서늘한.
마치 옥과 같은 빛을 발하면서.
“우리가 완수해야 할 임무는 이 서림에 있는 사파를 모두 처리하는 거예요.”
“하지만 대주, 그게 혈우검가에 머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설마!”
호광개는 말하다가 말고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이어서 마른침을 삼켰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일일이 언제 다 찾아가겠어요? 안 그래도 이번에 무림맹과 사흑련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쥐새끼처럼 숨는 놈들도 많을 텐데.”
“혈우검가가 무너졌다는 소문을 퍼트린 건, 그들을 한데 모으려고……?”
“그렇죠.”
천휘가 씩 웃었다.
“이 정도의 먹이를 던져 주면 쥐새끼들이 알아서 모이지 않겠어요?”
* * *
혈우검가가 무림맹이 새로 창설한 별동대의 손에 의해서 무너졌다!
혈우검가를 상대하던 별동대 또한 중상을 입어, 요양 중이다!
혈우검가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원래라도 널리 알려질 소문이었지만 개방이 손을 쓰자, 그 속도는 그 어떠한 때보다 빠르게 퍼져 갔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은 무림맹과 사흑련의 전쟁이 알려지며 숨어 있던 사파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기 충분했다.
본래 정파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강북이다.
그러니 강북에 자리 잡은 사파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그 입지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강북에 있는 사파로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이거나, 남하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서림에 남은 대부분의 사파들은 숨을 죽이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들린 것이다.
“뭐? 무림맹 별동대가 중상을 입었다고?”
“그럼 지금 혈우검가에 가 별동대를 제압하면 혈우검가가 오랜 세월 쌓아 왔던 보물과 그들의 절기가 내 손에…….”
사파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기어 나와 송곳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건 다시 없을 기회였다.
혈우검가는 오랜 세월 서림에 군림하고, 지역을 지배해 온 사파의 가문.
그들이 쌓아 온 보물은 산처럼 높을 것이고, 무공 절기는 고절할 것이다.
어찌 탐욕이 생기지 않으랴.
그렇게 다시 수면 위로 나온 사파 몇몇이 혈우검가를 치기 위해서 연합을 맺어 갔다.
단 한탕.
성공하면 인생 역전이었다.
그렇게 숨죽이고 있던 사파들이 하나둘 야욕을 드러낼 무렵.
“자, 여기!”
“웃챠! 받았어! 다음!”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동안 혈우검가는 한창 부서진 곳을 수복 중이었다.
어느새, 어설펐던 움직임은 사라지고 멸절대는 거의 전문 일꾼처럼 행동하고 말하며 날래게 움직였다.
첫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서로를 배려하고, 복돋았다.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이루어진 일의 연속은 그들을 더욱 끈끈하게 했다.
그러한 과정들 덕분일까.
부서졌던 담벼락과 전각들은 어설프지만 구색을 맞추어 수복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멸절대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석양을 일으키고 곧 옅은 별들이 떠올랐다.
어스름한 저녁 한때.
“하암.”
의자에 앉아서 몰려오는 수마에 눈을 비비던 천휘가 문을 바라봤다.
“이제 왔네.”
작게 중얼거린 천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일하던 멸절대를 향해, 입을 달싹였다.
“모두 싸울 준비 해요.”
뜬금없는 명령에 멸절대가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볼 때.
콰아앙!
간신히 수복한 대문이 박살 났다.
“대, 대문이!”
“고치는 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들이 처참하게 박살이 난 대문을 보면서 부들부들 두 손을 떨 때.
“오늘부터 우리가 혈우검가를 차지한다!”
“나와라! 이제부터 서림을 지배하는 것은 혈우검가가 아니라, 우리 사두방(蛇頭幇)과 흑…… 응?”
기세 좋게 대문으로 들어오던 일련의 무리가 흠칫하며 멈춰 섰다.
“왜 저렇게 멀쩡하게…….”
“주,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그들의 눈에 당혹감이 일렁거렸다.
혈우검가를 무너트린 자들은 치열한 혈전에 전투 불능의 상태라 했다.
한데 이게 뭔가.
장원 안에는 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으나, 지극히 건강해 보이는 이들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막 도착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그 기세가 사뭇 대단했다.
아무리 봐도 중상을 입어서 상처를 치료하는 자들이라 보기 어려웠다.
“사, 사두방주. 이게 어찌 된…….”
사두방과 손을 잡았던 흑방회(黑坊會)의 회주가 목을 움츠리던 찰나.
“이 자식들이!”
“감히!”
멸절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은 분노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대문을…… 까득!”
바로 대문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 대문을 수복하고 고치는 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가.
꼬박 하루가 걸리는 일이었다.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한지 알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멸절대는 각자 병기를 꺼내 들었다.
검과 도, 봉 등.
뚜둑―
권각을 펼치는 자들이 손을 푸는 것인지, 뼈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천휘는 분노를 머리끝까지 꾹 눌러 담은 멸절대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처리해요.”
명령이 떨어진 순간.
타다닷!
멸절대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끄아악!”
“컥! 대, 대협!”
“사, 살려 주십, 끄악!”
이전에 상대했던 혈우검가에 비교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적들은 멸절대의 무공에 속수무책으로 밀려갔다.
“용서 못 해!”
“너희들이 한 잘못을 깨우쳐 주마!”
멸절대가 날뛰는 모습을 보던 천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한 마리는 잡았고, 다음 쥐새끼는 언제 오려나.”
한편 현재의 상황을 모르는 일련의 무리가 혈우검가 쪽으로 쾌속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말끔한 무복과 긴장한 표정.
그들은 서림의 주변에 있는 무림맹 소속 정파인들이었다.
“벌써?!”
선두에 선 중년인이 팔뚝 위에 앉은 전서구의 종이를 읽고는 소리쳤다.
“더 서둘러야 하오! 사두방과 흑방회가 이미 출발했다고 하오!”
그는 양정문(良靖門)의 문주, 운학수사(雲鶴秀士)로 서림 내에서는 대협이라고 칭송받는 자였다.
그의 외침에 모두 고갤 끄덕였다.
“속도를 올리겠소.”
“모두 따라오시오.”
뒤이어 능광검(能光劍)과 옥검문주(玉劍門主)가 신법을 발현했다.
뒤이은 수십의 무인들이 셋의 뒤를 따라 속도를 올려 달렸다.
그리고 얼마 후.
“혈우검가다!”
“모두 조심히 오시오!”
운학수사를 중심으로 한 일행들이 단숨에 담벼락을 밟아, 뛰어넘었다.
빠르고, 날랜 몸놀림이었다.
곧 장원에 들어선 운학수사는 검을 뽑아 들면서, 큰 소리를 내질렀다.
“괜찮소! 우리가 도우러 왔…….”
크게 소리치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어허! 거기 빨리빨리 못 움직여요? 부쉈으면 당장 고치지 못할망정 돕는 것도 그리 느려서야…… 에잉.”
“거기 손 노시는 거 다 보여요. 어디서 수작질을 부리려고!”
“헥, 헥. 여기다 두면 되겠습니까?”
“서, 서두르겠습니다!”
사두방과 흑방회의 무인들이 벽돌을 나르며, 장원을 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후기지수들의 면박을 받으면서.